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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학살장서 살아난 소년, 造船강국 만들고 保守 전도사로" '선진사회만들기' 공동 대표 민계식 前 현대重 회장
민계식(71)의 형제는 원래 8남매였다. 6·25 때 참전한 맏형이 전사하면서 7남매(4남3녀)가 됐다. 아버지는 군의감으로, 둘째·셋째·넷째 형 역시 장교로 6·25에 참전했다. 민계식은 ROTC 장교로 월남에 갔다. 1.8㎏의 미숙아로 태어난 그의 맏아들은 야생마처럼 성장해 지금 지구 상 최강의 집단, 미 해병대 중령으로 복무 중이다. 누나 3명은 모두 경기여고-이화여대를 졸업했다. 그의 인생 항로가 조선업으로 정리된 것은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읽은 다음이었다. 서울대 조선공학과 1학년 때인 1961년, 그는 전설의 마라토너 아베베 비킬라가 참가한 서울 마라톤대회에 출전해 2시23분48초로 7위를 했다. 그 자리에서 발탁돼 태릉선수촌에 입촌했으나, 아버지한테 들켜 일주일 만에 퇴촌했다. 미국 버클리대 유학 시절, 아들 병원비와 학비 마련을 위해 금속노조에 가입해 부두 노동자, 대륙횡단 트레일러 기사를 한 경력 때문이다. 석사 취득 후 그는 미국 방산업체에서 학비를 벌어 MIT 박사가 됐다.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일한 22년 동안 그는 매일 새벽 2~3시까지 새 기술을 찾고 신사업을 구상했다. 일주일에 1~2번은 밤을 새웠고, 오전 6시 30분 중역회의가 열리는 구내식당으로 직행했다. 그때 별명이 '최후의 퇴근자'다. IMF 위기 때인 1998년, 금융위기였던 2008년에는 월급을 단 한푼도 받지 않았다. 그동안 그는 특허 300개를 얻었고 발전기 엔진의 대명사인 '힘센 엔진'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매일 울산 조선소 방파제 위를 10㎞씩 뛰었다. 그의 분(分)당 심박수는 40. '산소 탱크' 박지성과 이봉주 수준이다. 대전 KAIST 해양시스템공학전공 교수로 부임해 대학원생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 그가 "룰을 무시하는 대한민국을 좌시할 수 없다"며 보수 시민단체 '선진사회만들기연대'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대한민국 보수(保守)의 모범이자 전형인 민계식. KAIST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다.
◇'반동분자' 학살 현장에 선 가족 그의 집 대문엔 '반동분자의 집'이란 커다란 글자가 적혔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서울 함락 전야에 식구들이 한강까지 갔다. 군의감 아버지는 육군본부에 계셨다. 막내인 내가 친척집에서 전화를 걸었다. '한강 건널까요' 하고 했더니 아버지는 '내일이면 국군이 평양까지 갈지도 모르는데 피란은 왜 가냐'고 했다. 다음 날 서울은 인민공화국이었다. 집 대문엔 '반동분자의 집'이라고 쓰여 있었다." 끌려간 곳에선 인민군이 구덩이를 파놓고 기관총으로 사람들을 갈기고 있었다. 그의 가족 차례가 됐다. '죽이려면 날 죽여라'며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 순간 하늘 위로 '쌕쌕이'(미 전투기)가 날아와 기총소사를 시작했다. 모두 혼비백산한 틈에 도망가 목숨을 건졌다." 미아리 벽돌 공장으로 끌려간 민계식의 가족은 창고 7개 중에 7번째 창고에 갇혔다. "너 이 새끼, 간나새끼…"라는 인민군의 고함이 들려왔다. 첫 번째 창고에서부터 차례차례 목을 삽날로 밟아 사람들을 죽이며 인민군이 다가왔다. 죽음을 각오하던 순간, 쿵쿵 대포 소리가 들렸다. 국군의 포격 소리였다. 일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포격 소리에 놀란 인민군이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전쟁 발발 후 서울 수복 전까지 불과 석 달 동안 그런 죽을 고비를 네 번 겪었다"고 말했다. 그때 일을 얘기했더니 대구 아이들이 '서울내기 다마내기 거짓말한다'고 놀렸다. 그 일로 주먹다짐을 자주 했다."
◇대한민국 대표 '모범생 가족' 경성제국대 의학부에 재학했을 때 학생 120명 중 조선인은 그를 비롯해 6명뿐이었다. 그런 그가 다섯 살 민계식에게 가르친 것이 '만인평등'이었다. 구절을 써서 내 목에 걸어주시곤 달달 외게 했다. 그러곤 종종 '인간관계는 어떻게 해야지?'라고 물으셨다. 그때 'Man is born~' 하고 바로 읊어야지 안 그러면 야단을 들었다. '이 사회의 대부분은 다 너만큼 훌륭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셨다. '그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가훈처럼 들려주셨다. 역시 목에 걸고 다니며 외우도록 한 영어 문장이 '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였다." 놋그릇 뚜껑을 주면서 "이걸 저 앞에 가는 거지에게 갖다주라"고 말했다. 민계식은 "뚜껑을 왜 거지에게 갖다 줍니까?" 하고 물었다. 아버지는 "돈이 궁해서 그릇을 가져간 모양인데 뚜껑이 없으면 제값을 못 받으니 뚜껑까지 갖다 주거라" 하고 답했다. 민계식이 달려가 뚜껑을 건넸다. 거지가 펑펑 울었다. 첫째가 둘째, 둘째가 셋째를 챙기는 방식이었다. 그를 챙긴 건 문학소년이던 넷째 형(한양대 불문과 민희식 전 교수)이었다. 훗날 서울대를 수석 입학한 넷째 형은 정말로 책을 사랑한 독서광이었다. 넷째 형은 약탈을 당해 텅 빈 책장을 부여잡고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판국에 그깟 책 때문에 우느냐"며 형의 뺨을 때렸다. 똑똑해서가 아니라 넷째 형이 내가 3~4살 때부터 펜글씨 교본을 주고 익히게 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이 된 뒤에는 '내일 밤까지 독후감 써 와' 하며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 같은 책을 던져줬다. 그 나이에 고전이 재미가 있었겠나. 8살이나 많은 형이라 무서웠다. 억지로 읽었다. 그러면서 역사책을 접하게 되고 '역사를 알면 앞날을 예측할 수 있다'는 걸 깨쳤다." 그는 "울산에 있을 때 아무리 바빠도 매주 목요일 밤엔 반드시 역사와 리더십, 동·서양 고전을 통독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그가 읽은 책은 2400여권, 독서 일기가 두꺼운 파일로 9권이다. 그는 술과 골프를 안 한다. 9대조(祖)가 술로 인해 멸족할 위기를 겪은 뒤 금주를 가계(家戒)로 삼았기 때문이다. 골프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일이 아니면 멀리하라"는 부친의 가르침을 따랐다. 스트레스는 오직 달리기로 풀었다. 버클리대에서 석사 학위를 밟을 때 시련이 찾아왔다. 첫아이가 1.8㎏ 미숙아로 태어난 것이다. 빚을 갚기 위해 시급 70센트짜리 주유원부터 식당일, 깡통 공장 검사요원, 오클랜드 부두의 하역 인부로 일했다. 샌프란시스코까지 2000㎞를 이틀 만에 주파하는 일도 했다." 미국 방산회사에 취직해 4년간 군함과 원자력 잠수함을 설계했다. 빚을 청산하고도 9000달러를 더 벌어 MIT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그렇게 키운 미숙아 아들이 지금 미 해병대 중령이다. 둘째 아들과 딸은 미국 대학 교수다. 다들 미국에 있는데 전화나 편지를 하면 늘 '아빠 사랑해'라고 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 학교에서 존경하는 국내 인물란에 셋 다 '아버지'라고 써냈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로서 그걸로 성공한 것이다."
◇기술논문 280편, 특허 300건 하지만 그는 기업을 택했다. 내가 지독한 악필(惡筆)이다. 그 악필 때문에 기업을 택했고,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 대우조선 기술담당 전무 겸 기술연구소장으로 일했다. 김우중 회장은 경기고 4년 선배였다. 그를 "인마"라고 부를 만큼 격 없이 대했다. 하지만 김우중은 기술 개발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 브랜드로 수출하고 애프터서비스를 강화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핵심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이야기엔, '대마불사(大馬不死)야. (이것저것) 벌리면 돼'라고 일축했다. 후일 아드님 교통사고 때 문상을 갔더니 '네 말 들을 걸 그랬어'라고 후회하셨다." 라이벌 회사의 총수였던 정주영 회장이 예고 없이 그의 집에 들이닥쳤다. 48세 민계식은 75세 정주영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 회장은 말했다.
"이제, 오시는 겁니다."
"기술 개발 할 겁니까? 안 할 겁니까?"
대답은 역시 '노(No)'였다. 그는 사표를 내고 현대중공업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거 일본 사람이 해? 서양 사람이 해?'라고 물으셨다. '그들이 합니다'라고 답하면, '그럼 우리가 왜 못 해? 해봐!'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걸 해보면 좋겠습니다' 하고 보고하면 '왜 좋아?', '얼마나 봐줘?' 하고 물어보셨다. 이유를 설명하고 '당장은 못 벌겠지만 한 3년쯤 되면 돈 벌 겁니다' 하면 '그래 3년 기회 줄게. 해봐'라고 하셨다. 울산에 오실 때면 부사장급 이상 중역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빙빙 돌다가 갑자기 누군가를 걷어차며 '집에 가서 애나 봐!'라고 할 때가 있었다. 나중에 보면 그 중역은 반드시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회사에 공이 많다는 사람들은 불러서 턱턱 주셨다." 그는 "그중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발전용 중형 엔진인 힘센 엔진"이라고 말했다. 배 한 척당 3~4대 들어가는 발전용 중형 엔진을 3년 안에 국산화하겠다고 당시 사장한테 보고를 했다. 그런데 그는 '엽전들 주제에 무슨 엔진 개발을 한다고…. 미친 자식!'이라며 보고서를 패대기쳤다. 결국 공식 지원 없이 개발을 시작해 7년 만에 완성했다." 배를 파는 부서에서 "한국산 엔진을 쓰면 선주들이 배를 안 산다"며 장착을 거부한 것이다. 민계식은 뜻이 맞는 중역과 독일 최대 컨테이너 선사를 뚫었다.
"우리 걸 6개월만 써보라. 그때도 괜찮으면 돈을 내고 마음에 안 들면 너희가 원하는 엔진으로 바꿔주겠다"고 말했다. 3개월 뒤 엔진 값을 모두 받아냈다고 한다. 2000년에 8대가 팔린 힘센 엔진은 지난해 2200대가 팔렸다.세계 시장 점유율 28%. 1위다. 이 엔진은 육상 발전용으로도 쓰인다. 힘센 엔진 발전기는 지구 반대편 쿠바의 전력난도 해결했다. 쿠바는 10페소 지폐에 힘센 엔진 발전기를 그려 넣었다. 성취에는 상이 따랐다. 그 때마다 그는 상금에 사재를 더해 대학에 기부했다. 모교인 서울대에 12억, 카이스트에 2억원 등 총금액이 십수억원을 넘는다. 그는 "세계 1등이 되자는 강력한 이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불과 10여년 전 우리의 모토는 '일본 미쓰비시(三菱)를 따르자'였다. 스위스 IMD 평가에서 그 미쓰비시를 추월한 게 2008년부터다." 직원 수 3만5000명. 현대중공업보다 1만명이 많다. 못 만드는 게 없는 기술을 가진 미쓰비시가 왜?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상무 2년-부사장 2년-사장 2년-상담역 2년씩이다. 2년 동안 뭘 할 수 있나. 결국은 무사안일, 현상유지다." 잘되는 곳이 망하는 건 결국 한 사람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장쩌민·리펑·후진타오를 모두 만났다. 처음 그들이 방문할 때는 "우리 회사가 좋은 회사라 오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아주 날카로운 기술적인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서 조선 산업을 일으키려는 야심을 읽었다.
◇食·兵보다 중요한 信이 우리에겐 없다 그러나 교수들이 산업계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가르치지 못하는 걸 보고 내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계에서 우리가 선진국 대접을 받는가? 연구개발과 기술만으로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시스템을 개혁해 선진국으로 가자'는 목표로 단체를 만든다고 해 의기투합했다. 그들은 "정부 돈은 절대 받지 말자"고 뜻을 모았다. 민계식도 1000만원을 냈다. 수제자인 안회가 '먹지 않으면 죽지 않느냐'고 물었다. 공자는 '사람은 어차피 한 번 죽지만 신이 없으면 사회가 아예 존립하지 못한다'고 했다. 내 나이 예순이 넘어서 그 말씀을 이해했다. 유대인은 돈을 꿔도 차용증을 안 쓴다. 신뢰가 있으면 모든 일이 빠르고 편해져 효율적이다. 지금 우리에겐 신이 없다." 뒷받침되지 않으면 선진국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보수단체들이 경제성장이라는 박정희 시대의 공(功)에만 초점을 맞추는 데엔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세계 제일의 반공국가였던 대한민국이 종북국가가 돼버린 역설은 반공을 정권 유지에 악용한 결과"라고 말했다. 처음 활동은 회원들이 쓴 칼럼을 언론에 뿌리는 정도였다. 민계식은 "먼저 선진국이 뭔지 정의부터 하고 나서 분야별로 어떻게 언제까지 목표를 달성할지 스케줄을 짜서 실행하자"고 제안했다. 또 "우리 생각에 동조하는 젊은이들을 끌어들여 동력을 키우자"고 했다. "그랬더니 '그래? 그럼 당신이 한번 해봐'라는 뜻에서 대표를 맡긴 것 같다." 민계식은 "미국 해군연구소에 91세 현역이 있다. 지금도 논문을 쓴다. 그에 비하면 나는 젊다. 앞으로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한국사회의 대지주는 왜 몰락했는가?" 그렇다면 그들은 성공방정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들의 성공방정식을 찾기 전에 잠시 박경리의 대하소설《토지》를 떠올려 보자.
《토지》는 한말의 몰락으로부터 광복까지 지주계층이었던 최 씨 일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그리고 있다. 만석꾼 최 씨 집안의 외동딸인 최서희는 몰락한 집안의 옛 땅을 사들여 귀향하며 광복을 맞는 것으로 끝이 난다.
만약 광복 뒤 최 씨 집안의 이야기를 다시 쓴다면? 그들은 다시 몰락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토지는 성공의 척도였다. 정주영 아버지가 토지에 집착했던 것을 보라. 농민들의 가장 절실한 욕망은 내 땅을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해방 직후 농지 총 면적 가운데 자작농이 차지했던 농지는 37퍼센트에 그쳤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었다.
해방이 되자마자 우리사회의 화두는 토지개혁이었다. 일본인들이 물러갔지만 땅은 여전히 중요한 자산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는 농업이 움직이고 있었다. 인구의 70퍼센트가 농민이었다. 농업은 핵심적인 경제기반이었다.
토지에 대한 대외환경은 급변하고 있었다. 일본에 진주한 미군은 농지개혁을 통해 농지를 소작인에게 나눠주었다. 북한에서도 소련군이 1946년 3월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에 따라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지주제를 없애 버린 것이다. 이 토지분배로 김일성의 노동당 정권은 그 정치적 기반을 잡게 됐다.
하지만 남한에서는 토지개혁이 쉽지 않았다. 지주계급은 보수 세력이었다. 미군정과 가까웠던 한민당을 비롯해 당시의 정치 세력가들은 지주 출신이었다. 이들은 토지개혁에 저항했다.
남한에서 토지개혁이 지지부진해지자 농민들이 농지분배를 요구하면서 곳곳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농민들의 땅에 대한 요구가 너무나 강렬해 체제를 위협할 정도였다. 미국 역시 남한의 정치 안정을 위해 토지를 개혁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토지개혁을 실시하면 야당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킬 것이란 이승만 정권의 꼼수도 물론 있었다.
결국 남한에서도 1949년 6월 농지개혁법이 공포된다.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식이었다. 국가가 지주한테 사들인 토지를 농민에게 소작을 주고 1년 수확량의 30퍼센트를 5년 동안 국가에 내면 농민이 토지를 가지는 조건이었다.
1950년 3월부터 5월까지 분배 대상 농지의 80퍼센트 가까이가 소작농에게 나누어졌다. 토지개혁 결과 소작농지는 63퍼센트에서 12퍼센트로 줄어들었다. 토지개혁 직전, 남한에선 1년에 1000석 이상을 거둬들이는 대지주가 905명이 있었다. 이 가운데 부호라고 일컬어지는 5000석 이상 대지주는 70명 정도였다. 토지개혁이 끝난 것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불과 이틀 전인 1950년 6월23일이었다.
'성공한 사업가'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지주층은 어떻게 됐을까? 몰락했다. 그들은 토지개혁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토지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전쟁으로 피난길에 오른 지주들은 입에 풀칠하기 힘든 상황에 몰리면서 갖고 있는 토지보상 증권을 헐값에 넘겨야만 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토지보상 증권을 갖고 있었던 지주들도 전후 극심한 인플레이션 속에서 정부에게 받기로 했던 보상금이 휴지조각이 돼버리는 허황함을 맞봐야 했다.
쌀이 권력이자, 화폐였던 시절 곡창지대 대지주들은 위상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가 오면서 이제 그들은 그 위치에서 내려와야 했다.
반면 이병철과 구인회, 허만정, 조홍제는 해방 전에 토지를 팔았다. 그들은 전통적인 부의 척도였던 토지에 연연하지 않았다. 토지를 판 돈을 밑천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전통적인 선비 집안인 이들은 당시만 해도 자신들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판받았던 장사를 시작했다. 다른 지주계층과 달리 이들은 새로운 변화에 도전하고 적응해 나갔다. 한 발 앞선 사람이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구인회는 선비 집안이라는 굴레를 던져버리고 옷감을 하는 포목점을 열었다. 이병철은 대지주 아버지에게 땅을 물려받는 대신, 땅을 팔아 그 돈을 사업밑천으로 삼았다. 허 씨 집안 역시 구 씨와 동업하면서 자신들의 땅을 팔았다. 그들의 땅을 산 사람들은 얼마 안 돼 땅이 휴지조각이 되는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정주영도 그의 아버지와 달리 토지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돈을 벌어 토지를 사면 된다는 역발상을 했다.
기업가에게 토지개혁은 또 다른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갖게 되자 생산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생산성은 농가의 실질소득 확대로 이어졌다. 농민들의 경제적으로 안정되자 자녀교육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고 문맹률은 현저하게 떨어졌다. 농촌출신 아이들도 교육을 통해 공무원이나 회사원으로 신분 이동이 가능해졌다.
이후 기업가들이 공장을 지으며 사업을 일구어 나갈 때,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은 농촌출신들은 산업화에 중요한 노동력을 제공했다. 이들은 우리나라 경제가 경제 개발을 추진할 때 중요한 초석이 된 것이다. 지주계층의 몰락은 잠재적인 개발저항 세력을 미리 제거해,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의 이전을 쉽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기업가들이 경영을 하는 데 보다 좋은 기회가 마련된 셈이었다.
"정주영, 이병철, 구인회가 부산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까닭은" 어떤 이들은 시대가 바뀌는 전환기에 기회를 포착해 부를 일궈낸다. 또 다른 이들은 그런 변화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낙오자가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IMF라는 위기가 찾아왔을 때도 그랬다. 대다수 직장인들은 구조조정이라는 핵폭풍 속에서 하루하루 버티기에도 벅차했다. 그러나 그때 회사에서 스스로 걸어 나와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이 있었다. 네이버, 다음, 엔씨소프트, 넥슨과 같은 포털과 게임 회사를 차린 사람들이다. 위기는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릴 것 같지만 위기가 끝나면 언제나 기회를 만드는 사람은 나타났다.
어떤 이들은 CEO가 아닌데 왜 시대의 변화와 국제정세를 알아야 하냐고 반문한다. 그렇지 않다. 보통의 직장인들도 그런 변화를 캐치하고 있어야 한다. 자신의 경쟁사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고 있는지, 하다못해 CEO의 스타일 변화 같은 회사 주변의 변화 움직임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재빨리 기회를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혼자 열심히 한다고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건 아니다. 시대를 읽고 변화의 움직임을 간파하면서 기회를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변화의 움직임을 빨리 찾아내고 그에 따라 자신을 적응시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성공한 사업가’ 모두는 시대의 변혁기에 자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 그들은 부산으로 상징되는 패러다임 변혁기의 한 가운데에서 기회를 포착했다. 정주영은 미군의 군납 건설을 통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병철은 제일제당이라는 제조업을 뛰어들면서 최고 부자의 반열에 올랐다. 구인회 역시 플라스틱 공장을 만들며 사업가의 틀을 다져나갔다. 공통된 장소는 부산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은 그들에게 어떤 기회를 주었을까?
부산에는 시대와 고객이 원하는 수요가 있었다 전쟁은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들었다. 얼마 있지도 않던 산업시설은 잿더미로 변했다. 남한에서는 산업 시설의 40퍼센트가 파괴됐다. 주요공업지대였던 경인과 삼척 역시 폐허가 됐다. 피난행렬은 이어졌다. 지주는 토지를 버렸고, 공장주인도 생산설비를 버렸고, 무역업자도 수입품을 버렸다. 통화남발로 물가는 3년 동안 35배나 뛰어 올라 그나마 갖고 있던 돈은 휴지조각으로 변했다.
전쟁을 피해 사람들이 몰려든 곳은 부산이었다. 그들은 부산에서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인구 50만 명의 부산은, 전쟁 발발 후 300만 명의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기존 인구의 여섯 배에 이르는 사람들로 부산은 북적거렸다.
300만 명 중에서 성공의 기회를 움켜잡은 사람은 시대와 그 시대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포착한 이들이었다. 부산으로 피란 내려온 사람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먹을거리와 최소한의 생필품이었다.
먹을거리는 미국의 원조로 다소 해결됐지만, 비누, 양발, 신발과 같은 일상생활용품이 턱없이 부족했다. 기업가에겐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구인회는 칫솔과 비눗갑 같은 플라스틱 제품을 만들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부산에는 피난민뿐만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전쟁 당시 한국에 파병된 미군은 부산으로 들어왔다. 이들도 수요를 만들어 냈다. 병영과 비행기, 군수물자 수송은 누군가가 해야 했다. 정주영은 미군을 상대로 한 비즈니스로 건설업계에 이름을 내 민다.
"부산에서의 사업이 모두 성공한 건 아니었다 " 시대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곳, 부산 부산에서 사업을 했던 모든 사람이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 초기 목재와 고무 공장을 운영했던 사람은 원자재를 확보하기 어려워 회사가 휘청거릴 정도로 자금난을 겪기도 했다. 미국의 원조가 부산항으로 들어오면서 무역 호황을 노리고 배를 만드는 조선 사업에 뛰어든 사람 역시 어려움을 겪었다. 원조 물자를 날랐던 배들이 주로 일본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기술에서 뒤진 분야는 오히려 심한 타격을 받았다.
일제 때 잘나갔던 대기업도 부산에서 스스로 붕괴되거나 규모가 축소됐다. 화신그룹이 그랬다. 화신의 창업자인 박흥식은 1926년 을지로에 지물(종이) 도매를 하면서 사업을 불러 나갔다. 그 뒤 화신백화점을 세운 뒤 350개의 체인점을 만들면서 몸집을 키웠다. 일제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비행기공장을 세우고 비행기를 헌납하며 일본에 협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해방을 맞자 반민족행위자로 체포됐으며, 한국전쟁 중에는 백화점이 북한군에게 압수당해 버렸다. 전쟁 중에는 일본으로 피신 갔던 박흥식은 그 뒤 새로운 기회를 잡는 데 실패했다.
반면 부산은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에겐 도전의 장이었다. 빈털터리로 피란 온 사람도 기회를 찾아 돈을 벌었다. 구멍가게 수준의 중소기업도 대기업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화신과 같은 일제 강점기의 대기업들은 통제경제 상황에서 일제에 적극 협력하며 사세를 키울 수 있었다. 중소기업은 반대였다. 중소기업은 일제가 벌인 태평양 전쟁으로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다. 원료를 구입하기 힘들었고 강제로 통폐합당하기도 했다. 정주영도 일제의 기업정비령 때문에 서비스센터가 통폐합되면서 사업에 손을 뗄 수밖에 없었지 않았던가.
일본과 무역이 끊긴 것도 대기업에겐 큰 타격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잘 나갔던 대기업들이 일본에서 들여온 상품과 기술에 의존했기 때문에 일본과 무역이 끊기면서 제품 생산에 나서기 힘들어졌다.
반면 부산은 중소기업에게 유리한 환경을 가져다주었다. 시장은 급변했고, 새로운 시장이 생겨났다. 중소기업들은 대기업이 선점한 기존 시장에서 벗어나 틈새시장을 찾을 수 있었다. 일본과의 무역단절로 위기를 맞게 된 대기업들과 달리 중소기업들은 원료와 기술, 시장을 스스로 개척해 나갔다. 구인회가 그랬다. 일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크림을 만들었다. 플라스틱 사업에 뛰어들 때도 일본이 아닌 미국 기계를 들여와 사업을 시작했다.
패러다임이 바뀔 때 기회를 잡아라 한국전쟁 전까지 정주영은 이름도 없는 건설사를 운영해 왔고, 이병철은 나름 무역업으로 돈을 벌었지만 다른 대기업에 비하면 결코 크지 않는 회사였다. 그나마 전쟁 통에 모든 것을 잃었다. 구인회 역시 플라스틱 공장을 세우기까지 그 저 그런 공장을 운영하는 수백 명 가운데 한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은 패러다임이 바뀌는 전환기에 성냥에 불을 붙이듯 사업을 일으켰다. 부산에서 돈을 번 그들은 자본을 모아 공장을 지으면서 제조업에 뛰어든다. 시대가 준 기회였다.
전쟁은 온통 잿빛 미래를 그려 놓았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기회를 찾아낸 사람이 있었다. 패러다임이 변할 때 마다 승자와 패자가 확연하게 갈렸다.
시대의 변혁기에는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릴 것 같지만, 그 끝에는 언제나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변화의 시기에 기업가들은 기회를 엿본다. 변화의 시대에 새로운 도전을 하는 사람이 부를 만들어 냈다.
글로벌금융위기 이후 국내외에선 새로운 변혁기를 맞고 있다. 여기저기서 새로운 파고가 밀려오고 있다. 이 역시 누군가에겐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는 시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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