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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시는 하나님(창 39:19-23)
할렐루야! 하나님이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한 주간도 한결같은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셨다가, 귀하고 복된 날, 하나님의 집에 나와, 예배드릴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깨닫고, 행함으로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요셉은 형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보면, 요셉도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큰 꿈을 꾸었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들이 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이 결코 순탄하지마는 않았습니다. 많은 굴곡이 있었습니다. 거센 비바람을 맞아야만 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야곱은 다른 여러 아들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였음으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아버지 품에 있을 때에는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는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요셉은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은 꿈꾸는 자였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형들이 그에게,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형들은 요셉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였습니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였을 때, 아버지 야곱이 그를 꾸짖고, 그에게,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 야곱은 그 말을 간직해 두었습니다.
요셉은 어릴 적부터, 큰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산산조각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그를 결박했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이 다른 형제들에게,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고 간곡하게 말려서, 형들이 그를 죽이지 않고, 물이 없는 빈 구덩이에, 그를 던져 버렸습니다.
그후 지나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형들은 은 이십을 받고, 요셉을 팔아버렸습니다.
그 미디안 상인들은 요셉을,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습니다. (창 37:1-36)
여러분!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살아오던 요셉은 형들에 의하여, 죽음의 문턱까지 내려갔다가, 겨우 목숨을 부지하였고, 머나먼 타국인 애굽에, 종으로 팔려왔습니다.
사랑받았던 아들이었던 요셉은 하루아침에 타국으로 팔려가, 종이 되었습니다.
그가 꾸었던 꿈과는 전혀 다른 결과였습니다. 요셉이 원하는 삶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인생 여정이 그렇게 빗나가게 될 줄 몰랐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 답답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팔려온 요셉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39:2-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언제 함께 하셨습니까?
아버지 야곱과 함께 있을 때에만 함께 하셨을까요?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집에 있을 때에만,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의 종으로 팔려온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어쩌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할 수도 있었습니다.
“왜 형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
“왜 물 없는 구덩이에 빠져있는데, 구해주지 않으십니까?”
“왜 미디안의 상인에 의하여, 애굽으로 끌려가는데,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
“왜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왔는데, 그냥 모른 척 하십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소리 지르고, 따지고, 원망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어디를 보아도, 요셉이 하나님을 원망했다고 하는 말은 없습니다.
요셉은 그가 처한 환경을 원망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보디발의 집에 팔려온 요셉을 설명하면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과연 무엇이 형통입니까?
요셉이 지금 어떤 형편인데,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가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까? 아니면, 종으로 있으면서, 큰 돈을 벌었습니까? 그의 꿈이 이루어졌습니까? 그가 원하던 삶이 성취되었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의 종이기 때문에, 출세했다는 것입니까?
가나안 땅에 있으면서 형들과 함께 티격태격 사는 것보다는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큰 나라의 힘센 장군 집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복 받았다는 것입니까?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되니, 좋다는 것입니까?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시위대장 보디발도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습니다.
보디발도, 하나님께서 요셉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변함없이, 보디발의 종이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은혜를 입어, 가정 총무가 되었을 뿐입니다.
형들에 의해, 상인에게 팔려서, 먼 나라까지 끌려와, 남의 집에 종으로 들어가,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것이, 과연, 우리들이 생각하는 형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요셉은 지금 무엇을 가졌습니까?
요셉은 지금 무엇을 누리고 있습니까?
요셉은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도, 그가 무언가를 성취한다고 해도, 그 모든 것들은 결코 자기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다 주인인 보디발의 소유가 됩니다.
요셉은 주인인 보디발처럼 살 수 없습니다. 엄연히, 주인과 종일뿐입니다.
마음껏 누릴 수 없습니다.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먹을 수 없습니다. 권력가의 집에 산다고 해도, 마음껏 먹을 수 있을까요? 그는 종일뿐입니다.
가고 싶은 곳, 마음껏 갈 수 없습니다. 단 하루라도 편하게 살 수 없습니다.
잠잘 때, 다리 쭉 펴고 잘 수 있을까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을 잘 수 있을까요? 해가 졌다고 일찍 잠자리에 들 수 있을까요?
그런 여유조차도 부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보디발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요셉을 보면서, 범사에 형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형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형통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아주 쉽게, 우리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형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가 있고, 돈이 많아,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할 수 있고, 가고 싶은 곳, 마음껏 갈 수 있고,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입고 싶은 옷, 마음껏 입을 수 있는 것, 그런 것을 형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관리비가 얼마나 나올까? 걱정 할 필요도 없이, 평수가 큰 아파트 한 채는 가지고 있어야 하고, 전기세가 얼마나 나올까? 올여름 에어컨을 틀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무 걱정할 필요도 없이,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을 만큼, 통장에는 돈이 많이 들어있어야겠지요. 자녀들은 공부를 잘 해야 하고, 좋은 학교에 다녀야 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야 하고, 돈 많은 사람 만나, 결혼해야 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형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지금 보디발의 종입니다. 기껏해야, 가정 총무입니다.
무엇이 형통입니까? 우리들이 생각하는 형통하고는 차이가 너무 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다”고 했습니다.
비록 애굽 사람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있지만,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은 형통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형통한 사람입니다. 그가 비록 어떤 형편에 처해 있을지라도, 그 사는 모습을 보고, “형통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함께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형통의 판단기준입니다.
여러분! 남부럽지 않는 대궐같은 집에서 살고, 푸른 풀발과 쉴만한 물가가 있는 넓은 잔디밭이 있다고 해도, 온갖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되어지고, 맛있는 과일들로 준비되어 있다고 해도, 매일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진수성찬이 차려진 밥상을 받는다 해도, 지옥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만 좋으면 형통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이 있기만 하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설령, 보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것이 바로 형통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소유가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쏟아부어 주시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믿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들이 좋은 집에 살 때에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좁고 좁은 집에서 살 때에도, 변함없이 함께 하십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아주 어릴 적에는 전라도 보성에서 살았지만, 초등학교 때부터는 순천에서 살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초등학생일 때 살던 집과 중학생일 때 살던 집과 고등학생일 때 살던 집이, 다 다릅니다. 요새는 직접 가보지 않아도, 인터넷으로, 그 옛날 집의 모습들을 다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움을 가지고, 한번 살펴보았더니, 초등학생일 때 살던 집은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 살던 집들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집은 철거되고, 집터만 덩그러이 남아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쳐다볼 집마저도 없구나” 생각하니, 허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옛날 집들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은 그때에도 함께 하셨음을 느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늘 함께 하여 주십니다.
좋은 집에서 살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십니다.
건강하든지, 아프든지, 한결같은 사랑으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요셉은 열심히 일했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꿈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현실 앞에서,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주저 앉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애굽의 종으로 팔아버린, 형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 아버지 야곱의 품을 그리워하면서, 눈물 흘리지 않았습니다. 옛날만 그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처한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은 왜 이런 고통을 나에게 주십니까?”라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는 것이 참 힘들었지만, 그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주인인 보디발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조금은, 이전보다는 여유가 있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여유로움도 잠깐뿐이었습니다.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소연할 때도 없었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요셉은 큰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을 알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하나님께 죄를 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썼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먼 나라에서 팔려온 종입니다. 누가 종의 말을 믿겠습니까? 누가 종의 편이 되어, 그를 변호해 줄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보디발은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썼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심히 노하여, 요셉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 요셉이 잘못을 했습니까? 평상시, 요셉의 품행이 나빴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디발은 한쪽 말만 듣고, 심히 노하여, 요셉을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어쩌면, 요셉은 주인 보디발으로부터 배신당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요셉 자신의 사정은 전혀 돌아보지 않고, 한쪽의 일방적인 말만 듣고, 그렇게 감옥에 가두어버린 보디발이 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내색 하나 없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부인을 향하여, 욕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을 향하여, 서운한 마음을 가지지 않습니다.
요셉은 모든 것을 순응했습니다. 참았습니다.
어쩌면 바보같은 삶입니다.
감옥에 갇혔다고 하는 것은 이제 그의 꿈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었지만, 그는 결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21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아멘.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사랑을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면,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간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지 않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때, 세상 사람들은 요셉에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네가 믿는다고 하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있으면, 너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나님은 없다.”
누구든지, 바로 이런 경우에 처하게 된다면, 아마도 낙심이 되고, 두려움이 밀려오게 될 것입니다. 앞날이 캄캄합니다. 종의 신분이었을 때도, 앞날이 그리 밝지만은 않았는데, 이제는 캄캄한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니, 앞날이 캄캄할 뿐이었습니다. 더 이상 꿈을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일이 없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누구에게 하소연합니까? 누구에게 도움을 구합니까?
바로 이때, 우리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은 감옥 안에서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간수장은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겼습니다.
간수장이 감옥에서 해야 하는 모든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였습니다.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습니다.
간수장은 왜 모든 죄수와 사무를 요셉에게 맡겼을까요?
간수장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요셉은 큰 죄를 지어, 감옥에 들어왔습니다. 어쩌면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입니다. 요셉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간수장이 요셉에게 모든 것을 맡겨 버렸습니다.
간수장은 요셉이 주인 보디발의 은혜도 모르는 큰 죄를 지은 죄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죄수들과 모든 제반 사무를 맡겼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요셉에게, 아무 것도 맡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요셉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항상 함께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믿음의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인정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있을 때에도,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때에도, 요셉을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에도,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때에도, 요셉을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39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습니다.”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범사에 형통한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큰 은총을 입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택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11:28)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붙들고,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여러분! 욥은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고 말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왕의 신상 앞에 절하지 않음으로,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속에 들어갔지만, 하나님은 그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단 3:25)라고 말했습니다.
신명기 32:1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찾아와 만나주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항상 주님과 함께 하여야 합니다.
주님을 떠나면,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불행입니다. 빈손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가까이 하면, 주님과 늘 함께 하면, 그것이 행복이요, 형통입니다.
형통이 무엇인가는 주님과 항상 함께 하는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습니다. 체험할 수있습니다.
여러분! 둘째 아들은 많은 것을 들고 아버지 집을 나갔지만, 결국에는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집에 왔을 때, 그를 위하여, 잔치가 열렸습니다.
그는 결코 빈 손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것이 그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나님과 항상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항상 함께 함으로, 범사에 형통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임마누엘의 주님, 우리와 늘 함께 하여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주님과 늘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주님의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주님과 함께 함으로, 범사에 형통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 한마음교회를 풍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