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닌 원년(1467년) ∼ 문명 9년(1477)까지 11년간 교토 근방에서 벌어진 쟁란..
전국시대의 서막을 열었다고 합니다.
막부는 말기적 징후를 보이면서.. 위신은 점점 하향곡선을 그리게 됩니다.
좀 할까하던 7대 장군 요시노리가 아카마쓰가에게 암살당하는 참변이 일어나고,
이 아카마쓰가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교토 주변의 치안과 경비를 맡던 4직(아카마쓰(赤松), 이시키(一色), 야마나(山名), 쿄코쿠(京極))
중 하나였던 야마나가가 공을 세우면서 두각을 나타나게 됩니다.
요시나리의 아들인 요시마사가 어린 나이에 8대 장군직에 취임하는데,
이미, 무로마치 막부의 실권은, 장군의 손을 떠나 관령들에게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수상격인 관령가는 3가문으로 이루어졌는데, 호소카와가와 하타케야마가, 그리고 시바가죠.
요시마사 때, 관령은 호소카와 가쓰모토였습니다.
1459년부터 일어난 재해는 3년간 계속되면서 어수선한 분위기가 되죠.
요시마사는 이를 타파하기 위해, 수차에 걸쳐 덕정령을 발표하나 실패..
막부의 무능을 만인이 인정하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그런 와중에, 1465년 요시마사는 동생 요시미를 후계자로 정하고
후견인엔 가쓰모토를 내세우죠.
하지만, 얼마 후.. 여장군이라 불리던 부인 히노 도미코가
아들 요시히사를 출산하게 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자식에 대한 정은 무섭다고.. 도미코는 궁리 끝에,
당시 잘나가던 야마나 모치토요(법명은 소젠)를 요시히사의 후견인으로 결정합니다.
이 때, 가독 계승 문제는 장군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론..
관령가이기도 하고, 에치젠과 오하리, 도토미의 수호였던 시바가의 가독 상속 문제는..
원만히 해결되지 않아, 결국 두 파로 갈라져 대립하게 됩니다.
가와치, 기이, 엣츄의 수호인 하타케야마가도 가독 상속 문제에 휘말리는데..
동생의 아들인 마사나가를 양자로 삼아 가독을 계승시키려 하지만,
후에 태어나는 아들 요시나리..
이 가문의 상속 문제가 오닌의 난을 유발하는 계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당주인 하타케야마 모치쿠니는.. 마사나가 대신, 요시나리를 후계자를 정하지만..
마사나가가 당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신들이 반발..
관령인 가쓰모토의 지원을 받아 요시나리를 축출하게 되고..
요시나리는 모치토요에게 지원를 요청하게 됩니다.
가쓰모토와 모치토요는, 호소카와가에 양자로 보냈던 모치토요의
막내아들인 도요히사를 가쓰모토가 불문에 출가시켜버린 문제로 감정대립을 하던 중에..
장군가와, 두 관령가인 하타케야마가와 사바가의 후계자 분쟁에 개입하면서 폭발직전이 됩니다.
1467년, 새벽..
관령에서 해임 당하고..(시바 요시카도가 관령 취임)
저택을 요시나리에게 명도하도록 명령받은 마사나가는 이에 반발,
자신의 저택에 불을 지른 후, 영사 가까이에 진을 치고 거병을 합니다.
전열준비를 끝마친.. 요시나리군이 불빛을 향하여 일제 공격을 하면서, 치열한 전투가 시작됩니다.
이를, 금원 숲속의 전이라고 하죠..
이 때, 모치토요는 요시마사의 중립명령을 묵살한 채 군을 움직이지만, 가쓰모토는 움직이질 않죠.
그 결과, 전투는 요시나리와 소젠의 승리..
모치토요는 이를 기회로 가쓰모토의 영지를 몰수하려 하고..
이에 가쓰모토는 일전을 각오하게 됩니다.
어수선해진 나라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조정에선 연호를 오닌으로 고치게 됩니다.
뜻은, 천하의 평화를 의미한다죠..
기원은 어긋난다고..
양 진영은 교토를 반분하여, 동서로 마주보고 포진하게 됩니다.
호소카와군은 동군, 야마나군은 서군으로 불리죠.
동군 병력 > 24국 16만명
아시카가 요시미 (총대장)
호소카와 가쓰모토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시바 요시토시
다케다 신켄(武田信賢) > 와카사쿠니(若狹國)의 다케다가입니다.
아카마쓰 마사노리
교코쿠 모치키요
기요고쿠 모치키요
쇼니 요리타다
아마네 기요사다
도가시 마사치카
모리 도요모토
기타바타케씨 등..
서군 병력 > 20국 11만명 (9만명이라고도 하더군요.)
아시카가 요시히사 (총대장)
야마나 모치토요
하타케야마 요시나리
시바 요시카도
오우치 마사히로 > 명과의 무역독점을 가지고 호소카와씨와 대립했다는군요.
이시키 요시나오
롯카쿠 다카요리
요야스 마사야스
스와 요시카네
코오노 미치나오
토기 나리요리
아사쿠라씨, 사이토씨 등..
모리 도요모토는, 막부에 압수된 영지를 탈환하기 위해 동군에 참가하지만,
후에, 그것을 이루기 위해선 서군쪽이 유리하다고 판단, 편을 바꿉니다.
아사쿠라씨도 나중에 동군으로 편을 바꾸죠.
편을 바꾼 대명들이 더 있지만.. 지루해져가는 전쟁에 활력소(?)는 안 됐다는..
아무튼, 장군의 막후교섭에도 불구.. 1467년 5월 26일에 전란은 시작됩니다.
개전초기엔, 야마다군이 우세했으며..
총병력은 동군이 우세하지만, 실질적으론 서군이 우위에 있었다는군요.
가쓰모토는 각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상경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군이 모여 일시에 싸운 것은 아닙니다.
싸우는 중에 도착해서, 참가하는 식이죠..
간략사
분쇼 2년=오닌 원년(1467)
5월 26일
동군의 다케다 신켄군이 이시키 요시나오 저택을 습격.
이를 계기로, 동서 양군의 전투가 소규모 분쟁에서 전면전으로 확대.
6월 1일
요시마사와 요시미가 가쓰모토에게 모치토요 토벌령을 내림.
얼마 후, 모치토요가 8개국의 병력을 이끌고 상경.
9월 13일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와 오우치 마사히로의 연합군이 궁전을 점거.
9월 18일
동군이 동 이와쿠라 합전에서 서군을 격파.
10월 4일
서군의 하타케야마군, 오우치군, 이시키군, 토키군의 연합군이
파상적인 2차례 공격으로, 동군의 본거지인 쇼코쿠사를 떨어뜨리는데 성공.
하지만, 다음날에 동군의 대공세에 버티지 못해, 쇼코쿠사는 다시 동군에게로..
이를, 10월 3일에서 5일까지 벌어진 쇼코쿠사 합전이라 함.
이후, 전란은 각 지방으로 확대되죠.
토민들의 반항도 시작되고.. 참가했던 대명들이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서
이런저런 푸닥거리를 하게 되죠..
1473년에 모치토요와 가쓰모토가 차례로 죽자..
전투는 지루하게 전개되고, 결국 막부의 수습으로 1477년에 막을 내립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하극상 시대 시작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전국시대..
동군과 서군의 교전으로 시작해서..
역시나 그렇게 끝나는군요..
세키가하라.. 이 때, 전국시대가 끝났다고 본다면 말이죠...
첫댓글 자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