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자로서 최고의 지성" 에라스무스 Desiderius Erasmus
16세기 최고의 학자를 꼽을 때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는 1순위 후보였습니다. 그는 대표적 인문주의자로서 사제, 교수, 문학가, 신학자였습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Rotterdam)에서 신부의 사생아로 태어난 에라스무스는 중세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있었습니다.
결혼이 금지된 사제에게서 태어난 아들이므로 자신의 존재 자체가 중세의 부패를 상징했고, 또한 동시에 교회는 부정 할 수 없는 자신의 뿌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로마 가톨릭을 크게 비판하되 결코 극단적으로 배척하지는 않았습니다. 에라스무스는 파리에서 라틴어와 헬라어, 히브리어 등의 언어와 문법을 공부하였습니다.
심히 가난했던 형편은 25살의 이 청년을 수도사가 되게 했고 이후 사제로도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문학, 철학, 신학, 법학 등을 더 연구하여 마흔의 나이에 최고의 지성으로 대우 받았습니다. 영국 체류 중 토마스모어와 교류하였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의하였습니다. 그는 캔터베리 대성당을 방문 한 후, 교회의 타락상에 대해 새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순례자들은 장사에 이용되며 교회는 유물 파는 장소로 전락한 것을 본 것입니다. 에라스무스는 중세 교회의 부패 원인이 초대 교회의 단순성을 상실하고 형식주의에 빠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우신예찬(Praise of Folly)>이라는 저술을 통해 대중 신앙에 숨어 있는 그릇된 미신과 그 미신을 경제적으로 이용하는 로마 가톨릭의 그릇된 형태를 비판하며 갱신을 촉구하였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군사 교본(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 1503)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습니다. "사랑의 임무를 져버리고 권력만 추구하는 이들이 가득하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기독교를 위한 중요한 유산을 남겼는데, 이는 신약 성경의 사본들을 모아 대조 비평한 헬라어 신약 성경(1516)을 출판한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자리는 교황이나 교리가 아닌 예수의 말씀에 위치해 있다고 믿었고 성서 원전을 통해 말씀의 본뜻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학문적 태도는 기독교에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형식과 외형이 아닌 성서와 이성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등장이었습니다.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은 출판 5년 후에 독일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 성서로 번역했고 영국에서는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의 신약 본문으로 사용되면서 "표준 본문(Textus Receptus)"으로 인정 받았습니다.
한편 이라스무스는 라틴어 사전과 문법책을 펴냈는데 유럽 학생들의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행동하는 개혁자보다는 개선의 길을 제시하는 비판자로서의 역할에 머물렀습니다. 교황청에 대한 공격으로 파문에 직면하자 에라스무스는 일부 사상을 철회하였습니다. 사실 에라스무스의 개혁은 주로 도덕적 차원의 개선을 의미하였습니다.
수위를 낮추어 파국을 면한 이라스무스는 편안하게 삶을 끝냈습니다. 그러나 1559년 그가 애증을 동시에 보였던 가톨릭교회는 에라스무스의 모든 책을 금서로 선언하고 오히려 그를 저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교황청의 결정과는 달리 당시 유럽에서 팔리던 책의 5권 중 1권은 그의 책일 정도로 가장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시대상을 빗대며 다음과 같은 경구를 남겼습니다.
"장님의 세상에서 한 눈 가진 사람이 왕이다." 위 문장에 정말 어울리는 인물은 참으로 에라스무스 자신이었습니다. 위클리프나 에라스무스 등은 "장님의 세상" 중에서 '한 눈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면에서 중세의 본질적 문제에 대해 두 눈을 다 뜨지 못한 한계가 있습니다. 중세 교회는 교황이나 교회의 도덕적 변화뿐 아니라 보다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새로운 사상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는 루터나 칼빈처럼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개혁자 목숨을 걸고 선명한 가시밭길을 걸었던 것과는 달리 에라스무스는 현장이 아닌 서가에 주로 있었고 또 개선의 길을 모색하다가 중도에 철회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에라스무스는 중세의 오류를 가장 지혜롭게 지적한 인물이었으며, 근대에서 더 큰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의 저작들과 학문적 통찰력은 중세에서 근대의 계몽주의로 나아가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에는 에라스무스 대학이 있으며 이 도시의 큰 다리는 그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고 현재에도 에라스무스의 날이 기념되고 있습니다. 1536년 에라스무스는 바젤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묻힌 교회당은 당시 가톨릭 건물이었으나 훗날 바젤에서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후 개신교회 예배당으로 바뀌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이것이었습니다. "오 자비로우신 예수여! 주여, 저를 자유롭게 하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O, Jesu, misericordia: Domine libera me: Domine miserere mei.]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