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게소에서 찍은 공주산성[公州公山城]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금성동·옥룡동에 걸쳐 있는 백제시대 석축 성곽.
건립경위
공주 공산성의 축성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천도 이전에 축조된 것인지, 아니면 천도 후에 축조되었는지조차 불분명하다. 천도 이전에 축조되었다면 축조 배경을 잘 알 수 없지만, 천도 이후에 축조되었다면 왕궁 및 왕도 방비를 위해 축성된 것이 분명하다.
위치
공주시 북단에는 금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는데, 그 남안(南岸)에 공산(公山)이 있다. 공주 공산성은 이곳에 있다.
형태
공주 공산성이 있는 공산은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산봉(山峰)으로 이루어졌다. 동쪽에 있는 산봉은 해발 110m이고, 서쪽의 산봉은 해발 85m이다. 공주 공산성은 이 두 개의 산봉을 에워싸면서 축조되어 있다. 자연스럽게 두 산봉 사이의 계곡부를 에워싸는 포곡식의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공주시가지 쪽에 해당되는 남쪽은 높고, 금강 쪽에 해당되는 북쪽은 낮아 남고북저(南高北低)의 지형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전체 성벽의 둘레 2,660m 중 1,930m는 석성이고, 730m는 토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황
백제 때 축조된 동쪽의 토성 부분은 복원 없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나머지 석성 부분은 복원을 통해 원래의 성벽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특히 서문지와 남문지 주변은 최근에 새롭게 복원하여 원래의 성벽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다. 석성 위의 여장 시설은 복원하지 못하고 형태만 표현해 놓고 있다.
의의와 평가
백제 웅진시대 때 왕궁이 어디에 있었는가는 여전히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공주 공산성 안에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더 우세한 편이다. 그렇다면 공주 공산성이 백제의 왕성이 되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공주 공산성은 백제 왕성의 특징은 물론, 왕성을 중심으로 한 당시 웅진 왕도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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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석, 「백제 웅진성인 공산성에 대하여」(『마한·백제문화』14,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1999)
서정석, 「웅진도성의 구조에 대한 일고찰」(『백제문화』29,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2000)
김수태, 「웅진성의 변천」(『백제문화』30,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2001)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들판을 가로지르는 경부고속철도
서울 · 부산 간 총연장 412㎞에 달하는 고속 전철화 사업으로 2010년 완공 예정이다. 현재 경부선 철도의 수송 용량의 포화 상태와 경부 고속 도로의 차량 및 물동량 증가에 따른 사회적 비용의 증가는 우리나라 국가 경쟁력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에 따라 경부 축의 여객 및 화물 수송 능력의 확대를 목적으로 경부 고속 전철화 사업이 추진되었다. 경부 고속 전철이 완성되면 서울과 부산 간의 연결 시간을 두 시간으로 단축시켜 전국의 반나절 생활권화가 가능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현재 수도권에 집중된 각종 기능의 분산이 가속화될 것이며, 국토의 균형적인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출처:(Basic 고교생을 위한 지리 용어사전)
골약동[骨若洞, Goryak-dong]
전라남도 광양시의 남부에 위치한 동이다. 북쪽의 구봉화산(472m)을 중심으로 산지가 이어지며 남쪽 해안과 간척지에 취락과 산업시설이 발달한다. 성황천과 정산천이 동쪽을 지나 광양만으로 흘러들어간다. 동의 남쪽 간척지에 광양컨테이너 부두가 있다. 원래 조선 시대 골약소(骨若所)와 골약면이었다. 1989년 동광양시가 생기면서 동이 되었다. 1995년에 광양시로 편입되고 같은 해 황금동 · 성황동을 병합하였다. 현재 황금동 · 황길동 등 5개의 법정동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광양)에서 "소(所)가 12이니, 문현(蚊峴) · 노을도(奴乙道) · 골약(骨若) (후략)"이라는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며 이것을 통해 과거 골약소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골약소, 골약포가 나오며 골약리 부곡(骨若里 部曲)이 있었다고 하였다. 한편, 『여지도서』에 '골약면'으로 나와 조선 후기에 면으로 승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조선 후기 지도에 골약면으로 나타난다. 특히 『해동지도』에 건대산(구봉화산)과 가야산 남쪽의 해안 지역으로 면이 묘사되어 있다. 개골산(皆骨山, 금강산)과 가야산의 암석이 비슷해 '골(骨)'과 같을 '약(若)'자를 써서 지명이 만들어졌다고도 하며, 크다는 의미인 '고락'의 음을 빌어 골약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한편, 면내의 마을 지명이었던 장길리는 2002년 하포로 고시지명이 바뀌었다.
출처:(한국지명유래집)
2024-03-01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