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학으로 풀어본 '올림픽 성공의 비밀'
베이징 금빛 드라마 속 '올림픽의 경영학'
장원준 산업부 기자 wjjang@!chosun.com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살아날 수 있다'고?
'아무리 절망적이더라도 희망을 버리지 말라'(소설 '모비 딕')고?
뭐 '좋은 충고'인 줄은 알겠다. 그래도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네 번 다운 당하고도 역전 KO승을 거둔 4전5기 홍수환 신화', '종료 2분 전까지 뒤지다가, 이 행성(行星) 최강의 자물쇠(이탈리아 수비)를 부수며 승부를 뒤집은 2002 월드컵 16강전'을 떠올린다면? '희망의 불씨'란 화두가 비로소 살갗에 와 닿지 않는가? 스포츠 명승부는 그저 짜릿한 추억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관객도 선수만큼이나 손에 땀을 쥐고 몰입하므로, 잘만 소화해낸다면 직접 겪은 경험처럼 생생하고 소중한 지혜가 된다.
-
- ▲ 소프트 마케팅의 성공사례‘윙크 용대’ 4일 오전, 경기도 수원의 삼성전기 체육관에서 연습 중이던 이용대 선수를 만났다. 그와 기자는“윙크 사진에는 이제 대중들이 식상할 것”이라는 데 쉽게 공감했다. 며칠 후면 만 20세가 되는, 매력과 실력을 탑재한 이 약관(弱冠)의 금메달리스트는 자연스레 배드민턴 라켓을 깨물며 포즈를 취했다. 누나들이 왜 이 젊은이를 깨물고 싶을 만큼 좋아하는지 알 만했다. /최순호 기자 choish@chosun.com
감동과 드라마가 넘쳐났던 '2008 베이징 올림픽'도 그렇다. 특히 리더십과 경영학이란 안경을 쓰고 들여다보자면, 보석 같은 교훈이 곳곳에 배어 있다. 박빙(薄氷)과 환호와 탄식의 승부 속에 케이스 스터디의 소재가 줄을 잇는다.
전승 우승의 전설을 쓴 '김경문 야구'에서는 신뢰와 위임의 리더십을, 동양인의 한계를 뛰어넘은 박태환의 자유형 제패에서는 포기와 집중의 전략을 본다. 장미란이 번쩍 들어올린 바벨 뒤에는 과학 지식 경영이 빛난다.
그리고…, '최고 훈남' 자리를 거머쥔 배드민턴 이용대, 세계인의 뇌리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100m 스프린터 볼트에게서는, 뜻밖에도 마케팅의 비결을 읽는다.
■이용대와 볼트… 왜 유난히 인기 끄나
-
- ▲ 오전 연습을 끝낸 이용대 선수가 땀에 전 푸른 운동복을 벗은 후 흰 티셔츠로 갈아입고 있다. 푸른 옷과 흰 옷 사이를 렌즈에 담았다.
이번 올림픽에서 최고의 한국인 스타는 배드민턴의 이용대 선수였다. '용대찬가', '용대어천가' 같은 패러디 시구(詩句)들이 인터넷과 일상 대화의 화제로 떠오를 정도였다. 철옹성 같아 보였던 박태환 선수의 인기마저 눌렀다. 한국 선수단이 '세계 1등' 시상대에 오른 건 13번이었지만, 이용대에게 보내는 대중의 환호는 특히 뜨거웠다. 왜일까?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세계 최정상의 실력이란 '하드 파워'에서는 금메달리스트들이 비슷했지만, 귀여운 외모나 카메라 앞 윙크 같은 '매력'의 '소프트 파워'에서 이용대 선수가 월등했다"고 분석했다. 품질만 최고면 가만 있어도 소비자는 그냥 꼬인다고? 그것만으로는 2% 부족하다고 이용대의 인기 스토리는 웅변한다.
육상 100m를 포함해 '세계 신기록 3관왕'에 오른 '베이징올림픽의 혜성' 우사인 볼트도 "그렇고말고"라며 목소리를 보탠다. 사실 이번 올림픽의 세계적 각광은 전대미문의 8관왕 마이클 펠프스(수영)가 독점할 만 했다. 하지만 볼트는 좌우를 둘러보며 여유 있게 뛰고도 따낸 100m 1등, "치킨 너겟을 먹고 우승했다"는 괴짜 인터뷰, 출발 전후의 독특한 세러모니 등을 통해 '4차원 스프린터', '세계 육상의 아이콘'으로 떠오르면서 올림픽 팬들의 관심을 펠프스와 균점(均占)했다. 인기의 폭발력으로는 펠프스를 능가했다.
김난도 교수는 "비슷한 기능과 가격의 제품이라도 '매력'과 '흥미'란 소프트 파워를 브랜드에 장착하느냐 못하느냐가 마케팅 승패를 가르는 시대임을 이용대와 볼트가 단적으로 보여줬다"며 "현대차가 일본차에 뒤지는 것은 이제 기능보다는 브랜드의 매력"이라고 진단했다.
리더들이여! 이기고 싶다면 당신에게도, 당신의 작품에도 '매력'을 장착하라.
-
- ▲ 지난 8월 23일 베이징 우커송 야구장에서 열린 한국과 쿠바의 야구 결승전에서 이승엽 선수가 투런 홈런을 치고 있다. 1회초에 터진 이 홈런은 한국 야구단에 금메달을 선사한 결승 타점이 됐다. /조선일보 DB
이번 올림픽의 최대 화제는 야구. 도대체 김경문 야구는 어떻게 일본 드림팀(메이저리거 제외)과 쿠바·미국을 연파하고 '전승 우승'의 신화를 만들었을까? "김경문 드라마의 요체는 선수들이 신나서 춤추게 한 신뢰와 위임의 리더십"이라고 글로벌 컨설팅 업체인 올리버와이먼의 정호석 한국 대표는 진단한다. 일본 호시노 감독과 비교해보자. 호시노는 이번 올림픽에서 좌타자가 나오면 좌투수, 우타자가 나오면 우투수를 기계적으로 등판시키고, 원아웃이라도 주자가 나가면 번트를 대는 극단적 '스몰 야구'를 구사했다. 정 대표는 "이런 리더십 밑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선수나 직원이라도 '지시만 따르면 되는 부속품'이란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들면서 역량도, 근육도 위축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리더가 신뢰하고 위임하면 직원은 춤춘다
김 감독은 달랐다. '좌투수에게 좌타자가 약하다'는 야구 속설보다는 한국의 좌타자를 믿었고, 작전을 많이 쓰지도 않았다. "욕은 내가 혼자 먹는다"며 책임은 전담했지만, 의견은 경청했다. 빈타(貧打)에도 불구하고 뚝심 있게 밀어붙인 '4번 타자 이승엽'은 결국 준결승과 결승에서 승부를 가르는 홈런 2방을 터뜨리며 금메달 진군을 이끌었다.
쿠바와의 결승전 9회말 1사 만루 위기에서는 권한위임형(임파워먼트·empowerment) 리더십이 빛을 발했다. 최철규 세계경영연구원 부원장은 "결정적 위기에서 김 감독은 윤석민 투수를 등판시키려다 '정대현 공이 좋다'는 진갑용 포수의 조언을 받아들였다"며 "김 감독의 권한위임형 리더십을 보여준 대표적 순간"이라고 말했다. "위임할수록 조직과 사람이 성장한다"는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명예회장의 믿음처럼, 김 감독의 위임과 신뢰와 존중은 선수들 기량에 '플러스 알파'의 날개를 달았고, 선수들을 춤추게 했다.
■포기할 것을 잘 골라 과감히 포기하라
전략 경영 분야의 세계 최고봉으로 꼽히는 마이클 포터(Porter) 교수는 "전략의 핵심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선택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이 경구(警句)를, 박태환 선수와 스승 노민상 감독은 극적으로 구현했다.
박태환은 2006 아시안 게임 이후 노 감독과 잠시 헤어져 훈련 공백기를 겪었다. 올해 초 박태환을 다시 맡은 노 감독은 몸 상태, 경쟁 선수 등을 두루 고려해 주종목인 자유형 1500m를 사실상 포기하고, 자유형 400m에 과감히 '올인'했다. 김종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는 "결국 이 '포기와 집중'이 동양인의 자유형 금메달이란 신화를 썼다"고 평가했다.
이는 노 감독이 박태환을 꿰뚫어보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10년 전 박태환을 만난 노 감독은 그 동안 손으로 쓴 훈련일지가 수천 장에 달할 정도로 제자를 연구해왔다.
이번 올림픽에서 사상 최고 성적을 올린 영국도 '포기와 집중'의 효과를 톡톡히 봤다. 영국은 사이클에 집중해 이 종목에서만 8개의 금메달을 쓸어갔다. 국가복권기금을 사이클 훈련비로 투입했고, 2004년 올림픽 조정 은메달리스트(레베카 로메로)마저 조정을 포기시키고 사이클 선수로 변신시킬 정도였다. 로메로는 결국 금메달을 땄다.
■정글에서 살아남는 비법은 '과학 지식 경영'
'완벽한 여(女) 역사(力士)' 장미란도 3년 전에는 바벨을 들 때 좌우 밸런스가 맞지 않는 단점이 있었다. 이것을 과학이 해결했다. 체육과학연구원(KISS)의 문영진 박사가 근전도 분석과 3차원 영상 관찰을 통해 장미란이 어렸을 때 다친 왼쪽 무릎 때문에 역기를 들어올릴 때 오른쪽 다리를 뒤로 빼는 습관이 있음을 발견했다. 장미란은 좌우 근육량을 맞췄고, 이번 올림픽에서 세계 신기록을 5번이나 갈아치웠다.
홍콩 시사주간지 아주주간(亞洲週刊)은 최신호에서 "태릉선수촌을 중심으로 한 과학적 훈련이 (한국 올림픽 7위의) 비밀 병기"라고 보도했다.
과학은 자메이카에도 선물을 안겼다. 미국의 견고한 아성을 무너뜨린 자메이카 남자 육상의 눈부신 선전(善戰) 뒤에는 '자메이카 공과대학'이 있다. 이 학교는 과학자와 기술자가 아니라 스프린터(단거리 육상 선수)를 육성한다. 1999년 '속도와 파워 극대화팀'을 만들어, 잠재력을 갖췄지만 전성기에 이르지 못한 선수들을 골라낸 뒤 과학적 훈련을 통해 세계 정상의 선수와 기록을 쏟아냈다.
■배려하고 섬기는 서번트 리더십
-
지난달 23일, 한국과 헝가리의 여자 핸드볼 3~4위전이 끝나기 50여 초 전. 5점이나 앞서 동메달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한국 임영철 감독이 갑자기 작전 타임을 불렀다.
"마지막 순간이야. (후배들이) 이해해줘야 돼. 마지막 선배들이야. 정희, 순영이, 영란이…"
고참 선수들을 출전시켜 올림픽의 마지막을 코트에서 맞게 해준 임 감독의 파격적 배려에 선수들과 국민들은 함께 울었다. 이날의 동메달은 금메달을 뛰어넘는 감동으로 또 한번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연출해냈다.
이에리사 태릉선수촌장도 눈높이를 선수들에게 맞추었다. 이 촌장은 박태환 선수 등의 식성까지 기억하고는 "왜 오늘 우유만 두 개 먹고 밥 먹는 게 시원찮냐"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식으로 선수들을 격려했다. 이 촌장은 인터뷰할 때마다 "목표를 달성 못한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달라"고 부탁하며 그늘 속 선수까지 챙겼다.
'전 경기 한판 승'을 거둔 유도의 최민호 선수 뒤에도 배려의 리더십이 있었다. 2004년 올림픽에서 동메달에 그친 최민호는 하룻밤에 소주 7병을 마실 정도로 방황하며 슬럼프에 시달렸다. 최 선수를 재도전시킨 리더가 바로 1984년 LA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 안병근 감독.
올림픽 취재팀의 한 기자는 "성긴 머리카락 때문에 이제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안 감독이 최 선수의 훈련 파트너를 자처하며 매트에서 함께 뒹굴었던 모습이 취재 중 가장 인상에 남는다"고 회고했다. 갑상선 암 3기 진단을 받고도 베이징 합류를 강행한 문형철 여자 양궁 감독도 '희생의 리더십'으로 선수들의 에너지를 이끌어냈다.
이광훈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 "글로벌 시대의 지도력은 '권위의 리더십(Authority Leadership)'에서 '섬김의 리더십(Servant Leadership)'으로 무게중심이 확실히 옮겨오고 있다"며 "스포츠 지도자들이 권위를 벗어 던지고 있다는 점은 경영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설명했다.
■위기가 기회로, 단점이 장점으로
'수영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마이클 펠프스와 박태환은, 상식적으로 수영에 어울리지 않는 아이였다. 펠프스는 '집중할 수 없는 아이'(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였고, 박태환은 '숨쉬기 힘든 아이'(천식)였다. 하지만 펠프스는 수영을 집중력 회복의 계기로 삼았고, 11세 이후 1825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는 맹훈련 끝에 세계를 딛고 섰다.
박태환도 마찬가지. "노 감독은 박태환의 단점(천식) 극복 과정을 오히려 장점(폐활량과 양쪽 호흡) 획득의 기회로 활용했다"는 게 조영탁 휴넷(경영 교육 회사) 대표의 분석이다. 박태환이 12세가 되기 전에 꾸준한 유산소 운동을 시켜 7000㏄의 폐활량을 길러냈고, 3차원 수중 카메라까지 동원해 팔 젓기의 균형을 맞추면서 경쟁 선수 견제에 효과적인 양쪽 호흡을 이뤄냈다는 것이다.
박태환은 또 2004년 올림픽 때 부정 출발로 실격 당하는 '위기'에 굴하지 않고, 훈련을 통해 출발 반응 속도를 경쟁자보다 0.1초쯤 빠르게 발전시키는 '기회'로 삼았다. 펜싱 은메달리스트인 남현희 선수는 '154㎝의 작은 키'라는 선천적 위기를 스피드 증진의 기회로 반전시킨 끝에 '반 박자 빠른 공격'으로 우뚝 선 사례다.
■결과라는 미신(迷信)에는 빠지지 마라
그러나 올림픽 신드롬이 과도한 '결과 지상주의'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우려하는 전문가도 있었다.
신동엽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올림픽 드라마에 너무 함몰될 경우 '금메달을 땄으면 과정은 다 좋았고, 못 땄으면 과정은 다 틀렸다'는 식의 인지적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며 "결과라는 미신(迷信)에 빠지면 오히려 합리적 의사 결정을 저해할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
이를테면 한기주와 이승엽을 계속 내세웠던 '뚝심과 신뢰의 김경문 야구'도, 만일 불운(不運)이 겹쳐 중간에 좌절하기라도 했다면 '독선과 오기의 야구'로 폄하되고 말았을 수도 있었다는 지적이다.
입력 : 2008.09.05 13:22 / 수정 : 2008.09.09 1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