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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중 산책, 비 속에 잠긴 옥과 미술관과 성륜사
8월의 여름은 더디게도 흐른다. 휴가다운 휴가는 꿈도 못 꾸고 중순이 넘어서는 그저 유랑단의 수련회를 기다린다. 고급 펜센에 비치 수영복을 입고 파라솔아래 누워있는 내 모습 보다 유랑단 가족들 틈바구니에서 함께 어우러지는 게 훨 나으리라 자족하면서....
한바탕 비가 몰아쳐서 곡성 기차마을 다리가 휩쓸렸다는 비보가 날아든다. 점심 먹고 느즈막이 출발하기로 했다. 광주에서 40여 분 만에 곡성 심청문화센터에 도착 짐을 풀었다. 여기는 국도 변 폐교 부지를 활용해 숙소와 센터를 만들었고 운동장엔 푹신푹신한 잔디가 깔려있다. 꼭 일 년 전 이 매끈한 잔디에서 발야구를 하며 깔깔거리던 일이 떠오른다. 유랑단 어린이들은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내리 퍼붓는 비가 원망스럽겠지. 체육대회를 기대하고 각종 운동기구를 챙겼건만......
3시 전 지효네, 율이네, 찬슬이네, 석인이네, 태원이네, 현아네, 시은이네, 건우네, 원종이네가 모두 도착했다. 뜻밖의 날씨는 뜻하지 않은 메뉴를 개발하게 만든다. 나는 여기서 15분 거리의 옥과미술관에 산책을 가자고 제안했다. 아직 밥 때도 멀었고 이제 우리에겐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다.
양제공을 만날 때 나는 수행과 무욕의 코드였던 청화스님을 흠모한 적이 있었다. 그 고명한 스님이 바로 옥과 미술관 바로 아래 성륜사에 머물렀고 입적을 하셨던 곳이다. 양제공은 20대에 게으름 속의 창조와 느림의 미학을 좋아했던 사람이라 이 곳의 풍광을 좋아했었다. 특별히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바라지 않는 사람에게 딱 어울릴 만큼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곳이다. 계곡의 물소리로 귀를 달래고, 운이 좋다면 봄 날 화사하게 내리쬐는 빛의 물결 속에 온 몸이 살아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림은 벽에 갇혔지만 산천은 너그럽게 풍경을 풀어헤쳤다.
미술관은 관람객도 없다. 지킴이 마저 자리를 비워서 우리 식구들 뿐이다. 일층 전시실엔 풍경을 묘사한 유화들이 걸려있고, 이층엔 짜깁기 식으로 서첩과 조각보, 모시옷 등을 내걸었다. 다들 이 전시물이 세상의 유일한 유물인 것 처럼 진지하게 감상하는 모습이다. 착실함이 착함과 성실함을 조합한 것이라면 유랑단 엄마 아빠들에게 딱 어울리는 코드라고 여겨진다. 사실 전시내용은 감동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비와 운무에 싸인 산의 멀고 가까움과 더러움을 말끔히 씻어 내리는 저 빗소리가 감동이었다.
이제 발걸음을 성륜사로 옮기자. 역사가 오래된 고찰은 아니지만 가는 길 사이사이 배롱나무며 단풍이며 돌담이 어우러져 시골집 정경같다. 억세지 않고 자연 속에 묻어있는 절집은 수수하고 비취빛 탕색의 차 한 잔이 어울린다. 밖에 나올라치면 더욱 사무치게 그리운 게 있으니 바로 끽다거다. 이 수채화 같은 풍광속에 차가 빠져있음이 애석하기만 하다. 무리는 나뉘어서 어느 틈에 흩어지고, 나는 수희씨와 은하씨 사이에 끼어 대웅전 까지 동무가 되었다. 우산 속 모두가 잠잠하다.
대웅전 오르는 보도를 찍어보았다. 기와장이 단정하게 깔린 모습.
# 그 날 저녁 준비, 태원아빠와 율이아빠 숙수로 등장
오늘 본거지는 이미 어린이들이 점거한 상태로 여자 남자가 나뉘어져 있다. 나는 심심한 나머지 스머펫을 따라 쌀을 안치고 고기 삶을 준비를 했다. 소금과 된장, 양파를 넣어 뭉근히 끓이고 이제 집집마다 싸 온 반찬을 펼치니 식당 밥이 부럽지 않다. 태원엄마가 싸 온 묵은 지와 고추장아찌, 무친 갓김치, 깻잎반찬, 건우엄마가 꽃무늬 당근을 썰어 멋을 부린 어묵볶음, 찬슬엄마가 여름에 담근 매실장아찌, 율이엄마가 텃밭 깻잎으로 담은 것, 나중에 도착한 은영언니는 집 안의 밑반찬을 거의 털다시피 했는지 여러 종류의 밑반찬을 알뜰살뜰 챙겨오셨다. 3년의 유랑단 역사에서 음식은 공동체의 징검다리가 되 주었던 것 같다. 먹는 것이 남는 것이다 했던가. 서로 다른 집의 솜씨를 맛보면서 정이 들고 비록 탄 밥일지라도 달게 먹고 지겨울 것 같지만 결코 지겹지 않았던 우리의 한솥밥 처지는 무엇으로 비교하겠는가,
투순이라 불리는 나의 까칠한 입맛이 유랑단 안에서는 불평이 나오질 않았던 것도 그 음식의 바탕에 깔린 마음씨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내 돈 내고 사먹는 밥에서는 결코 이 땡김을 느낄 수 없다. 아 !솥단지에서 솔솔 풍기는 이 고소한 냄새와 함께 태원아빠께서 등장! 무적의 칼을 들고 목장갑을 끼고 결 따라 수육을 썰어내는데 어찌나 입맛이 동하던지..... 나는 강원도 철원에서 맥주 2박스를 싣고 내려 온 가제트님(율이아빠)께 특별 부탁을 드렸다. 가제트님은 조용히 티 내지 않고 움직이면서 필요한 손길을 넣어주는 센스맨!
- 가제트님이 손대야만 이 족발 맛을 살릴 수 있사옵니다. 제발 저희의 간청을 들어주소서.-
일찍이 유랑단 안에서 깔끔 매너와 칼솜씨로 명성이 자자한 가제트님은 과연 유랑단의 장금이(율이엄마)와 쌍벽을 이룰 만하다. 이 족발 썰기는 돼지의 발굽과 앞다리를 잘 해체해서 적당한 슬라이스로 결을 만들어야 하는 고난이도의 작업이다. 못 믿겠다면 직접 칼을 잡아 보시라.
#추억의 놀이에 빠져든 우리- 369와 007빵, 앗싸 어우동 게임등
무엇이 우리를 미친 듯 놀게 만들었을까, 분명 바람잡이는 나였고, 스머펫은 지휘를 하고, 삐삐는 못 이긴 척, 미순씨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정선씨와 찬슬아빠는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오늘의 단장님 원종아빠는 확실한 바람막이가 되어 한바탕 어우러졌다.
- 자, 이제부터 눈치게임을 소개할께요. 남과 동시에 일어나면 탈락이고 혼자 재빨리 번호를 말해야 안전빵입니다. 자 1번- (스머펫이 말을 마치자 마자 번개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2번 ( 원종아빠는 기동대 다운 민첩함과 역동성으로 번호를 이어나간다) - 3번, 아 어떡해. 나 걸렸다 ( 멀리 있다가 상대의 눈치를 채지 못하고 동시에 일어선 미순씨와 현아엄마는 벌칙으로 인디안 밥을 선물로 받았다. 바로 등짝 때리기)
다음은 내 허벅지를 실핏줄이 터지게 두드리면서 했던 놀이 앗싸, 어우동 게임이다. - 학교 다닐 때 해 본 적 있으시죠?. 자기가 지은 별명을 소개하고 다른 사람 별명을 지목하면 된답니다. 그럼 하나씩 별명을 지어야 하는데 저는 앗싸, 어우동이 좋겠어요, 약간 윗옷을 어깨 아래로 내리면서 이렇게 모션까지 실감나게 해줘야 하구요.(스머펫은 어깨 파인 윗옷을 슬쩍 내리면서) 그럼 정아언니는? 맞다 언니는 불나방이 좋겠고, 미순언니도 골라봐요, 뭐 이라이자도 있고 날나리도 있고, 아놀드 파마도 있고,,,- (불나방이 내 성격을 닮았다나. 그럼 날나리는 누구를 닮았나) -좋아, 우리 단장님은 캔디 만화의 테리우스 어때?-( 정아의 소리) -지는 겁나 거시기 한데요. 그냥 테리우스 말고 딴 것으로 하고 싶은디...... 거 나랑께로 할랍니다. 앗싸, 나랑께~~(원종아빠의 나주 사투리가 섞여서 독특한 별명이 지어졌다)- -이제 들어갑니다. 세박자로 치면서 앗싸, 어우동! 앗싸 24!-( 24는 소설의 제목이 아니다. 다름아닌 율이엄마의 별명으로 학창 시절부터 애용하던 단골메뉴라고 했다. 허리 24인치를 나타낸 것) -앗싸, 24. 앗싸 애기엄마-(율이엄마는 엉덩이에 손을 얹고 어깨를 씰룩거리며 현아엄마의 별명을 불렀다) -앗싸, 애기엄마. 앗싸 킹콩샤워- (킹콩샤워는 바로 오늘 생일 주인공인 지효아빠다. 그의 아내인 스머펫이 별명을 지었다)
이리하여 불나방과 날나리(삐삐롱스타킹)와 캡틴 큐(미순씨)와 허리24, 귀부인, 나랑께, 빵빵해(건우엄마), 애기엄마, 킹콩샤워의 불붙는 액션이 시작되었으니 회가 거듭할 수록 빨라지는 박자 속에 우리는 점점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박자를 놓치면 순간 말이 헛나가고, 느닷없이 내 별명이 터져나오면 허둥지둥 당황해서 입이 얼어버린다. 하도 박수를 쳐대니 신진대사가 빨라지고 묵직한 가슴도 시원하니 내려가고 삐삐는 결막염 걸린 눈의 눈물이 마르고 원래 상태를 회복할 정도였다.
온 몸을 다해 몰입하는 저들을 보고 나는 미치도록 행복해했다. 내게 두려운 게임은 없다. 딱 한 가지 꺼벙이 라는 놀이는 쉽게 익혀지지 않았다. 지목받은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꺼벙꺼벙을 연거푸 내뱉는 동안 양 옆의 두 사람은 가운데 사람을 향해 꺼벙꺼벙을 속삭여야 한다. 이것도 스머펫이 도입해서 모두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런 놀다보니 시각은 벌써 10시를 넘겼다. 우리는 숙소 2층으로 자리를 이동해서 3명의 생일파티를 벌이기로 했다.
# 장비님, 대표님, 정소순 님의 뜻 깊은 생일 기념
유랑단의 2010년도 계획에는 엄마, 아빠들의 생일파티가 새롭게 추가되었다. 미리 선물을 귀뜸 받아서 고르고, 긴 편지지에 옛 날 방식으로 축하글을 써서 전달해주는데 이 재미가 쏠쏠하다. 선물 보다 더 오래도록 감흥을 주는 건 바로 여러 사람들이 써 준 편지다. 평소 내색하지 않았던 마음을 솔직하게 실어 상대의 좋은 면모를 밝히는 데 특히 아빠들이 더 행복해한다.
오늘의 주인공은 지효아빠, 찬슬아빠, 건우엄마로 원종아빠와 은하씨가 낭독을 맡았다.
-이런 영광스런 자리에 부족한 저를 뽑아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럼 편지를 읽도록 하겠습니다.-(겁나게 쑥스러운 듯 자리에 일어 선 서재석님) -대표님,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항상 부드러운 곱슬머리에 자상한 모습으로 저희 유랑단의 대표를 맡아 불철주야 수고해 주신 사랑에 감사드려요. 지렁이 아빠노릇 까지 대표님이 없으면 저희도 살 수 없당께요. 선녀와 나뭇꾼 노래도 멋졌구요. 대표님 싸랑해요! (이것은 스머펫의 옥구슬 같은 목소리) -내 사랑 광용씨, 제가 태어나 광용씨를 만나 결혼한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지 모릅니다. 언제나 당신은 영원한 나의 태양이랍니다.( 이것은 스머펫이 남편에게 쓴 편지의 일부) - -언니처럼 포근하게 또 든든하게 우리를 감싸주는 소순언니 앞으로 더 많이 행복하고 축복받기를 소망해요. 소녀 같이 맑고 순수한 언니를 저희 모두 아끼고 사랑한당께요-
연이어서 원종아빠의 ‘하하 라이브 원맨 쇼’가 펼쳐졌으니 우리 모두는 배꼽이 빠져라 방바닥을 두드리고 웃음을 터트리며 행복해했다. 별이 빛나는 밤에처럼 무드를 잡아가며 배우 김영철 성대 묘사와 DJ 목소리까지 흉내내는 원종아빠는 퍼펙트한 단장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는 369게임에서 특유의 순박한 목소리와 멋쩍어하는 미소로 일관했고 결국 5인방에 끼여 다음 날 아침 당번을 맡아야 했다.(참고로 이 때 뽑힌 5인방은 다음과 같다. 현아엄마, 율이엄마, 찬슬엄마, 대표님, 단장님)
시골의 밤은 도시와 다르다. 그 몇 배로 길고도 길다. 한 공간 시간대에 묶여서 우리는 공동체라는 배를 타고 항해하는 중이다. 선장은 따로 없지만 책임있는 선원이 그득해서 걱정도 조바심도 없는 아주 이상야릇한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눈 가득 쏟아지는 별은 볼 수 없었지만 조금도 야속하지 않았으니 바로 내 옆의 누군가가 별 보다 찬란한 빛을 뿜어낸 연유다.
# 새벽3시 정자에서 콩나물 라면에 반한 시각
웃다가 웃다가 자정이 넘어서는 배가 고파진다. 이제 몇은 자러가고 삐삐와 양제공, 은미, 스머펫, 장비, 정선, 수희씨랑 밤하늘을 보러 나갔다. 비는 가늘어졌고 검은 장막 속에 하늘이 까무룩하다. 뭔가 아슴찬아서(서운해서의 전라도 사투리) 운동장 귀퉁이의 정자에 앉았다. 이대로 누우면 꿈 없이 잠이 들까, 말없이 묵묵히 밤하늘을 바라보는 양제공은 왜 이리 외로워 보일까. 때론 가깝고도 먼 그대일지니....
양제공이 끓여 준 콩나물 라면을 정말 먹고 싶다고 했다. 삐삐님이~~ 스머펫이 삐삐의 청원을 들어주고자 장비와 함께 주방으로 향했고, 나는 은영언니가 사 온 콩나물을 듬뿍 집어넣어 팔팔 끓였다. 새벽 3시의 라면 맛은 사람을 요동시키는 마력이 있다. 어둑하고 찐득한 새벽 공기를 가르고 정자로 향하는 이 라면 솥단지. 술이 들어 간 속을 시원한 국물로 달래고 인생을 논할 때 세상은 진정 살 만한 그릇이 되고 우리는 우주의 미아가 되어 서로를 붙잡아 줄 것만 같다. 모두들 코를 훌쩍이며 국물 하나 없이 싹싹 비우고 맛있다를 연발한다. 평범한 신라면도 달밤 아래 멋진 동무들과 같이 먹으면 이렇게 비범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세상 사는 마법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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