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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해피엔드
박 완 서
거실 유리창을 통해 43번 국도가 곧바로 바라다보인다. 이 집을 처음 보러 왔을 때부터 그게 제일 마음에 들었다. 비와 햇볕을 가릴 수 있는 지붕과 편히 앉아서 기다릴 수 있는 벤치까지 놓인 버스 정류장도 바로 코앞이다. 그 길은 서울로 통하는 길이다. 그 길을 통과하는 시외버스는 서울 근교의 크고 작은 시, 군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여서 번호는 각각이지만 서울에서의 반환점은 한결같이 2호선 강변역으로 돼 있다.
저기서 아무 버스라도 타면 곧장 순환선인 2호선과 연결될 수 있다. 그 생각만 하면 남편도 나도 차도 없이, 앞으로 차를 가질 가망도 없이 ― 돈 때문이 아니라 둘이 다 운전을 못하고 지금부터 배우기엔 너무 늙어버렸기 때문에 一 전원생활을 꿈꾼 무모함에 대한 불안감에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
버스는 이삼 분이 멀다 하고 자주 있었고, 강변역까지는 삼십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서울의 아파트에 살 때 주로 이용한 노선도 2호선이었다. 아파트는 잠실에 있었고, 2호선을 이용하면 한 번만 갈아타도 거의 못 갈 데가 없었다. 내가 주로 다니던 데에 걸리는 시간에다 삼십 분만 보태면 되었다. 삼십 분이란 약속시간에 늦게 나타난 자가운전자들이 흔히 둘러대는 차가 많이 밀려서…… 라는 변명이 아무렇지도 않게 용서되는 가장 적절한 유예 시간이었다.
아파트 못지않은 편의시설을 갖춘 그림 같은 집, 널찍한 마당과 텃밭, 그리고 달고 맛있고 싸한 공기, 그 좋은 것들을 실컷 누릴 수 있는데다가 교통까지 편하다면 그건 금상첨화가 아닌가. 교통이 란 물론 서울 가는 길을 의미 했다.
나는 토박이 서울내기였다. 남편은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중소도시에서 중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줄곧 서울에서만 직장생활을 하다가 은퇴했다. 그동안에 시골의 부모님도 서울로 모셔다가 돌아가실 때까지 모셨고, 동기간도 서울 아니면 외국에 나가 살게 되어 명절에도 돌아갈 고향이 없게 되었다. 그래도 남편은 은퇴하기 전부터 노후를 낙향해서 보내고 싶다는 게 꿈이었다. 나는 낙향(落鄕)이라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건 줄만 알았는데 남편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낙향은 그냥 거처를 시골로 옮기는 거였나보다. 남편이 마땅한 집을 찾아 시골로 돌아다니던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한 번도 따라나서지 않았다. 그건 시골로 이사 가는 데 대한 내 반대의사 같은 거기도 했지만, 믿고 맡겨도 될 것 같은 신뢰감이기도 했다. 남편이 천 리 밖 고향에서 집을 구하지 않고 서울 근교로만 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집을 구하기 전부터 아파트 팔아서 떨어질 몇 억이 내 통장에 들어올 생각만 해도 황홀했다. 연금이 있어서 노후가 그다지 궁색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몇 억은 처음 만져보는 거금이었다.
이 아름다운 집에서 나는 신혼 시절처럼 예쁜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만들고 남편은 텃밭을 갈아 싱싱한 채소를 공급하면 생활비는 거의 안 들리라. 휴일이면 차를 몰고 찾아오는 아들네 딸네한테 무공해 채소도 싸주고, 손자들한테 살아 있는 자연공부도 시키리라. 목돈과 잘 자란 자식들을 둔 노후가 그림처럼 아름답게 떠올랐다.
어서 농사철이나 돌아왔으면, 농사지을 생각이 전혀 없는 내가 봄을 기다리는 건 할 일이 없어진 남편이 딱해서이다. 아직 그림은 완성되지 않았다. 들은 비어 있고, 잎 떨군 정원수와 동구 밖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길가의 나무들은 언제 심었는지 늠름하지 못하고 비리비리하다. 꼭 겨울을 어찌 날까, 미리 떨고 있는 설늙은이 형상이다. 그래도 나무들이 헐벗은 계절이니까 집에서 국도와 버스 정류장을 저렇게 훤히. 저렇게 가까이 바라볼 수 있는 게 아닐까. 나는 낙향한 내 집이 서울과 얼마나 교통편이 좋다는 걸 내 마음에 각인시켜놓고 싶다. 서울이 너무 멀다는 건 그까짓 몇 억으로는 메워지지 않는 상실감이 될 것 같았다. 집에서 바라볼 수 있는 버스 정류장까지의 거리는 물론 직선거리이다. 더군다나 내리막길이니까 이삼 분 거리밖에 안 돼 보인다.
하나 포장이 안 돼 고르지 못한 꼬불꼬불한 흙길을 높은 구두 신고 걸어내려가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오늘 모이는 친구들은 다들 동창이기 때문에 거의가 다 동갑내기들이다. 동갑내기들이 오랫동안 해외에 나가 살다가 잠시 귀국한 여학교 때 은사를 모시는 자리이다. 한껏 멋부리고 젊게 보이고 싶었다. 동창들은 거의가 다 무릎통증, 퇴행성관절염 등으로 높은 구두를 못 신었다. 높은 구두를 신고도 날렵하게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는 나를 다들 부러워했다. 관절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높은 구두를 신으면 고소공포증을 느낀다는 친구도 있었다. 우리는 다들 그렇게 한심 한 나이였다. 나만 빼고는.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높은 구두 신고 외출할 일이라고 벼르고 있었건만 울퉁불퉁한 흙길을 위태롭게 걸어 내려가면서 나도 오늘이 높은 구두를 신는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서글픈 울화가 치밀었다. 남편이 예찬하는 이 동네의 장점 중에는 포장 안 된 흙길도 있다는 사실이 나를 그렇게 노엽게 했다.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베스트드레서로 소문나 있었다. 곧 죽어도 촌티만은 내고 싶지 않았다.
이사 온 지 며칠 됐다고 벌써 촌티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아무
리 옷을 세련되게 입어도 신발을 노인용 사스나 운동화를 신었
다면 완전히 스타일 구기게 돼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버스 정류장까지 온 것 같아도 시계를 보니 십 분밖에 안 걸렸다. 이사 온 지 한 달가량 되는데도 버스 타고 외출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동안 서울 갈 일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사한 뒷정리를 도와주기 위해 자주 들러준 며느리나 딸이 타고 온 차를 이용할 수가 있었다. 정류장까지 십 분이나 걸렸다는 게 기대에 어긋났지만 일 분도 안 걸려 버스가 온 것은 만족스러웠다. 더군다나 이 길을 통과하는 버스는 몇 번 버스건 타기만 하면 2호선 강변역과 연결이 된다니 얼마나 편리하냐 말이다.
버스가 정확히 내 앞에 멎었다. 그러나 나 때문에 멎은 건 아니고 내리는 사람이 있어서 멎은 거였다. 중년 부인을 한 사람 내려놓고 문이 닫히려고 했다. 나는 손을 들어 타고 싶다는 시늉을 했더니 문이 다시 열렸다. 냉큼 올라타고 나서 고맙다는 인사말까지 했다. 그러나 운전기사가 다짜고짜 시비를 걸었다.
“할머니, 할머니는 버스를 어느 문으로 타는지도 몰라요?”
할머니라니, 아직 칠십도 안 됐고, 다들 오십대로 보고 딸하고 백화점에 가면 매장 아가씨들이 자매간인 줄 아는 나한테 감히 할머니라니, 더군다나 오늘은 있는 대로 멋을 부려 사십대로 보아주길,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는 나에게 이 무슨 모욕적인 언사인가.
“네? 문을 열어주시길래…… 열린 문으로 타는 거 아닌가요.”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음소리는 탁하고 악의적이었다. 버스 안은 한산했다. 승객은 예닐곱 사람밖에 안 됐다. 아까 내린 손님은 여자였는데 남아 있는 승객들은 다들 남자들이었고 한마을 사람들처럼 서로 인상이나 옷차림이 비슷했다. 도저히 정이 들 것 같지 않게 생긴 시골 사람들이었다. 나는 오락에 굶주린 그들이 장난삼아 나를 갖고 놀려 한다는 걸 깨닫고 슬그머니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라고 부른 걸 속상해한 것이 방금 전이었건만 이왕 태운 거 늙은이 대접으로라도 눈감아 줄 것이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할머니, 버스는 열린 문으로 타는 게 아니라 앞문으로 타는 거예요. 앞문이요, 앞문. 알아들었어요.”
나 귀먹지 않았다고 대들고 싶은 걸 참았다. 싱글대는 시선이 나에게 집중된 걸 느끼면서 버스 한가운데서 손잡이를 잡은 채 무력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할머니 앉아요, 앉아. 빈자리도 안 보여요? 뾰족구두 신고 비틀대다가 엉 덩 방아라도 찧으면 어쩌려고.”
승객 중의 한 사람이 걱정하는 투가 아니라 놀리는 투로 그렇게 말하자 운전기사가 맞받았다.
“어쩌긴 뭘 어쩌겠어? 나만 덤터기 쓰는 거지, 뭐.”
내가 그때까지 앉지 못하고 서 있는 건 앉을 줄 몰라서가 아니라 버스값은 내고 앉아야 할 것 같아서였다. 버스값 넣는 통은 앞문과 운전석 사이에 있었다. 뒷문으로 탔기 때문에 달리는 버스 안에서 뾰족구두 신고 거기까지 가기가 난감했다. 정말 벌렁 나자빠지기라도 하면 크게 다칠 것은 불문가지거니와 저들이 박장대소하면서 즐거워하는 수모를 어찌 견디랴. 나는 마치 악당의 소굴에 볼모로 잡힌 것처럼 잔뜩 졸아서 기사가 하라는 대로 서 있던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좌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뒷문으로 탄 게 옳지 못한 일이라는 걸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요금은 다음 정거장에서 버스가 설 때 내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앉아서 핸드백에서 잔돈을 찾고 있는데 운전기사가 또 말을 시켰다.
“할머니 버스값 없어요?”
“아마 만원짜리 밖에 없을 거야.”
승객 중의 한 사람이 맞받았다. 기사하고 승객들은 마치 한마을에서 작당해서 어딘가로 심심풀이 삼아 나쁜 일을 저지르러 가는 사람들처럼 권태로워 보이면서도 손발이 척척 맞았다. 그런 소리까지 듣고 보니 잔돈을 찾는 손이 벌벌 떨리기까지 했다. 만일 정말 만 원짜리밖에 없다면 나동그라져서 엉치뼈가 나가는 것보다 더 큰 낭패일 것 같았다. 다행히 떨리는 손이 천 원짜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벌벌 떠는 내 손이 확인한 핸드백 속은 온갖 잡동사니로 엉망진창이었다. 운전석 쪽에서 들리는 여자 목소리의 안내방송에 의하면 벌써 여러 번 정거장을 통과한 것 같은데 버스는 정차하지 않고 곧장 달렸다. 내릴 사람도 탈 사략도 없는 정거장은 그냥 지나치는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달리면 우리 집에서 서울까지는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갈 수 있겠다 싶어 좋으면서도 이상하게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내가 천 원짜리를 손에 쥐고 비로소 마음이 좀 가라앉아서 차내를 돌아보면서 세어본 승객은 나하고 운전기사까지 포함해서 아홉 사람이었다. 나는 마치 내가 여덟 명의 이상한 사람들로부터 괴로움을 당하는 외로운 피해자처럼 느꼈고, 그중에 누구라도 내리든지 더 타든지 해야만 이 숨막힐 듯한 악연의 구도에 균열이 갈 것 같았다.
경기도가 끝나고 서울이라는 표지판이 나왔다. 그것만 해도 살 것 같았다. 워커힐 정거장에서 처음으로 버스가 멎었다. 한 사람이 내리고 한 사람이 올라탔다. 그 짧은 정차 시간에 나는 재빨리 앞으로 가서 요금통에 천 원짜리를 넣었다. 쨍그렁 하고 거스름돈이 떨어지는 걸 미처 받아 챙길 새도 없이 버스가 움직였다. 나는 얼른 손잡이를 부여잡고 몸의 균형을 잡았으나 위태롭게 나부꼈다. 앞쪽에도 빈자리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다음 역은 5호선 광나루역이라는 안내방송을 들었기 때문에 그냥 서 있었다. 2호선은 아니지만 5호선을 타도 어딘가에서 2호선을 갈아탈 수 있을 것이다. 어서 이 고약한 버스를 내리고 싶었다. 네거리에서 신호에 걸린 버스가 정차해 있는 동안도 내가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서 있으니까 또 운전기사가 시비를 걸었다.
“할머니 왜 또 서 있어요? 텅텅 빈자리 놔두고.”
“내리려고 그래요. 광나루역에서.”
이번에는 나도 주눅들지 않고 뾰족한 소리로 대꾸했다.
“이 할머니가 누구 약을 올리기로 작정했나. 몇 번 말해야 알아들어요. 탈 때는 앞문으로 내릴 때는 뒷문으로 내리는 거라고…… 할머니 버스 처음 타봐요?”
버스가 서울특별시로 진입했다고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또 그 길길대는 탁하고 악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보면 몰라, 그 할머니 아마 미국서 왔을 거야.”
“아니면 미국서 온 척하는 건가.”
이건 승객들 저희끼리 주고받은 농지거리였다. 다행히 신호대기 시간이 길어서 앞문에서 뒷문 쪽으로 걸어갈 시간은 충분했다. 광나루역에서 뒷문으로 내리면서 또 무슨 시비를 걸어올까 봐 두려워한 나머지 안녕히 계시라는 인사말까지 한 것 같다. 바보같이, 내리자마자 곧 5호선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매연 냄새 자욱한 서울 공기가 다디달아서 깊숙이 들이마시면서 바로 이 맛이야, 자유의 맛을 만끽했다. 그러나 아직도 악몽의 찌꺼기는 남아 있어서 지하철을 생전 처음 타보는 사람처럼 이리로 내려가도 되나 눈치보다가 다들 그 구멍으로 빨려들기에 나도 따라내려가면서, 탈 때는 뒷문, 아니 앞문이던가. 내릴 때 앞문 아니 뒷문이지, 아마…… 좀 전에 혹독한 교육을 받은 걸 복습하려 했지만 혼란만 점점 더해갔다. 좀 전에 겪은 일이 백주의 악몽 같았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좀 나을 것 같은데 너무 창피해서 아무 말이나 막 하던 맏딸한테도 차마 그 얘기만은 못 할 것 같았다. 겨우 그까짓 일이 무덤까지 가지고 갈 비밀이 되다니. 가당찮게도 내가 살아온 비교적 평탄한 일생까지 무가치하고 보잘것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전철 안은 내 집처럼 편안했다. 아마 몇 정거장만 더 가면 2호선으로 갈아탈 수 있는 왕십리역이 나올 것이다. 내가 원하는 어디든지 데려다주던 2호선이 그리웠다. 이십 년이 넘게 내 행동반경을 2호선에 맞춰 살아왔을 뿐 2호선이 나를 어디든지 다 데려다준 건 아니건만 그렇게 생각했다. 고만 일로 벌써 교외의 그림 같은 내 집이 정떨어지려고 했다. 나는 정떨어져도 남편은 정 떨어지지 말아야 할 텐데. 남편보다 몇 해 먼저 낙향한 남편 친구 생각이 났다. 그가 노후를 보내기로 작정한 곳은 서울에서 천 리나 떨어진 시골이었다. 거기가 그가 낳고 자라고 선영이 있는 땅이었으니 그야말로 진짜 낙향을 한 셈이었다. 그도 꿈을 갖고 낙향했으련만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농촌이라지만 농사꾼은 없어서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그가 들어가고자 한 곳은 고향땅이 아니라 고향 인심이었나보다. 내 남편은 그런 좌절을 겪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내 상념은 내 양옆에 앉은 남자와 여자의 휴대전화질 소리 때묵에 중단이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노인석에 앉을걸. 나는 내가 젊어 보인다는 자만심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노인석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오늘은 전철 안도 한산한 편이어서 노인석에도 일반석에도 빈자리가 넉넉한 편이었지만, 노인석 에는 자리가 있고, 일반석에는 자리가 없을 때도 일반석 앞에 가 섰다. 젊은이들 앞에 서서도 행여라도 자리 양보를 얻어내고 싶어하는 구차스러운 늙은이처럼 보일까봐 교만하게 턱 쳐들고 아무것도 안 비치는 깜깜한 창밖에다 시선을 고정시키는 게 나의 전철 타는 버릇이었다.
내 왼편의 남자와 오른편의 여자도 젊다고 할 수는 없었다. 둘 다 마흔은 넘어 보였고 물론 둘이 동행은 아니었다. 둘 다 걸려온 전화를 받는 입장이었지만 그 전화 내용이 막상막하로 요상했다. 남자는 지금 운전중인 걸 강조하면서도 전화를 끊지 않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지금 엊그저께 새로 뽑은 에쿠스를 운전중이었다. 그 죽여주는 승차감을 실황중계하는 동안에도, 곧 내리실 역은 어디며, 내리실 문은 왼쪽이라느니 오른쪽이라느니 하는 방송은 차내에 고성으로 울려퍼지고 있었다. 휴대전화를 통해 상대방에게 그 소리가 안 들린다고 생각하고 저런 거짓말을 하는 걸까, 아니면 저 사람 직업이 연극배우여서 상대역하고 대사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는 사기꾼 같아 보이지도 연예인 같아 보이지도 않은 피곤하고 허름한 전형적인 도시인이었다.
남자보다 조금 늦게 전화를 받은 내 오른편의 여자는 받자마자 짜증부터 냈다.
아니, 이제 일어났으면 일어났지 당신은 전기밥솥 속에 지어놓은 밥도 혼자 못 퍼먹어요? 뭐라고요? 언제 지어놓은 밥이냐구요? 내 참 기가 막혀서, 고작 그거 물어보려고 바쁜 사람한테 전화 걸어요. 내가 지금 놀러 나온 줄 알아요. 밥이 오래돼서 딱딱하게 굳었으면 굳었지, 그게 왜 내 탓이야. 당신이 제때제때 찾아 먹지 않으니까 그렇게 될 수밖에. 딱딱하면 물 부어서 불려서 먹구려. 아니면 시켜 먹든지. 이제 자장면은 진저리난다고? 거봐, 자장면 진저리나게 먹는 동안 아까운 밥이 굳어버린 거잖아요. 정 못 먹겠으면 당신 좋은 거 시켜 먹구려. 냉장고에 잔뜩 스티커 붙여놨잖아요. 중국집 말고도 피자집, 통닭집, 오리집, 순대집, 김밥집, 없는 게 없으니까 맘대로 골라서 시켜 먹든지, 싫으면 말구. 흥, 웬 안 하던 돈 걱정. 동네서 아직은 그 정도의 신용은 유지하고 있으니까. 걱정 말고 식성대로 시켜 먹어. 또 또 잔소리. 끊어. 나 지금 고객 만나러 가는 길이니까, 심사 뒤집지 말고.
거의 갈아탈 역이 다 된 것 같아 내다보니 올림픽공원 지나 방이역으로 진입중이었다. 이를 어쩌나, 광장역에서 반대 노선을 탄 거였다. 안내방송이 내 옆의 남자의 휴대전화를 타고 상대방의 귀에 들릴 걱정만 했지 정작 그 내용을 귀담아듣지는 않았던 것이다. 잘못 탄 걸 어떻게 되돌릴 수 있다는 마련도 없이 우선 내리고 봤다. 다시 2호선이 그리웠다. 2호선은 방향을 잘못 타도 순환선이니까 마냥 앉아만 있으면 원하는 역에 도달하게 돼 있었다. 바깥만 내다볼 수 있어도 이런 실수는 안 하는 건데. 2호선 구간에는 지상을 통과할 적도 있다는 것까지가 그리웠다. 땅속에 그렇게 오래 있지도 않았건만 지상의 공기가 그리웠다. 반대 노선으로 가지 않고 지상으로 솟아올랐다.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까지는 사십 분 정도 남아 있었다. 이 낯선 역전에서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게 가장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치매에 걸린 상태가 바로 이런 거로구나 싶게 정신이 아득하고 머릿속이 맹하니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구세주처럼 택시 한 대가 스르르 내 앞에 멎었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오르락내리락도, 갈아탈 일도 없이 바로 목적지에 데려다주는 교통수단이 있다는 걸 왜 생각 못했을까. 약속 시간에 대가는 데는 전철만한 교통수단이 없다는 평소의 지론을 까먹고 택시에 올라탔다. 어서 오십시오. 어디로 모실까요. 역시 대중교통수단보다는 어디가 달라도 다른 게 마음에 들었다. 한 달에 몇 번쯤 택시 타고 다닌다고 거덜나지 않을 만큼의 여유 있는 노후를 보낼 수 있다는 안도감이 택시의 승차감을 더욱 편안하게 했다. 행선지를 말하고 사십 분 안에 갈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밀리지만 않는다면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장담을 안 하는 태도까지 마음에 들었다.
택시는 강변북로를 쏜살같이 달렸지만 한남동서부터는 약간의 지체를 겪었다. 그럭저럭 오 분 정도 늦게 모임장소인 K회관 앞에 당도했다. 택시 요금이 장난이 아니었다. 만천이백원이나 나왔다. K회관은 대로변이었지만 택시가 가고 있는 방향과는 반대 방향에 있어서 U턴을 해서 세워주마고 했다. U턴 지점이 어디인지도 잘 모르거니와 택시값도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마침 횡단보도가 눈앞에 보이길래 여기서 내리는 게 더 빠를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 택시값을 던져주고는 차에서 내려 신호가 바뀌기 전에 허둥지둥 횡단보도를 건넜다. 저만치 K회관이 바라보이자 비로소 마음이 놓여 표정을 밝게 가다듬고 품위 있게 걸으려고 막 폼을 잠아가고 있는데 뒤에서 택시가 한 대 빵빵거리며 다가와 급하게 내 곁에 멎었다. 방금 전에 타고 온 택시였다. 기사가 유리를 내리고 천 원짜리와 백 원짜리가 섞인 잔돈을 내밀면서, 사모님 거스름돈도 안 받고 내리시면 어떡해요, 하는 게 아닌가. 그제서야 만 원짜리와 오천 원짜리를 내고 그냥 내린 생각이 났다. 너무 신기해서 그럼 이 돈 때문에 일부러 U턴까지 해 왔단 말예요? 하고 물었다. 당근이죠.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생기긴 소박하다기보다는 촌스럽게 생긴 젊은이였지만 활짝 웃는 잇속이 희고 깨끗했다. 나는 그게 눈부셔 뭐라고 고맙다는 인사와 칭찬의 말을 합쳐서 한다는 소리가 엉뚱하게도 ‘우리나라 참 좋은 나라네’ 였다. 젊은이는 조금도 어리둥절해하지 않고
“사모님 어쩐지 멋쟁이다 싶었는데 외국에서 오래 사시다 오셨나봐요. 그렇죠?”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다만 활짝 웃어주었다. 그가 나에게 축복이 되었듯이 나도 그에게 축복이 되길 바라면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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