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학교에서 체육 수업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대체 체육 수업의 목적 또는 목표는 무엇인가? 학생의 건강 증진을 위해서인가, 스포츠 기능을 습득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입시에 찌들려 있는 학생들에게 1주일 2-3시간만이라도 운동장에 나와 자유를 만끽하고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또 다른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인가?
체육 수업의 존재 이유에 대해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제각기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느 이들은 국민공통기본교과 중의 하나이므로 당연히 체육 수업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인생에 건강만큼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에 체육 수업이 존재해야 한다고 본다. 또한 하루 종일 좁은 교실에서 웅크려 있던 아이들에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체육 수업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만약 체육 수업을 하는 체육 교사에게 ‘학교에서 체육 수업이 왜 필요합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어떤 답이 나올까? 아마도 앞에서 나온 존재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은 답이 제시될 것이다. 그렇다면 앞의 존재 이유들이 체육 수업이 필요한 진정한 이유 중의 ‘부분’에 불과하다. 즉 체육 수업이 필요한 이유를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다. 다음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체육 수업의 존재 이유에 대한 인식을 재정립하는 의미에서 관련 내용을 기술한 것이다.
운동 기능 습득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은 체육 수업에서 운동 기능 습득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체육 수업의 주된 내용이 앞구르기, 뜀틀 넘기, 장애물넘기, 패스, 드리블, 슛 등과 같은 운동 기능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들 중 어떤 스포츠 종목의 기능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체육 수업 시수가 부족해서, 체육 시설이 낙후되어서 등의 이유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 이유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 예를 들면, 매트 운동의 앞구르기와 뒤구르기는 초등학교에서 지도되고 있고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도 지도되고 있다. 그런데 앞구르기와 뒤구르기를 제대로 하는 학생들이 100%에 도달하지 못한다. 앞구르기와 뒤구르기를 할 수 있는 매트는 그 양과 질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전국의 모든 학교에 있는 상황이다.
체육 수업에서 운동 기능 습득이 중요하다면 학생들이 어느 정도의 운동 기능 수준에 도달해야 하는 것일까? 운동선수와 같은 고도의 수준인가, 아니면 공만 던질 수 있으면 되는 것인가? 이에 대한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운동 기능 습득의 체육 교육을 수행하여 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체육 수업의 존재 이유는 운동 기능 습득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체육 교사가 수업을 못해서도 아니고 시설이 없어서도 아니며 시수가 부족해서도 아니다. 공교육이라는 학교 체제 속에서 체육 수업의 존재 이유는 본질적으로 운동 기능 습득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체육 수업의 존재 이유가 운동 기능 습득에 있다고 믿는 독자들이 있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운동 기능을 가르치는 장소로 ‘학교 체육 수업’만 존재하는가? ‘스포츠센터’의 스포츠 강좌에서는 운동 기능을 가르치지 않는가? 운동 기능 습득이라면 오히려 체육 수업보다 사설 스포츠센터가 훨씬 낫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체육 시설도 훌륭하고 소수 정예로 스포츠 지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학교 체육에서 운동 기능의 습득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면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과연 우리나라 학교 교육에서 기능 교육이 가능한가? 어느 정도의 기능 교육을 말하는 것인가? 운동선수와 같은 높은 수준의 기능을 일반 학생들에게 갖추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수업 시수도 적고, 학교행사도 많고, 시설도 낙후되어 기존의 수업 시수도 지켜지지 않는데 어떻게 일정 수준의 기능 교육을 담당할 수 있겠는가? 기능 교육으로 방향을 설정한다면 누구 못지않은 기능을 갖출 수 있도록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12년 동안 총력을 기울여야 할 텐데 그것이 과연 가능한가? 12년을 보내도 멋진 농구 슛을 못하거나 배구 스파이크도 못하는 사례가 주위에 너무나도 많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다양한 스포츠종목을 경험하는 수준에서 끝나고 마는 상황에서 어떻게 훌륭한 기능 교육을 담당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체육 교사도 다양한 스포츠 종목에서 학생들이 훌륭한 운동 기능을 습득하도록 하는데 자신이 없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 대부분이 중요하게 생각해 왔던 체육과에서의 기능 교육은 체육 교사의 몫이 아니다. 운동부 감독이나 코치의 역할이라고 본다. 운동선수는 경기에 나가 승리를 해야 하므로 기능 습득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건강 증진을 위해서
체육 수업하면 금방 ‘건강’이 연상된다. 이는 그만큼 체육 수업이 다른 어느 수업보다 적극적인 신체 활동이 이루어지는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체육 수업에 참여한다고 해서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체육 지표나 언론 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학생들은 과거에 비해 체력도 저하되고 건강도 양호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이는 무슨 이유인가? 체육 수업 시수가 줄어서, 입시위주의 사회문화 속에서 체육 수업이 정상화되지 못해서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또한 불행이도 우리나라 국민의 건강 증진을 위해 체육 수업이 ‘정말로’(?)기여하고 있다는 실증적인 자료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학생의 건강 증진을 위해서라는 이유 때문에 체육 수업이 존재한다면 이는 매우 무리한 근거라고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건강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신체 활동’으로만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신체 활동이 많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객관적으로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신체 활동이 많다고 해서 100%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건강의 요인으로 신체 활동뿐만 아니라 식습관, 주거 환경, 환경오염, 성격, 휴식등 너무나도 많은 요인이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보건계에서 보건교과 신설을 주장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출발한다. 보건계에서는 청소년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보건 교육이 강화되어야 하고 체육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필수 교과로써 학교 교육에서 가르쳐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체육 수업만이 유일무이하게 건강을 담당하고 있지 않은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학생의 건강 증진을 위해서 체육 수업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임을 말해주고 있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서
우리나라와 같은 독특한 학교 문화를 가지고 있는 국가에서는 체육 수업의 또 다른 존재 이유로 ‘스트레스 해소’가 거론되곤 한다. 만약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체육 수업이 존재한다면 굳이 체육 수업이 필요 없으며, 더 더욱 국가의 많은 예산을 투자하여 체육 교사를 채용할 필요가 없다. 학생들은 체육 교사의 관리 하에서 체육 수업 시간에 임할 필요가 없고 학교에서 자유를 만끽할 수 있으니 대대적으로 환영할 것이다. 즉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체육 수업이 존재한다는 이유는 논리에 맞지 않는다. 스트레스 해소는 ‘배움이 존재하지 않는 순전히 노는 시간’으로 인식하는데서 출발한다. ‘배움이 없는 수업’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 수업을 ‘수업’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배움이 없다는 의미는 가르침이 없다는 것으로 연결된다. 이는 교사가 수업에서 학생들을 교육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배움이 없는 수업이 존재하고 가르치지 않는 교사가 존재할 수 있는가?
다른 교과 학습으로 찌들어 있는 학생들이 가여워서 체육 수업 시간만이라도 자유를 만끽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도록 자유 시간을 제공한다는 논리는 체육 수업이 교과임을 포기하고 체육 교사임을 포기하는 것과 동일하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처지는 체육 수업에서, 그리고 체육 교사가 전담해야 할 문제가 아니며 우리나라 사회문화가 전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인 것이다.
체육 수업의 존재 이유
우리나라에서는 국민공통기본교과(국어, 도덕, 사회, 수학, 과학, 기술.가정, 체육, 음악, 미술, 영어)를 설정하고 있다. 10개 교과가 교과로 존재하는 이유는 각 교과의 교육적 역할과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교과의 탐구 대상 또는 교과 교육의 도구는 교과에 따라 서로 다르지만 각 교과가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은 거의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전자인 교과의 탐구 대상이나 교과 교육의 도구는 각 교과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부분이며, 후자인 교과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은 교육이 지향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국가수준의 교육과정 문서에 제시되어 있는 교과별 교과의 성격과 목표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국어과의 경우는 교과의 탐구 대상 또는 교과 교육의 도구는 우리나라의 언어이며, 언어의 올바른 샤용과 국어 문화의 이해를 강조하고 있다. 사회과는 사회현상이 탐구 대상이 되며, 민주 시민의 자질 함양을 제시하고 있다. 수학과와 과학과는 탐구대상 또는 교과 교육의 도구가 사물 현상이 되며, 수학적 사고와 과학적 탐구 능력 함양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음악과는 악곡이 교과의 도구가 되며 음악성, 창의성, 사고력 함양에 강조를 두고 있고, 미술과도 주변 세계의 아름다움을 탐구 대상으로 설정하고 심미적인 태도, 상상력, 창의성, 비판적인 사고력을 함양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동시에 많은 교과에서는 교과별 탐구 대상이 가지고 있는 교과별 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는 것으로 교과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체육과의 탐구 대상 또는 교과 교육의 도구는 ‘신체 활동’이 되며, 체육과가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은 다양한 신체 활동의 운동 기능을 갖추고 건강하고 체력을 갖춘 인간상뿐만 아니라, 신체 활동에 나타나는 제 문제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이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신체 활동이 주변 현상을 창의적으로 재구성 및 표현하여 올바른 체육 문화를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간을 기르는데 목적을 두어야 할 것이다.
체육과를 포함한 모든 교과의 역할은 학교에서 해당 ‘교과 지식’을 전수하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다. 체육과도 하나의 교과로서 ‘체육 교과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수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체육 수업이 존재하는 이유는 체육 교과 지식을 우리 학생들에게 전수하기 위함이다. 건강을 증진하기 위해서, 운동 기능을 습득하기 위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면 체육 수업은 학교에서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 다른 교과도 마찬가지이다. 국어 수업의 존재 이유도 국어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서 존재하고, 수학 수업도 수학적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과학 수업도 과학적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영어, 음악, 미술, 도덕, 기술.가정 수업도 예외일 수 없다. 각 수업에서 해당 교과의 지식을 충실하게 교육하게 되면, 학생들은 국어 수업에서 창조적인 언어 사용 능력, 도덕과 사회 수업에서는 도덕적 사고와 민주 시민의 자질, 수학과 과학 수업에서는 논리적 사고력과 탐구분석 능력, 음악과 미술 수업에서는 창의적 표현력과 사로격 등이 길러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체육 수업에서도 체육 교과 지식을 잘 전수받으면 학생들의 체력 및 건강 증진은 물론 운동 기능 습득, 비판력, 창의성, 심미안 등을 갖출 수 있다. 요점은 운동 기능 습득, 건강 증진, 스트레스 해소는 체육 수업이 존재하는 이유라기보다는 체육 수업을 통해 얻어지는 부산물인 셈이다.
결론적으로 체육 수업이 존재하는 이유는 체육 교과 지식을 전수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부가적인 설명을 한다면, 체육 교과 지식의 핵심은 ‘신체 활동’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교과는 교과의 도구를 활용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세상을 이해하도록 안내한다. 국어 수업에서는 학생들로 하여금 우리나라의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도록 하며, 과학 수업에서는 자연 현상을 통해 우주와 세계를 이해하도록 한다. 다른 수업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체육 수업을 비롯한 모든 교과 수업은 각 교과가 가지고 있는 교육적 도구를 활용하여 교과의 탐구 대상을 분석함으로써 서로 다른 방식으로 우리 주변의 세계를 알아가도록 안내한다. 즉 교과 수업은 학생들에게 세상을 이해하도록 안내하는 공통적인 역할을 가지고 있는데, 다만 교과마다 학생들을 세상으로 안내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결국 체육 수업도 ‘신체 활동’이라는 교과의 도구를 가지고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학생들에게 교육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