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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재판 다시 해야
증 언 자 : 이기홍(남)
생년월일 :
직 업 : 변호사 (현재 변호사)
조사일시 : 1989. 12
참고사항 : 이기홍 변호사가 직접 서술한 5.18 광주민중항쟁 참여담이 월간조선 1988년 3월호 실려 원문 그대로 싣는다.
법적 구속력 없는 민화위 논의
부마사태의 무자비한 진압은 유신정권의 연장을 가져올 듯하였지만 내부적인 알력으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박정희 대통령 살해사건이 발생하여 결국 유신정권의 종말을 고하게 하였다.
5·18 광주항쟁은 계엄통치를 반대하고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애국 시민들의 피나는 투쟁의 진의와는 달리 12·12 군부 주역들의 쿠데타를 성공시켜 주는 결과를 가져와 최규하 과도정권의 퇴진과 함께 제5공화국 군사정권을 탄생시켰다.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은 5·18 광주항쟁을 내란으로 조작하고 이를 명분으로 삼아 권좌에 올랐지만, 이 때문에 전세계 여론의 비판대상이 되었고 정권의 정통성을 확고하지 못하고 집권기간 중 강력한 국민의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으며, 드디어 1987년 소위 6.29 노태우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한 야권의 분열과 부정선거로, 그나마도 유효투표의 36.5퍼센트의 득표를 하여 대통령에 당선되기는 하였으나 똑같은 군부세력인 노태우 당선자는 제5공화국의 유산을 떠맡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자 정통성 시비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민주화합추진위원회(이하 민화위, 조사자 주)를 구성, 작금 5·18 광주문제를 의논하고 있다. 그러나 법적 구속력이 없는 민화위에서의 해결책이란 무의미하다할 것이다.
국회에서 정부차원의 해결 없이는 결국 광주문제를 올바로 풀지 못하게 되어 노태우정권 역시 광주문제 때문에 권좌를 내놓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5·16 군사쿠데타와 유신헌법 선포로 독재헌법이 제정되자 민주회복을 위한 끝없는 항쟁이 계속되던중 명동성당 구국선언에 힘입어 광주에서 1976년 8월 15일 광복절에 광주 양림교회에서 윤기석, 강신석 목사 등이 유신헌법 철폐를 결의하여 다섯 명의 목사들이 일명 전남노회사건으로 구속, 기소되었다.
또 1978년 5월 16일 전남대학교 송기숙, 명노근 등 10여 명의 교수들이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하여 교육헌장을 비판한 일 때문에 송기숙 교수를 비롯한 전남대 교수, 학생들이 구속, 기소되고 성내운 연세대교수가 같은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등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하자, 국제사면위원회 전남지부를 중심으로 천주교의 김성용, 조철현, 정규완 신부, 개신교의 윤기석, 강신석, 방길호, 문정식 목사와 조아라 이성학 장로, 법조계의 홍남순 변호사와 필자, 학계에서는 교육지표를 발표했던 해직교수들이 서로 유대를 같이하여 반유신활동을 하였던 관계로 어느곳보다도 민주회복을 위한 운동이 활발하였다.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학생들이나 청년들도 많아서 커다란 운동권이 형성되었으며, 박대통령 살해사건으로 완전히 민주정부 수립이 목전에 다다른 듯 생각되었다.
광주에 대한 계엄사의 관심
1980년 1월 19일 광주 시민회관에서 개최된 국회 헌법특위 주최 개헌공청회에서 필자는 내각책임제를 비판하면서 내각책임제의 성공요건은 확고한 2개 이상의 정당이 있어야 가능한데, 우리의 경우 신민당은 오랜 야당의 전통이 있는 정당이기 때문에 신민당이 야당이 되는 경우는 문제가 없지만 자생정당이 아닌 공화당이 야당이 될 때는 공화당 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발언한 부분, 정부에서 이원집정부제를 연구하기 위하여 불란서와 서독에 교수들을 보냈는데, 루이 16세의 '짐이 국가'라는 나폴레옹 독재와 히틀러의 나치스당 독재를 배우러 보낸 것이냐는 부분, 김대중 선생을 비롯한 민주인사의 사면을 주장한 공술부분을 문제삼아 계엄사 합동조사반의 지시로 한밤중에 광주경찰서에 연행되어 새벽까지 조사를 받고 풀린 일이 있다.
이러한 광주의 개헌공청회 소식을 들은 최규하 대통령까지도 어느 지역의 공청회가 가열현상을 빚었다고 주의를 환기시킨 바도 있었다. 이러한 광주의 사정은 계엄당국에서 추진하려고 하는 이원집정부제 개헌 계획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도 있고, 특히 광주의 재야활동에 대하여 계엄당국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하겠다.
1980년 2월 17일 김대중 후보 자택에 변호인단이 초청되어 김후보의 진로문제를 발의한 자리에 필자와 홍남순 변호사가 참석한 것도 예사로 보지 않았을 지 모른다.
1980년 5월 비상계엄 해제와 정치일정 단축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한창일 때의 일이다. 누이동생의 친척인 육사 출신 모대위가 31사단에서 교육을 받고 있으면서 하는 말이 이기홍 변호사는 한 서너 달 피신갔다 와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고 알려준 바 있다. 하지만 그때 상황으로 보아 납득이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의 사건을 맡은 변호사로서 책임상 도저히 광주를 떠날 수 없는 형편이기에 묵살시켜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로 찾아왔고 그당시 군부 정보장교 사이에는 유사시에 체포할 광주 재야인사들의 명단이 거의 공개되다시피 되었다고 한다.
학생, 청년에 무조건 곤봉질
1980년 5월 16일 전남대학생을 비롯한 6개 대학생들 3만여 명이 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한 금남로에서 저녁 늦게까지 '비상계엄 해제' '정치일정 단축'을 요구하는 민주성회를 갖고 계엄당국에서 학생들의 시위를 악용하려는 기미가 보이니 시위를 자제하고 학교수업에 임하기로 하되, 휴교조치 등 어떠한 사태가 발생할 때는 그에 대응하기 위하여 전원 등교하기로 하고 해산함에 따라 광주는 5·17에는 평온을 되찾았다.
광주변호사회에서는 1980년도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필자가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저녁 9시에 변호사회 소식을 전하는 뉴스를 듣고 얼마 있으니 자정을 기하여 비상계엄을 제주까지 확대한다는 내용과 휴교조치의 보도가 나왔다.
그 순간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불안감에 싸였는데 친척과 누이동생으로부터 모두 붙잡아간다는 전화가 와서 누이동생 집으로 피신하여 하룻밤을 지냈다. 아침에 집에 연락하니 별일이 없고 오전 11시경 국제예식장에 주례 선약이 있어서 집에 돌아와보니 김대중 후보 등 민주인사의 연행과 전남대학생들에 대한 연행소식이 전해졌다.
차후에 안 일이지만 전남대생 정동년도 비상계엄 전국확대 발표 이전에 31사단에 연행되어 구속되었던 것이다.
나는 5월 18일 처와 함께 한빛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고 국제예식장으로 갔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광주시내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막 결혼식을 마치고 예식장을 나오니 학생들 50여 명이 '비상계엄 해제하라', '김대중 선생 석방하라', '전두환, 신현확 물러가라'고 구호를 외치고 지나가면서 애국시민들은 금남로로 모이자고 하기에 나도 처와 함께 걸어서 금남로 한국은행지점 앞으로 왔다. 벌써 경찰과 학생들이 대치하여 경찰은 최루탄을 쏘아대고 학생들은 투석전으로 맞서 싸우면서 쫓겨다니고 있었다. 그때 상황으로 볼 때 학생수가 얼마 안 되고 열세여서 병력동원은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고 본다.
오후 2시경에 집에 전화가 왔다.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에 진주하고 있던 공수부대원이 시가지에 배치되면서 학생들이나 청년은 누구를 막론하고 곤봉으로 머리, 등을 쳐서 쓰러지면, 군용 트럭에 실어 어디론가 가버린다는 것이다.
5월 19일 금남로에 위치한 사무소에 출근하는 길에 광주일고 옆 국도와 금남로 등에 공수부대원들이 열을 지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지키고 있었다. 총을 뒤로 메고 손에 곤봉을 들고 있었으며, 이상한 것은 수통 외에 조그마한 술병 비슷한 통을 앞가슴에 차고 있는 모습이었다.
점심 먹으러 집으로 가는 길에 보니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바로 앞 도로가에서 공수부대원들이 학생과 청년들을 여러 명 잡아다가 구타하고 물구나무를 세우고 버스 속에 있는 학생들을 강제로 연행하였고, 5월 20일에도 이러한 상황은 계속 되었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과 광주일고 사이 사거리 금남로 입구를 공수부대 약 1개 소대가 4열로 줄을 지어 차량과 사람의 통행을 차단하고 있으면서 학생 비슷한 2명의 시체를 앞에 놔둔 채 무슨 이야기를 하면서 웃고 있는 광경도 보았다.
같은 날 오후 2시경 동구청 후문에서는 전일빌딩 옥상을 지키고 있던 병력이 총을 쏘아 사람 한 명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시내에서 시민과 공수부대원간의 충돌이 계속되고 총격까지 하고 있으므로 시내상황을 보기 위하여 계림국민학교 옆 사거리에 이르렀더니 공수대원 1개 소대가 광주고로 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는데, 국민학생 비슷한 어린애들이 군인들을 놀리고 돌을 던지다가 쫓아오던 골목길로 도망가는 등 국민학생까지도 참여를 하고 있었다.
수습위원회의 활동
이때부터 시내에서의 뜬소문은, 군인들이 광주의 씨를 완전히 말리려 하니 전 시민은 식칼이나 톱 할 것 없이 들고 나와서 싸우자고 했고, 공수대원들에게는 끼니를 굶기고 흥분제가 든 술을 마시게 하여 닥치는 대로 살상을 한다고 하였다. 저녁이 되자 전시민은 광주은행사거리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땅거미가 질 무렵 택시와 버스, 트럭기사들이 유동 쪽에서 차를 몰고 금남로로 진입해오자 운집한 시민들은 이에 힘을 얻어 무자비한 살상에 맨몸으로 항거하였는데도 MBC, KBS 방송국에서는 한마디의 말도 뉴스로 보도되지 않았다. 분노한 시민들은 드디어 양방송국에 불을 지르고 누군가가 광주세무서까지 불지르기에 이르렀다.
21일 초파일 정오경이 되자 흥분한 시민들이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나중에 들은 일이지만 화순이나 나주경찰서 등의 무기고를 습격할 때 데모군중들이 몽둥이를 들고 가자 아무런 저항 없이 경비원들은 도망갔다고 하고, 목포에서는 카빈총 한 자루를 가지고 트럭을 타고 갔는데 모두 무기고를 비워버리고 갔다고 한다. 어떻든 무장한 시민과 데모군중들이 도청을 점거하고 경찰과 군은 시 외곽지대로 퇴진했다.
20사단 병력이 이동하여 광주시 외곽을 완전봉쇄하고 외부와 고립시키면서 기회를 보아 수복시키려고 작전중인 상황에서 시민들로부터 광주시민이 다 죽게 됐으니 변호사 회장 같은 분이 나서서 사태를 수습하여 달라는 전화가 빗발쳤다.
그래서 재야인사들과 연락하여 보았더니 천주교 남동성당에 신부들과 목사님들이 모여 의논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1980년 5월 22일 오전 10시경 이곳에서 김성용 신부, 조아라 장로, 홍남순 변호사 등 10여 명이 모여서 거도적으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수습하기로 논의, 김성용 신부 등을 도청에 대표로 보내서 정시채 부지사와 절충하도록 하였다.
23일 10시경 남동성당 유치원에 홍남순 변호사, 김성용, 조철현 신부, 조아라 장로, 이애신 YWCA 총무, 위인백 사무장 등 2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당시까지의 도청내 수습대책위원회의 활동상황을 보고받았다.
이 자리에서 학생들과 시민들이 도청 수습대책위원회에 협조를 하지 않으니 도지사, 경찰국장, 시장과 재야법조인, 신부, 목사, 언론인 등으로 거도적인 수습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수습하되, '계엄군은 시내에 진입해서는 안 된다', '광주 사태는 공수단의 살상에 대한 광주시민의 정당방위 행위이다', '공수단의 책임자를 처단하라', '구속학생들을 석방하라', '시위에 가담한 모든 시민은 불문에 부치라'는 등 8개항을 결의했다. 위인백 사무장이 이 요구사항을 정리, 타자하여 나누어주었으며 도경 책임자로 하여금 계엄분소에 연락하여 결의사항을 알리고 총기회수 등 수습에 임하려 하였으나 그에 대한 회답이 없었다.
계엄군, 진입연기 요청 거부
25일 11시경 YWCA 총무실에서 재야측 수습위원의 일부가 학생대표와 만나 대책 을 논의했다. 이 회의에서는 우리의 요구가 받아지지 않는 현실에서 무조건의 무기회수는 굴종을 의미하지만, 많은 시민과 학생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딴 방법이 없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어른들이 궐기대회에 참석하여 성명서를 낭독해 달라는 학생들의 요구에 대하여는 수습하는 마당에 득이 될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모든 것을 학생들이 알아서 하라고 한 다음 남동성당으로 갔다.
그리고 나머지 재야 수습위원들과 합류하여 의논한 끝에 오후 5시경 도청에 들려 도청내 수습위원들과 같이 의논하고자 하였으나 수습의 방법에 차이가 있어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한편 학생대표 김창길 군은 도청 지하실에는 이리역 폭발사고의 몇 배가 되는 TNT를 화순탄광에서 갖다놓았다며 이 폭약이 폭발하면 직경 4킬로미터 이내가 잿더미가 되어버리므로 이를 지키고 있다며, 3일 동안 잠을 못 잔 데다가 인원이 부족하여 지키기 어려우며, 언제 오열들이 들어와 폭발시킬지 모르니 어른들이 함께 지켜달라고 울면서 하소연을 했다. 우리는 교회와 성당에 연락하여 학생들을 동원하기로 하였다. 이기홍, 김성용, 홍남순, 이성학, 김천배, 이영생, 위인백 등 수습위원들이 도청에서 광주시민을 지키기 위하여 밤을 새웠으며, 성당에서 동원된 학생들이 들어오자 수습위원들은 수고를 부탁하였고 김성용 신부가 격려를 해주었다.
상황실에서는 범죄의 신고가 들어오면 출동하여 범법자를 연행하여 경찰에 인계하였다. 경찰국 통신과는 그대로 근무하고 있어 외부와의 통신연락이 자유로웠으며, 정시채 부지사는 수시로 외부와 연락을 한 것 같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지하실의 TNT는 폭약과 뇌관을 분리해서 전혀 폭발의 위험이 없었다고 한다.
26일 새벽 5시경 계엄군 전차가 동운동 방면과 상무대 방면에서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도청내는 비상이 걸리고 술렁거렸다. 정시채 부지사에게 진입을 저지해 달라고 사정하러 갔더니 어느새 도청을 빠져나가고 없었다.
위 수습위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어른들이 나가 전차의 진입을 막자고 의논하고, 금남로를 행진하여 전차가 진입하고 있는 농성동 서구청 앞까지 외신기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른바 죽음의 행진을 하였다. 무사하게도 도중에 전차를 만나지 못했으며, 서구청 앞 국도상에 이르러 진입하려는 계엄군과 맞서게 되었다.
김성용 신부를 대표로 하여 교섭한 결과, 상무대 계엄분소에서 수습위원대표들과 지휘관이 만나 이야기하기로 합의가 되었으며, 나와 홍남순, 김성용, 김천배 씨가 계엄분소로 가서 책임자들과 협상을 하였다. 우리의 수습방안을 제시하고 수습이 될 때까지 군의 진입을 기다리라고 하였더니 더 이상 연기할 수가 없으며 오늘 저녁이 디데이라고 거절했다.
많은 시민이 희생된 것을 이야기하고 군이 진입하면 더 많은 희생이 따른다고 하였더니 계엄부사령관은 "왜 시민 희생자만을 이야기하느냐, 군도 수없이 희생되었다. 통합병원 시체처리 능력이 1백 구인데 군인 시체를 이중으로 포개놓고도 부족하여 헬리콥터로 후송하고 있으며 예리한 칼이나 낫으로 짤린 시체가 많다"고 하면서 거짓말 같으면 가서 봐달라고 하였다. 듣고 보니 거짓이 아닌 것 같 았고, 사실이라면 군사망자수에 관한 정부 발표도 믿을 수가 없었다.
5·18 뒤 보안대 수사 받아
28일 사무실에 나가 시내를 둘러보았더니 도청 앞에 전차가 진주해 있고, 상무관에는 시체를 찾는 가족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으며, 여기저기서 곡성이 충천하였다. 법원과 검찰에 변호사 회장 당선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물었다. 29일 오전에 법원에 가 있는데 사무소로부터 경찰 2명이 헌병대까지 가자고 기다린다고 하여 사무실로 내려와 경찰과 함께 상무대 헌병대에 갔다. 경찰관이 헌병장교에게 나의 출석사실을 이야기하고 문서를 내비쳤다.
옆에서 문서의 내용을 보니 나를 체포했다는 보고서였다. 그것을 본 순간 어떻게 화가 나든지 "야! 경찰, 나를 체포했어" 하고 소리치면서 보고서를 빼앗아 찢어버렸다.
결국 나를 찾는 곳은 헌병대가 아니고 505 보안대인 것을 알고 경찰관과 함께 보안대로 갔다. 거기에는 조아라 장로와 이애신 총무가 먼저 와 있었고, 나는 지하실로 데려가 독방에 가둬지고 경비원이 지켰다.
얼마 후 홍변호사가 부인과 세째 아들과 같이 26일 택시로 서울로 빠져나가다가 광송간 검문소에서 신원이 발각되어 연행되어 왔다. 나에게는 이모 준위을 반장으로 3명의 경찰관이 배치되어 수사가 진행되었다. 조사관들은 교대하여 잠을 자지 못하도록 지키고 한밤중에만 조사를 하면서 도청에 들어가 있던 학생들에게 무기를 반환하지 말고 버티라고 한 내용과 김대중과 연결관계가 있는 것으로 자백을 받으려는 수사방향이었다.
나는 반증으로 수사관에게 위인백 사무장을 찾아가면 재야측 수습위원회에서 결의한 유인물이 있음을 알리고 압수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나의 의도와는 달리 사무장까지 연행하여 함께 구속시켜 버렸다. 나에 대한 수사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저녁에 사병을 술취하게 한 후 방에 들여보내 닥치는 대로 때려서 턱이 비틀어지고 얼굴이 부어 세면장에서 만난 조아라 장로가 나를 못 알아볼 정도였다. 갖은 수모와 협박, 잠 못 자게 하는 고문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까지 허위자백을 하지 않으려고 버티었다. 끝내 조사관도 지쳐서 도청에 있던 정상용 군을 고문한 끝에 받아온 조서를 보이면서 그 범위내에서의 자백을 사정했다.
강요된 자백, 자백들
나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1980년 6월 19일 수사관에게 너희들이 요구하는 내용을 써오라고 하여 읽어본 다음 그 내용을 그대로 베꼈으며, 후일에 항변하기 위하여 원본의 줄이 끝날 때마다 점을 찍어서 자필자술서를 써주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신문조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위인백 사무장은 나에 관한 허위자백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몽둥이로 얻어맞아 다리 골절상을 입고 통합병원에 입원했고, 나의 자술서를 보고서야 그 부분에 대하여 허위진술을 해주었다고 한다.
6월 23일 나는 보안대 지하실을 떠나 공군비행장 영창으로 이감되었다. 7월 9일과 7월 29일 공군으로 조사관이 찾아와 조서를 작성해 갔는데, 김대중 후보에 대한 나의 진주교도소 민회접견표를 모두 복사하여 기록에 붙였다고 한다. 7월 30일 나에 관한 자백을 증거로 삼기 위하여 법무사에게 증거보전 신청을 하였기에 군법회의 법정에 나가 무고함을 제대로 진술하였다.
8월 22일 군검찰부에 출석하여 박소령에게 내가 겪은 그대로 진술하고 보안대에서는 고문에 의하여 허위진술하였음을 말했다. 그때 안 일이지만 내가 구속된 것은 1980년 7월 29일로 구속영장 자체는 허위공문서였다. 9월 12일 같이 공군영창에 있던 조철현 신부와 송기숙 교수가 검찰관에게 불려가 요구대로 조서에서 명하고 돌아와 나와 김신부, 홍변호사로부터 호된 나무람을 받았다.
다음날 우리들 세 사람이 검찰관의 소환을 받고 갔더니, 박소령은 눈물을 흘리면서 지난번 조사내용은 위에서 받아들이지 아니하니 별수없다고 하면서 문답을 완전히 타자하여 완성한 허위내용의 피의자 신문조서에 서명무인해 달라고 하소연하였다.
당사자 없이 증인신문 하기도
우리들 셋은 검찰조서의 증거능력을 알고 있는 터라 모두 거부했던바 서명하지 않으면 다시 보안대 지하실로 가게 된다고 하였다. 검찰에 송치한 사람을 다시 수사기관인 보안대에 보낼지는 꿈에도 생각 못 한 탓으로 우리들은 다시 가는 한이 있더라도 못 한다고 하였더니 얼마 안 있어 다시 보안대 수사관들이 나타나 우리 셋을 지프차에 싣고 갔다. 505보안대 지하실에 각각 독방에 가두고 옷을 벗겨 팬티바람으로 만들어놓고 문을 열어둔 탓으로 추워서 잠 한숨도 자지 못하였다.
4일째 되는 9월 16일 오전에 다시 검찰부에 불려가 위 허위조서에 모두 서명무인하고 말았다.
1980년 9월 30일 제1차 공판을 10월 16일 오전 9시에 개정한다는 통지가 공소장 사본과 함께 송달되었다. 공소내용은 재야측 수습위원들이 남동성당과 광주 YWCA 총무실에서 모임을 갖고 관청에 들어가, 학생들과 무장시민들에게 김대중 석방, 계엄령 해제, 정치일정 단축 등의 사항이 관철할 때까지 싸우라고 무력투쟁을 지시, 선동했다는 내란죄 혐의로 1980년 8월 22일 기소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보안대 지하실에 다시 팬티바람으로 가두어두었다가 서명날인을 강요했던 검찰 피의자 신문조서는 영장 없이 기소해 놓고 그 사실에 맞추기 위한 위법수사였던 것이다. 우리들은 범죄사실을 부인하고 보안대와 검찰 조사시 고문당한 사실을 강조하고 자백의 임의성을 부인했다. 그리고 자유스럽게 조사받은 1980년 8월 22일 작성한 검찰작성의 피의자 신문조서와 1980년 7월 30일 법무사에게 진술한 증거보전 기록을 검증해 주도록 증거신청을 했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검찰측 증인으로 정시채 부지사가 채택되어 증인신문을 하는데, 소송당사자인 피고인들은 퇴정시키려하므로 재판부에 당사자 없이 어떻게 재판을 진행할 수 있느냐고 이의를 제기하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들을 내쫓아 법정에서 떨어진 버스에 가두어둔 채 증인신문을 하여 우리들의 반대신문권을 완전히 박탈하였다. 이러한 위법절차에 의하여 1,2심사에서 유죄로 중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며, 12월 29일 고등군법회의에서 항소기각의 판결선고를 하자마자 검찰에서 상고권 포기를 강요하고 당일 확정시킴과 동시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첫째 5월 17일 자정을 기하여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 실시되었는데 사전에 31사단에 연행되어 구속중에 있었으므로 5.18 광주항쟁이 어떻게 발생하였는지도 모르고 더욱이 진행상황을 전혀 모른 전남대학생 정동년 군에게 어떻게 수괴의 책임을 지울 수 있는가. 둘째 명색이 대학교수와 신부, 목사, 재야법조인 등 원로들을 그 하수인으로 주요임무 종사자 책임을 묻는 논리 구성이 과연 가능할 수 있는지. 세째 모 장교의 말과 같이 유사시 연행할 재야 민주인사들의 명단을 사전에 작성해 놓고 그 명단에 따라 책임을 묻는 수사를 하지 않았는지. 네째 전국 계엄확대와 동시 광주에 배치된 공수부대는 지역관할 책임자인 31사단장의 작전명령하에 있었는가, 아니면 독립된 작전명령을 받은 것인가. 다섯째 독립된 작전명령을 받았다. 현지 지휘관이 명령수행에 있어서 융통성이 있었는지의 여부와 구체적 작전명령의 시달내용이 밝혀져야 한다.
풀리지 않는 의문들
작전명령의 구체적 내용이 밝혀지지 않는 한, 계엄확대와 민주인사의 구속에 대한 저항이 가장 우려되는 그 광주에 부마사태 진압에서 성공한 비법을 사용하여 무자비한 살상을 감행함으로써 시초에 완전진압하는 작전을 수행했던 것이, 임진, 정유왜란 때 최후의 보루였고 동학혁명과 광주학생사건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저항정신의 역사적 전통에 빛나는 지역적 특성의 차이로 인하여 작전계획과는 달리 도리어 큰 저항을 받아 전시민으로 확대된 것이라는 항간의 오해를 벗지 못할 것이다.
저항의 데모가 계속되는 동안 사복경찰관, 보안대요원, 안기부요원들이 시내 곳곳에 깔려 있었고 시민들의 동태를 살피면서 따라다녔는데, 왜 5월 20일 저녁과 다음날 새벽에 MBC방송국과 KBS방송국, 광주세무서의 방화시 방화범인을 묵인 내지는 방치하였는지 의문이다. 또 5월 21일 시민들이 경찰 무기고를 몽둥이를 가지고 습격할 때 저항 없이 비워주고 도망간 경비태도나 화순탄광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하여 도청 지하실에 갖다놓은 사실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수사를 하여 범인을 잡았다거나 기소한 일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위 사건들은 계엄당국에서 병력동원의 명분으로 유인하거나 감행하였다는 추리도 가능하다. 이러한 의문은 5월 25일 도청에 간첩이 침투한 것같이 위장하여 공산주의자의 소행으로 학생과 시민들을 몰기 위하여 장계범, 정항규로 하여금 독침사건을 가장했던 일로 볼 때 더 강해진다.
5.18 당시의 책임을 마땅히 져야 할 시장(후임 시장 포함), 교육감, 부지사, 법원장(검사장은 법무장관을 역임) 등의 기관장을 모두 민정당 국회의원에 공천하여 당선시켜 요직에 임명하는 것을 보면 5.18의 책임은 당시 정치 군인에게 있음을 스스로 노정한 것이라 하겠다.
우선 현집권층이 5.18 광주의거를 매도하여 권좌에 올랐으니 그에 대한 사죄를 국민에게 허심탄회하게 함으로써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그런 다음 군법회의에서 광주 5.18 문제를 내란죄와 기타 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전구속자들에 대해 재심을 통한 무죄선고의 길을 여는 게 순리다.
군사법원법 제469조 소정의 재심사유 중 (1) 원판결의 증거된 서류 또는 증거물이 확정판결에 의하여 위조 또는 변조된 것이 증명된 때, (2) 원판결의 증거된 증언, 감정, 통역 또는 번역이 확정판결에 의하여 허위인 것이 증명된 때, (3) 원판결 전심판결 또는 그 판결의 기초가 된 조사에 관여한 재판관이나 법관 공소의 제기 되는 그 공소의 기초가 된 수사에 관여한 검찰관, 검사, 군사법경찰관이나 사법경찰관이 그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것이 확정판결에 의하여 증명된 때의 사유가 해당된다.
수사과정에서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하지 않은 구속자는 한 사람도 없고, 구속된 몇 달 후에 정식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음은 상술한 바다. 수사공무원의 불법체포, 감금, 폭행, 가혹행위 등의 직무에 관한 범죄로 증거서류가 위조된 경우에 해당되나 공소시효가 완성되어 해당수사관은 처벌할 수 없으므로 확정판결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군사법원법 제471조에 의하여 그 확정판결을 받을 수 없을 때는 그 사실을 증명하여 재심의 청구를 할 수 있으므로 수사기관에서 거증사실만을 수사하여 재심의 증거로 사용하면 더욱 간편할 것이다.
5.18 재판서류 영구보존해야
재심사유의 증거를 확보한 후 동법 제470조 1항에 따라 선고를 받은 자의 이익을 위하여 동법 제 473조 1호에 의하여 검찰관이 청구하면 된다. 검찰관의 재심청구에 앞서 총선 직후 새로 구성된 국회에서 국정조사권을 발동하여 앞에서 실시한 바 있는 여러 가지 사항을 포함한 사건전모를 조사, 그 진상을 재심재판에 활용하여 전원 무죄 선고되도록 해야 한다.
위와 같이 5·18 관련 구속자 전원이 무죄선고가 되면 5·18의 진상은 자연히 규명되고 책임소재가 밝혀질 것이다. 그런 후에 사망자의 유족, 부상자, 구속자들에 대하여 국가유공자 예우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여 유공자로 정하고 그에 따른 예우를 받게 해야한다. 그러면 위령탑 및 기념관 건립, 망월동 묘지의 성역화 문제 등 5·18 광주사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끝으로 5·18 관계 군법회의 소송서류는 당사자의 재심을 위해서도 중요한 역사적 사료이므로 영구보존을 관계기관에 권하는 바이다.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