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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주 공장, 방앗간, 정미소의 트렌디한 변신,
강릉 업사이클링 명소 3선
바다에 버려진 페트병을 수거해 만든 운동화, 낡은 트럭용 방수포나 폐자동차의 에어백, 안전벨트로 제작한 가방, 폐자전거 체인으로 만든 시계 등이 일반 제품들보다 비싼 가격에, 그것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한정판이라 없어서 못 사는 것도 있다. 말 그대로 폐품이 명품으로 변신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는 지금 '업사이클링(UpCycling)'이 트렌드다. 유럽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우리나라에도 최근 들어 업사이클링 열풍이 불고 있다. 업사이클링이란, 재활용을 의미하는 리사이클링(Recycling)에서 파생된 것으로, 버려지는 물건을 단순히 재사용하는 걸 넘어 거기에 디자인 등의 새로운 가치를 더하는 것을 말한다. 어디 패션 분야뿐이랴.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는 업사이클링 공간이 뜨고 있다. 전국의 핫 플레이스라고 불리는 많은 곳들이 버려진 공간을 업사이클링해서 주목받고 있다. 전국의 명소를 다 소개할 수 없으니, 우선 대표 여름 휴가지인 강릉부터 가보자. 오래된 탁주 공장, 방앗간, 정미소의 트렌디한 변신이 펼쳐진다.
옛 탁주 양조장에서 마시는 '강릉적인' 맥주, 버드나무 브루어리
강릉 최고의 핫 플레이스로 손꼽히는 버드나무 브루어리
강릉 최고의 핫 플레이스로 손꼽히는 버드나무 브루어리
먼저 세련된 브루어리(Brewery)로 변신한 탁주 공장을 찾았다. 단언컨대, 지금 강릉 최고의 핫 플레이스로 손꼽히는 '버드나무 브루어리'다. 최근 두 달 사이 벌써 세 번째 방문이다. 종업원이 "강릉 분이세요?"라고 물을 정도로 잦은 방문이다(참고로 나는 강릉에 살기는커녕 아는 지인조차 하나 없다). 두 번은 타이밍이 좋아 유유자적하게 버드나무 브루어리를 즐겼다. 세 번째 방문은 여름으로 접어든 7월의 토요일이었다. 불안했다. 나름 잔머리를 굴렸다. '토요일 이른 대낮부터 맥줏집을 찾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야.'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토요일 낮부터 맥덕(맥주 덕후)들과 여행자들이 가게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버드나무 브루어리의 인기를 실감하며 잠시 대기한 후에야 실내에 자리를 잡았다.
유리창을 통해 양조 시설을 볼 수 있다. 탁주 양조장이던 공간에서 한국적인 맥주가 생산되고 있다.
탁주 양조장이던 공간에서 한국적인 맥주가 생산되고 있다. 유리창을 통해 양조 시설을 볼 수 있다.
특이한 모양의 감각적인 ㄷ자 흰색 의자 옛 건물의 흔적을 살린 벽과 출입문
옛 건물의 흔적을 최대한 살린 채 감각적인 요소를 더했다.
가깝지도 않은 버드나무 브루어리를 자주 들락거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분위기 좋고 맥주 맛이 좋으니까. 버드나무 브루어리의 가장 큰 매력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요소들이 멋스럽게 조화를 이뤘다는 점이다. 예스러움과 트렌디함, 한국과 서양이라는 상반된 것들이 아름다운 합을 맞추고 있다. 맥주라는 서양의 술을, 막걸리를 만들던 한국적인 공간에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이곳은 원래 탁주 공장이었다. 1926년 설립된 강릉합동양조장의 명맥을 잇는 강릉탁주 양조장이었다. 현 건축물의 정확한 건립년도는 알 수 없지만 남아 있는 물건들의 흔적을 추적해보면 1970년대로 추정된다. 경기대학교와 농업기술실용화재단이 공동 설립한 양조 교육기관인 수수보리아카데미 출신자들이 폐업한 강릉탁주 공장을 2015년 맥주 양조장으로 변신시켰다. 막걸리를 발효하던 공간에서 이제는 맥주가 맛있게 익어가고 있다. 막걸리에서 맥주로 변신했다고 해서 한국적인 색채를 완전히 배제한 건 아니다. 이곳에서는 지극히 한국적인, '강릉적인' 맥주가 만들어진다.
버드나무 브루어리의 대표 맥주를 다양하게 맛볼 수 있는 '샘플러' 메뉴도 있다. 김치를 넣은 홍제피자가 인기
낡은 텔레비전 오래된 그릇안에 담긴 닭다리 모양의 과자
낡은 텔레비전과 오래된 그릇 등 빈티지한 아이템이 가득하다.
맥주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다. 미노리 세션, 하슬라 IPA, 창포 에일, 파인시티 페일에일 등 독특하다. 미노리 세션은 강릉 사천면 미노리에서 생산한 쌀을 사용해 만들고, 창포 에일은 강릉 단오제를 상징하는 창포를 넣어 만든다. 하슬라는 강릉의 옛 지명이며 파인시티는 '솔향 강릉'이라는 슬로건을 살린 이름이다. 이렇듯 버드나무는 강릉에 뿌리 내린 브루어리라는 사명을 살려 강릉의 지역적 특색을 담아낸 개성 강한 맥주를 생산해내고 있다.
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옛 양조장의 기본 틀을 고스란히 살렸다. 오래된 나무 천장, 허름한 벽, 묵직한 철제문, 낡은 철제 책상, 빛바랜 나무 창문틀이 이곳에서는 빛나는 요소다. 빈티지한 요소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옛날 외할머니 집에서나 봤을 법한 투박한 그릇과 접시, 지금은 컵과 물 받침대로 사용되는 문 달린 텔레비전도 눈에 들어온다. 탁주 공장에서 사용하던 집기들도 군데군데 남아 있다. 자칫 촌스럽다고 여겨질 아이템들이 묘하게도 이곳에서는 '멋짐'의 아이콘이 된다.
떡 대신 커피 뽑는 동네 사랑방, 봉봉방앗간
명주동 대표 카페인 봉봉방앗간
맥주 한 잔 마셨으니, 운전은 금물. 걸어서 갈 만한 데를 찾아본다. 버드나무 브루어리가 있는 홍제동 옆 동네 명주동을 찜했다. 전부터 한 번 가봐야지 하고는 늘 바다로 향하곤 했다. 이번에는 마음먹고 명주동으로 향했다. 명주동은 한때 강릉의 번화가였으나 이제는 한적한 옛 도심이 되어버렸다.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깨달았다. 역시 시간의 힘은 무시할 수 없는 법이라는 걸. 세월이 묵묵히 쌓아놓은 흔적과 이야기가 어느 순간 이방인의 발걸음을 사로잡았다. 명주사랑채, 작은공연장 단, 아기자기한 카페 몇이 보였다. 누군가는 '이게 전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전부라서 좋았다. 서울의 핫 플레이스인 골목들처럼 과하지 않아서, 진정 옛 골목의 느린 속도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좋았다.
동네 사랑방처럼 편안한 분위기의 1층 카페이면서 갤러리 같은 2층 공간
[왼쪽/오른쪽]동네 사랑방처럼 편안한 분위기의 1층 / 카페이면서 갤러리 같은 2층 공간
명주동에 왔으면 꼭 들러야 할 곳, 봉봉방앗간이다. 버드나무 브루어리에서 나박나박 걸어서 10여 분 거리에 있다. 골목에서 잠시 헤매다 길에서 만난 누군가에게 봉봉방앗간의 위치를 물었다. 이 동네 명물이 맞나 보다. 단번에 위치를 알려준다. 뾰족 지붕을 인 건물에 '봉봉방앗간'이라는 이름이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 이름처럼 이곳은 진짜 방앗간이었다. 한때는 줄을 서서 떡을 해가던 곳이란다. 세월의 흐름 속에 방앗간은 문을 닫고 10여 년간 빈집으로 버려져 있다가 2010년 문화예술 관련 분야에 종사하던 사람들과 연을 맺게 되었다. 1년여 직접 공간을 매만지며 수고한 보람으로 마침내 2011년 커피와 문화예술, 사람이 공존하는 카페 봉봉방앗간이 문을 열었다.
지역 작가들의 작품이 연중 전시된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들이 만드는 작품과 소품도 전시, 판매한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벽, 낡은 타일로 된 바닥, 오래된 창문 등 민낯 그대로라 더 멋스럽다. 치장하지 않아서 편안하다.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는 주인장은 찾아온 동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다. 떡을 뽑고 참기름을 짜는 대신 쿠키를 굽고 커피를 내릴 뿐이지 예전의 동네 방앗간처럼 동네 사랑방이나 다름없다. 이방인도 그 분위기에 엮여 이 동네 사람처럼 편안하게 쉬어간다. 모든 커피는 직접 로스팅해 핸드드립으로 내린다. 기계가 아니라 사람의 손과 마음을 거친 커피는 더욱 따뜻한 감성을 갖는다. 곳곳에 창문이 나 있고 그 사이로 작품이 걸려 있다. 별것 아닌 평범한 창문 밖 풍경마저 이곳에서는 작품처럼 느껴진다.
정미소에서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초당커피정미소
오래된 정미소가 카페로 변신했다. 정미소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 더 특별하다.
오래된 정미소가 카페로 변신했다. 정미소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 더 특별하다.
정미소 기계 벨트를 그대로 살려서 인테리어소품으로 썼다. 탈곡기 등 카페 안팎에 정미소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정미소 기계 벨트, 탈곡기 등 카페 안팎에 정미소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강릉의 업사이클링 공간들이 주는 매력에 흠뻑 빠져버렸다. '내친김에 한 곳 더'를 외치며 초당순두부로 유명한 초당동으로 갔다. 짬뽕순두부와 초당순두부를 먹으러만 갔는데 오늘은 식당 대신 정미소로 향한다. 식당이 늘어선 초당순두부마을에서 옆길로 살짝 들어선다. 아늑한 동네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니, '초당정미소'라는 나무 간판이 걸린 허름한 건물이 보인다. 시간이 멈춘 그곳에 발걸음을 멈춘다.
정미소에 들어서는 기분으로 카페 문을 연다. 여전히 제가 주인인 양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정미소 기계가 눈길을 끈다. 카페 벽면은 투명판을 깔고 그 사이에 쌀겨를 채워두었다. 카페로 변신했지만 이곳의 본분은 정미소였음을 잊지 않으려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가지런하지 않은 천장의 목재, 정미소 기계 벨트, 더 이상 시간을 알려주지 못할 것 같은 오래된 시계 등 옛 흔적을 따라 눈이 바삐 움직인다.
집을 짓거나 고친 내력을 적어두는 상량문에 1963년 상량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꽤나 오래된 건물이다. 식량 증산이 국가적 과업이던 시절, 경포호수 주변을 메워서 논을 만들던 그 시절에 초당정미소는 이 동네의 벼를 도정하던 중요한 공간이었다. 세월이 흘러 세상이 변하면서 사람들로 들끓던 초당정미소는 문을 닫았다. 초당동 토박이인 주인장은 추억의 장소인 정미소가 없어지는 게 안타까웠다. 그래서 정미소를 인수해 누구나 편히 쉬어갈 수 있는 카페로 바꿨다. 물론, 정미소의 흔적은 최대한 그대로 남겼다. 벽면에 붙은 건축사의 표현처럼 초당커피정미소의 건축은 '자원을 적게 버리고 많은 추억을 남기는' 역할에 충실했다.
커피와 콩비지쿠키는 환상의 조화!
정미소의 흔적만 남아 있다고 카페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이곳에는 풍미 좋은 커피와 각종 마실 거리가 있다. 그리고 초당순두부마을의 현지 특색을 살린 메뉴도 눈에 띈다. 초당두부바나나스무디와 콩비지쿠키, 콩비지파운드케이크가 그런 것들이다. 인근에서 초당순두부 음식점을 함께 운영하는 주인장이 직접 만드는 메뉴다. 콩비지와 쿠키, 파운드케이크의 만남이라…. 그 조합이 내는 맛이 상상이 되질 않는다. 이럴 땐 직접 먹어보는 게 답.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매력적이다. 정미소의 주인공이던 쌀처럼 씹을수록 고소하다.
강릉에서 만난 업사이클링 명소들이 가슴 깊이 들어앉은 이유는, 묵직한 세월의 흔적과 사람들의 스토리가 공간에 더해졌기 때문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가끔씩 돌아보고 싶은 어제가 그 공간들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첫댓글 강릉에 이런 곳이 있는줄 몰랐네요. 꼭 한번 가보고 싶어지는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