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사회와 제도 경복궁 답사보고서.hwp
경복궁 답사 보고서
0. 답사를 가는 경복궁이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와 그 지지자들은 고려의 서울인 개경(開京)으로부터 도읍을 한양성(漢陽城)으로 옮겨 신도(新都) 경영에 착수하는 동시에 궁궐의 조성도 착수하였다. 1394년(태조 3) 9월 신궐조성도감(新闕造成都監)을 두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좌복야 김주(金湊), 전정당문학 이염(李恬), 중추원학사 이직(李稷) 등을 판사에 임명하여 실무를 담당, 해산(亥山:北岳山)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임좌병향(壬坐丙向:北北西에 앉아 南南東을 바라다봄)의 터를 잡았다.
원래 태조는 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宮井洞 일대) 터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새로운 왕조의 뻗어나는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터전이라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일단 옮긴 태조는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3일에 궁궐과 종묘를 짓겠다고 산천신(山川神)에게 고사하고, 이튿날 개기(開基)하여 주야로 작업을 진행,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명칭은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이란 글귀에서 따서 경복궁이라 하였다. 궁내에 준성된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다.
1. 경복궁에 대한 역사적 사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다섯 개의 궁궐 중 첫 번째로 만들어진 곳으로, 조선 왕조
의 법궁이다.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후 종묘, 성곽과 사대문, 궁궐 등을 짓기 시작하는데 1394년 공사를 시작해 이듬해인 1395년에 경복궁을 완성한다. ‘큰 복을 누리라’는 뜻을 가진 ‘경복(景福)’이라는 이름은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왕자의 난 등이 일어나면서 다시 개경으로 천도하는 등 조선 초기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경복궁은 궁궐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 정치 상황이 안정되고 비로소 이곳이 조선 왕조의 중심지로 역할을 하게 된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이 나 무너지게 되는데 조선 말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지휘 아래 새로 지어진다. 경복궁 중건을 통해 조선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자 하였지만 얼마 되지 않아 건천궁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이곳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가게 되니, 단청의 색이 채 마르기도 전에 또 다시 빈집이 되어 버리는 비운을 겪는다.
일제 때 중앙청이라 불렸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경복궁 내에 만듦으로써 조선 왕조의 상징을 훼손하고 조선의 자존심을 무너뜨렸으며, 정문인 광화문 또한 해체해 지금의 건춘문 자리 근처로 옮겨버렸다. 광화문은 이후 1968년 복원되는데 당시 남아 있던 중앙청 자리를 기준으로 해서 세우다 보니 원래 경복궁 건물들이 이루고 있는 선상에서 벗어나 삐뚤게 놓이게 되었다. 현재 다시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하여 복원 중이다.
2. 경복궁 답사
예전부터 나는 경복궁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도시와 전혀 다른 세계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학교에서 몇 번간 것을 빼면 사실 경복궁을 직접 가본 기억이 내게는 없다. 때문에 이번 답사를 통하여 그 안에 있는 자세하고 깊은 내용을 알고자 가게 되었다. 경복궁 들어가면 먼저 영제교라는 다리가 나온다.
입궐하는 모든 이는 이 다리를 건너야 했다. 이 다리에서 관료들은 세속에서 묻은 탐욕 등의 더러운 것을 씻고 공명정대하고 정갈한 마음으로 궁에 들어가게 된다. 원래 이곳에는 금천이라고 부르는 물이 흘러서 욕심을 흘려보내는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금천의 담 위쪽에는 서수라는 상상의 짐승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은 욕심을 버렸을 때 그 악한 기운이 벽을 타고 올라오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런데 일본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던 물을 막았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이 물이 다시 흐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금천을 건너가 처음으로 나오는 건물은 근정전이다. 경복궁은 크게 왕이 통치하는 공간, 왕실가족이 생활하는 공간, 신하들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 중 근정전은 왕이 통치를 하는 공간이다. 그런데 근정전은 매일 집무를 보는 곳은 아니고 왕이 신하들과 함께 한 달에 네 번, 조참의례를 치르는 곳이다. 들어가면 각 품계에 따라 설 자리가 바닥에 지정되어 있는데, 아마도 신하들은 의례가 있을 때마다 이곳에 예복을 갖춘 채로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닥을 보면 이상하게도 울퉁불퉁하다. 다른 곳의 돌은 모두 예쁘게 잘 다듬어져 있는데 왜 하필 예식을 치르는 곳의 바닥이 울퉁불퉁한 걸까. 여기에 신하들의 편리를 위한 실용적 이유가 있다. 우선 각 관료들은 이곳에 설 때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그 때 햇빛이 바닥에 반사되어 그들의 얼굴에 닿으면 매우 더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빛의 반사각도를 조절하기 위해 바닥이 울퉁불퉁한 것이다. 또 하나는 당시의 신발은 밑창이 매끄러웠다. 그래서 자칫하면 넘어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바닥을 거칠게 하여 마찰력을 높인 것이다.
사정전은 왕이 매일 근무하는 곳이다. 건물이 세 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왕은 계절마다 건물을 옮겨 다니며 근무를 했다. 편전은 마루로 되어 있으며 여름에 근무하던 공간이다. 내탕고는 왕의 비밀창고 역할을 했다. 사정전 천장에는 운룡도가 있다. 이 그림에서 용은 왕을, 구름은 신하를 상징한다. 용과 구름이 어우러져 있는 이 그림은 어진 임금과 현명한 신하의 화합을 뜻하며, 왕이 현명한 신하를 등용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왼쪽으로 가면 신하들의 공간이 나온다. 수정전은 원래 집현전이었고, 후에 군국기무처로 사용된 곳이었다. 수정전은 원래 수많은 건물들이 복도로 연결된 형태였으나 지금은 복도는 사라지고 그 흔적만이 남아있다. 수정전 옆에는 경희루가 있다. 본래 이 사이에는 담장이 존재해 신하들이 평소에 드나들 수 없게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경희루는 안에서 밖을 내다보며 경치를 감상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건물의 기둥에 낙양각이 설치되어 있다. 이것은 안에 앉아서 밖을 내다볼 때 자연 경치가 물 흐르듯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 만든 장치이다. 조선의 건축이 자연과의 조화를 항상 염두에 두었음을 알 수 있었다.
3. 답사를 마치며 들었던 생각
답사를 하며 크게 느낀 것 두가지는 이렇다. 우선, 경복궁은 조선 유학자들이 나라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건축물이라는 점을 알았다. 왕궁을 만드는데 당연히 고심했겠지만, 그것이 단지 왕의 편안이나 화려함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유교적 정신과 에법, 그리고 실용성까지 모두 고려한 것이라는 사실은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두 번째로 느낀 것은 당대 학문의 깊이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경복궁이 일제치하에서 너무 많이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단순히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게 다가 아니었다는 것을 이번 답사를 통해 알ㅇㆍㅆ다. 과거 일제가 얼마나 치밀하게 조선을 침략했는지, 그들의 교묘함이 곳곳에서 느껴저서 정말 경악스러웠다. 이번의 경복궁 답사를 통해 경복궁의 곳곳에 남아 있는 일제치하의 흔적들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특히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건청궁이 그 역사를 증명하는 것 같아 더욱 슬펐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이러한 것들을 알았다는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경복궁은 그 상처의 흔적만이 아니라 조선 유학자들의 깊은 뜻과 조선 성리학의 이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보배이니 그 역사만큼은 자랑스럽게 여겨 보존해야 함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