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룩한 감정(5)-긍휼의 마음
마태복음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오늘 저녁에는 하나님 백성에게 나타나는 거룩한 감정에 대하여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성품의 헌장이라 할 수 있는 산상수훈의 첫 부분에서 주님께서 선포하신 주의 백성의 성품 중 하나로 긍휼의 마음이 나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그렇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 백성의 특징적인 성품인 것입니다. 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자라야 천국 백성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 백성이 긍휼한 마음을 가진 것이 성품적 특징일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시편 103:8 이하에 보면 성령의 감동으로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에 대하여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편 104:8~14)
하나님께서 긍휼이 많으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심을 마치 육신의 부모가 그 자식을 긍휼히 여김과 같다고 비유하십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니 연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가난하고 빈핍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통하여 선포하신 신정 국가 이스라엘의 법률인 율법을 보면, 가난한 이스라엘 형제들에게 고리대금을 취하지 못하도록 금하였습니다. 만약 빚 때문에 논과 밭이 팔려가고 아들과 딸까지 종으로 팔려간다 해도 안식년인 칠년 때와 50년 희년 때에는 논과 밭을 도로 찾게 되고 종으로 팔려간 자들도 값없이 자유를 얻게 해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언약을 저버리고 악을 행하고 범죄할 때에 진노하시고 그들을 엄하게 징계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행한 대로 갚아서 아주 멸하지 못하시고 회개하도록 기회를 주시고 그들을 다시 용서하사 다시금 일어나게 해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서 11:7 이하에도 보면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이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세아 11:7~9)
여기서 보면, 끝끝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섬기고자 고집을 피우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도 하나님은 그들을 놓지 못하고 진노를 쏟지 못하시고 도리어 긍휼이 불같이 마음에 타올라서 그들을 멸하지 아니하겠다고 다짐하십니다.
시편 78:36~39 말씀에서도 그러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그들의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하지 아니하였음으로다 ‘그러나’(원문의 접속사 ‘베’의 해석)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그럽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며 그 언약에 불성실할지라도 그 죄악을 덮어주시고 여러번 진노를 돌이키시고 그의 모든 분노를 다 쏟지 아니하셨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없는 죄인이요 한번 죽으면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 같은 존재임을 아시고 긍휼히 여기심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살아 있음과 많은 범죄 중에서도 신앙의 은총을 누리며 징계 중에서도 다시금 보존하시는 은혜를 입어 여기까지 온 것도 다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의 성품 덕분인 것입니다.
어찌 하나님 아버지뿐이시겠습니까? 이 땅에 오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역시 긍휼이 많으신 모습으로 이 땅에서 사역하셨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찾아온 무리들을 보시면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솟아오르곤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36 말씀에 보면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찾아나온 당시의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마음이 불쌍한 마음이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다’의 헬라어 원문 단어는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단어로서 이 단어는 ‘사람의 창자, 내장, 심장’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애가 끓어서 불쌍한 마음으로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는 심정을 여기서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치 목자를 잃어버린 양이 거친 들판을 헤매면서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가시에 찔리고 절벽에서 떨어져 다리를 절뚝이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몰려든 그 무리들을 보면서 마치 그들이 아무도 돌아보는 이 없이 두려움과 절망감에 사로잡힌 잃은 양처럼 생각되어 한없이 마음에 불쌍히 여기는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들린 자도 고쳐주시고 때로는 기진하여 쓰러질 것 같으니 저녁이 깊어질 때 돌아가는 그들을 위하여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소년의 도시락을 가지고 기적을 베풀어 남자 장정 숫자만 오천 명이 넘는 큰 무리를 다 배불리 먹여 보내시곤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다니의 사랑스런 오누이들인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 가정에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 집에 방문하였을 때에 마르다와 마리아가 우니까 함께 우시면서 나사로를 다시 살려 주어 그 눈물 대신 기쁨으로 다시 충만하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전도하시다가 나인 성에 들렀을 때에 그 성에서 마침 한 장례 행렬이 나오는 것과 부딪혔습니다. 그 장례는 한 과부의 외아들 청년이 죽어 묻으러 가는 장례였습니다. 그 슬퍼하는 과부를 보시자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 관에 손을 대시고 그 청년을 일으켜 살려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을 그 어머니에게 친히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하신 이유에 대하여 누가복음 7:13 이하의 말씀에 이르기를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누가복음 7:13~15)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과부의 슬퍼 우는 모습을 보시고 마음이 아파서 가던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시고 죽은 그 과부의 외동아들을 살려서 그 모친 품에 다시 안겨주신 것입니다. 그 죽은 자를 살리신 근본 원인은 바로 예수님의 긍휼이 가득한 그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처럼 긍휼이 많으시기에 주님께서 보내신 주님의 영 성령께서도 긍휼이 많으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성도들 역시 긍휼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 말씀에 이르기를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 성령으로 거듭나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고 살아가는 성령의 사람들은 자비의 열매,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연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도 성도들에게 가르칠 때마다 긍휼의 삶을 살도록 가르치곤 한 것을 사도들의 편지에서 보게 됩니다.
에베소서 4:32 말씀에 이르기를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3:8에서도 이르기를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하나님을 닮은 모습을 삶에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녀답게, 나를 값주고 사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심령 속에 늘 살아 있어야 하겠습니다. 고난 당한 자와 억울한 일을 겪은 자, 재난과 환난을 당하여 슬퍼하는 자들을 볼진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어야 하겠습니다. 궁핍한 자들을 보면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여건이 되는 한 돕고자 손을 내미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긍휼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복을 주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복을 주실까요?
먼저, 긍휼을 베푼 자에게 하나님께서도 그 긍휼을 베푼 것을 도로 갚아주십니다.
잠언 14:31 말씀에 이르기를
“긍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고 하였으며, 잠언 19:17 말씀에서 이르기를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갚아주시리라”
고 하였습니다. 잠언 28:8 말씀에서는 이르기를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늘리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해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고리대금으로 자기 재산을 늘리는 사람, 남의 고난을 자기 이익을 위하여 악용하는 자는 결국 그 모은 재산을 하나님께서 도로 빼앗아서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동정하여 베푸는 사람에게 옮기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는 자를 위하여 재물을 더해주시고, 그 선행을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주십니다.
그러한 예를 한 사람 들자면, 베들레헴에 살던 유력한 사람 보아스를 들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자기 친척 엘리멜렉이 기근 때에 재산을 정리하고 기근이 없는 모압 땅에 갔다가 시간이 좀 지난 후에 다 망하고 엘리멜렉도 죽고 두 아들도 죽고 그 아내 나오미와 젊은 며느리 룻만 과 함께 외롭게 쓸쓸하게 돌아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사연을 전해들은 그 친척 집이 당한 일이 안타까웠지만 한편 룻이라는 그 젊은 며느리의 기특하고 아름다운 희생적 효성에 깊이 감동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러던 중에 룻이 어머니를 봉양할 마음으로 보리 타작 철을 맞아 추수하는 논밭에서 떨어진 이삭을 주우러 다니다가 보아스의 밭에 이르러 이삭을 주었습니다. 마침 그 때 그 밭에 찾아온 주인 보아스가 룻을 보고 그렇게 홀로 된 시어머니를 위하여 먼 타향인 베들레헴까지 와 준 것에 대하여 축복의 말을 해주면서 다른 데 다니지 말고 추수 때까지 자기 논밭에서 다른 하녀들과 함께 있으면서 이삭을 주우라고 말합니다. 밥을 먹을 때에도 그 들판에서 다른 종들과 함께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추수하는 종들에게는 룻을 위하여 일부러 손에 쥔 이삭들을 뽑아 버려두어 룻으로 편한 마음으로 이삭을 많이 주어 가지고 가도록 배려해주었습니다.
이렇듯 가난해진 친척 집안 일을 돌아보고 자신의 젊음을 희생하며 노모를 돌보려고 건너온 이국 소녀를 보면서 불쌍히 여겨준 보아스에게 하나님께서는 룻을 그 아내로 맞이하여 그 동안 얻지 못했던 그의 집안의 상속자를 낳게 해줌으로써 그 집안이 훗날 다윗이 태어나고 예수님이 그 혈통의 집안에 오시는 영광을 얻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복을 받은 것은 그의 긍휼한 마음 덕분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었던 보아스에게 그 집안에서 가장 필요한 은혜 곧 상속자를 얻는 축복을 받아 누리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는 자에게 긍휼 있는 심판을 행하십니다.
마태복음 18장의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 비유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교훈은 남이 내게 행한 잘못을 용서해주지 아니하면 모든 만민의 임금이신 주님 앞에 설 때에 우리의 잘못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교훈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남을 불쌍히 여길 때에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허물과 잘못이 있을지라도 불쌍히 여기고 보아 넘겨 주시고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에게 해를 끼치고 고통을 준 경우라도 너그럽게 용서해주고 넓은 아량으로 품어주고 넘어가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의 많은 죄와 깊고 무거운 죄를 주님께서 우리의 그 모습을 기억하시고 용서해주시고 용납해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13 말씀에 그 점을 이렇게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심판은 그 칼날이 얼마나 날카롭고 그 위엄은 얼마나 서슬이 퍼렇습니까? 그렇게 위세 좋고 서슬 퍼런 심판의 칼날을 누가 막아서며 그 칼날의 끝을 무디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심판을 누그러뜨리는 힘이 바로 긍휼이라고 야고보 선생을 가르칩니다. 긍휼을 품고 긍휼을 행한 자는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긍휼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 심판 대신에 긍휼로써 그 사람을 용납하고 용서하게 해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고 사도는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참으로 복되고 아름다운 감정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이 긍휼의 감정이 늘 충만하며 우리 주님 마음에도 성령님 속에서 가득합니다. 그 긍휼의 감정이 하나님 안에 가득한 까닭에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며 우리가 죄 가운데 물리침을 받지 않고 용납되어 여기까지 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 다윗은 그가 말년에 인구 조사를 행한 죄악을 범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때 세 가지 징벌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선지자의 말을 듣자, 그는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사무엘하 24:14)
다윗은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의 여정을 돌아보니, 사람이란 존재는 피도 눈물도 없을 수 있고 아버지와 자식 간의 혈육의 정까지도 권력을 위해서라면 깡그리 무시하고 죽이려 들 만큼 잔인해질 수 있음을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의 손에 자기 인생이 또 다시 빠져서 쫓기는 신세가 되면 참으로 참혹하고 괴로움이 말로 다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은 때리시다가도 후회하시고 채찍질하시다가도 긍휼이 많으셔서 다시 싸매시고 내치셨다가도 다시 돌이켜 품에 안으시는 긍휼이 크신 분임을 너무 잘 알았기에 그는 차라리 하나님의 진노의 손에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고 말하였습니다. 실로 하나님은 죄에 대한 진노가 크시지만 다윗이 믿었던 바 그대로 긍휼이 많으셔서 삼일 동안의 전염병을 내리신다고 하시더니 하룻만에 그치셨고 그 사건을 통하여 장차 성전을 짓게 될 터를 계시하사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솔로몬의 성전 터로 계시해주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우리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일이 왜 없겠습니까? 넘어지고 쓰러지는 일이 왜 또 없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긍휼이 크신 분이시기에 우리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애가 3:19~23 말씀에 이르기를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도소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노하셨다가도 하루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또 다시 그의 마음은 우리를 향한 긍휼이 가득차서 새롭게 우리를 사랑함으로 붙들어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새로운 기대로 우리를 맞이해주시고 함께해주시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좋으신 하나님, 긍휼이 크신 하나님을 모신 우리들은 참으로 행복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좋으신 우리 하나님을 본받아, 우리 구주 예수님을 본받아서 더욱 긍휼이 가득한 마음의 사람들이 됩시다. 가난하고 곤핍하고 실패하고 넘어진 자,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는 자를 향하여 긍휼한 마음을 가집시다.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손을 내밀어 돕는 자가 됩시다. 그리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에게 더 나누고 돕도록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장차 맞이할 심판 자리에서도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죄를 사해주시고 영광의 관을 씌워주시고 품어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