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년 2월 4일 - 1945년 4월 9일)
에릭 메탁사스의 디트리히 본회퍼가 출간되자 일부 본회퍼 전문가들이 이 책을 비판했지만, 디트리히 본회퍼의 이름을 이보다 더 널리 알린 책이 있는지 따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국 독자들은 오랫동안 본회퍼의 Discipleship, Life Together,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을 읽었지만, 메탁사스의 이 대작은 본회퍼를 다시금 알려주는 전례 없는 영향을 끼쳤다.
메탁사스의 많은 독자가 자신들이 전혀 알지 못했던 본회퍼의 삶에 대한 세부적인 부분들을 알게 되고서는 놀란다. 에버하르트 베트게의 비길 데 없는 걸작 디트리히 본회퍼가 영어로 번역되어 나오면서 대중이 접할 수 있었던 본회퍼의 삶에는 여전히 모호한 부분이 많았지만, 메탁사스의 책이 본회퍼 학자나 역사가들이나 알 수 있던 그런 것들을 일반 독자들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메탁사스에게 큰 빚을 졌다.
본회퍼가 걸어간 삶의 여정을 읽어 알게 된 독자들은 본회퍼가 미국에 체류하던 시기, 특히 그가 뉴욕시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때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본회퍼가 할렘(Harlem)에 있는 [미국 흑인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상징이 된] 아비시니안 침례교회(Abyssinian Baptist Church)에서 예배하고 청소년 사역에 참여한 경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흥미를 느낀다. 사람들은 또 본회퍼가 프랭크 피셔(Frank Fisher)라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생과 평생 깊은 우정을 나눴다는 사실에 감명받는다. 프랭크 피셔는 본회퍼를 하워드 대학교(Howard University, 워싱턴 D.C.)에 데려갔었는데, 그 지역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피셔는 입장을 거부당했다(본회퍼는 그곳에서 식사하는 것을 거절했다). 사람들은 본회퍼가 미국 남부 딥 사우스(Deep South) 지역을 방문하고 흑인차별의 실상(Jim Crow)을 그의 두 눈으로 확인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충격을 받는다.
본회퍼의 이러한 경험은 그의 삶에서 인종차별에 분명한 확신을 갖게 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그의 이해력이 아직 자라지 않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본회퍼에게도 맹점이 있었다.
예를 들어, 디트리히 본회퍼가 미국에서 박사후과정을 공부하는 동안에 그의 형 카를 프리드리히(Karl Friedrich)와 주고받은 다음 편지를 살펴보자.
카를-프리드리히 본회퍼에게:
남부 주에서 백인과 흑인을 분리하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기차 여행에는 분리가 아주 사소한 데까지 퍼져 있습니다. 제가 확인한 바로는 흑인들의 자동차가 대체로 다른 자동차들보다 더 깨끗해 보였습니다. 백인들이 객차 안에 붐빌 때도 흑인 전용 객차 안에는 흑인이 단 한 명만 타고 있기도 해서 나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남부 사람들이 흑인에 대해 하는 말을 듣고 있자면 혐오스럽기만 합니다. 이 점에서 목회자들이라고 다른 사람들보다 나을 건 없습니다. 나는 남부 흑인들의 영가가 아메리카에서 이루어진 가장 위대한 예술적 성취라고 확신합니다. 형제애, 평화 따위를 외치는 구호가 엄청나게 많은 나라에서 아직도 이런 것들이 바로잡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DWE 10권, 269)
디트리히 본회퍼, 1931년 1월 2일
본회퍼의 형 카를 프리드리히는 이렇게 답신했다.
디트리히 본회퍼에게:
네가 흑인 문제를 이렇게 철저하게 탐구할 기회를 얻었다니 기쁘다. 내가 거기에 있었을 때 나는 그것이 적어도 양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문제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하버드 임명 취소 통보를 받았을 때 내가 그곳으로 완전히 이주하기를 꺼린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나 자신도 그런 유산을 물려받고 싶지 않았고, 그것을 내 장래의 아이들에게도 물려주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그 문제가 어떻게 바로잡힐 수 있는지 정말로 알 수 없고, 이게 수학에서처럼 실제로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는 것만 같다. 어쨌든 우리의 ‘유대인 문제’는 그것에 비하면 농담에 불과하다. 여전히 이곳에서는 억압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적어도 프랑크푸르트에서는 그렇지 않다. (DWE 10권, 276)
카를 프리드리히 본회퍼, 1931년 1월 21일
돌이켜보면 독일의 상황에서 인종차별과 싸우는 데 직접 헌신하게 될 두 사람이,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되기 불과 2년 전에는 어떻게 진실을 보는 데 맹점이 있었는지 놀랍다. 소위 유대인 문제는 사실이지 농담이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인종차별은 농담이 아니었다. 본회퍼 형제는 자기 나라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차별의 심각성은 과소평가했지만, 미국의 심각한 문제는 분명하게 보았다. 이 점에서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두 나라 상황 모두에서 인종 편견은 끔찍했다고 말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일 때가 많다. 우리는 다른 상황에서는 맹점을 쉽게 식별해 내면서도 우리 자신의 맹점은 키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맹점을 볼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이게 바로 맹점이라는 적절한 이름이 붙은 이유이다).
맹점을 극복하는 방법을 본회퍼에게서 배울 수 있는 세 가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나에게 맹점이 있다고 가정하라.
그가 감옥에서 쓴 글로 보자면 본회퍼는 평균 이상의 자기 인식 수준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 중 가장 자기 인식이 강한 사람조차도 맹점을 키운다. 맹점을 극복하는 첫 단계는 이렇게 가정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볼 수 없거나 보려고 하지 않는 어떤 것들이 있다. 그래야 우리는 회개의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2. 외부인을 초대하여 나의 맹점을 진단하라.
그리스도인들은 외부 책무성(external accountability)을 원한다고 쉽게 말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을까? 이것이 맹점을 극복하는 데 고통스러운 부분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삶에 (그리고 교리에) 맹점이 있는지 검토해 달라고 청해야 한다.
3. 자기 인식 수준을 높이려고 노력하라.
마지막으로, 본회퍼와 같은 삶을 이어가려면 자기 인식의 성장에 높은 가치를 두어야 한다. 자기 평가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로부터 배움을 통해 우리가 자신과 이웃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함께하는 삶(Life Together)의 복을 누릴 수 있다.
첫댓글 본회퍼에게서 많은 걸 배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