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리앗병원 대공습으로 중소병원 초토화
융단 폭격에 희망 잃고 꿈 접는 병원장 늘어…자생력 확보 시급
골리앗 병원의 진격은 한국 병원계의 지도를 순식간에 바꿔 놓았다. 최첨단 장비와 초현대식 건물로 무장한 이들 병원은 소위 '빵빵한' 의료진과 고차원 서비스로 한국의 병원망을 장악했다. 그러나 거대 병원들의 진격로(進擊路) 좌우에는 패퇴한 중소병원과 동네병원이 널 부러져 있다. 한국 병원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초대형화의 그늘, 그 아래 중소병원들의 한숨과 원성이 급기야 폭발 직전에 있다.
"대형병원들이 의사, 간호사, 의료기사를 모두 빼 가는 바람에 사람이 없어 병원 문을 닫아야 할 지경입니다. 덕분에(?) 부푼 꿈을 안고 3년 전 개업했지만 몇 달 안가 환자는 반토막 나더라고요. 요즘엔 그냥 병원에 나와 감기 환자 몇 명 진료하다가 마누라와 자식 놈들 눈치만 보고 있죠, 뭐" 경북 대구시 소재 한 내과 중소병원장. 한숨과 함께 짜증이 잔뜩 섞인 말투다.
'그룹 병원', '재벌 병원'의 연이은 등장은 그에게는 고통의 시작이었다. 인구 250만 여명인 이 곳은 대구광역시. KTX로 서울까지 고작 1시간 40분 거리다.
지방병원 폐업 줄줄이
아예 문을 닫는 경우도 잇따르고 있다. 경영난 악화와 계속되는 악재로 휘청대고 있는 중소병원의 행렬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최근 45년 역사의 마산 S산부인과는 경영상태가 나빠진 것을 견디지 못해 문을 닫았다.병원은 신마산 지점에 돌아온 1억3000만원을 갚지 못해 1차 부도 처리됐으며 이어 당좌수표 1억9000만원과 농협의 당좌수표 18억원을 결제하지 못해 결국 최종 부도 처리 됐다. 병원은 1970~80년대 마산수출자유지역과 한일합섬 창립 등 산업화에 힘입어 함께 성장했으나 2000년대 들어 급격히 줄기 시작한 저출산 추세에 밀려 임산부가 감소하면서 심각한 경영난을 겪어왔다.
부산의 H병원도 은행 대출금 등을 갚지 못해 운영을 포기했다. 병원은 메디컬센터를 짓기 위해 수십억원을 투자해 재정난에 시달리면서 부도설이 나돌았고 병원장이 대만으로 잠적하면서 결국 폐업에까지 이르게 됐다. 38병상 규모의 부산 사상구 주례동 J병원도 경영난을 이유로 휴업 신고를 한 뒤 문을 닫았다.
구미시도 비슷한 사례가 확인됐다. 시 관계자는 "인구 40만에 불과하고 대구서 1시간도 안 걸리는 도시에 300병상 이상 병원만 3개에 이르지만 특화된 경영을 하지 못해 경영난에 직면한 병원들이 있다"며 "자체 구조조정과 함께 친절교육 강화 등 지역밀착 경영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호남권인 광주광역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2006년 54곳, 2007년 75곳이 문을 닫은데 이어 올 들어 5월말 현재까지 폐업한 광주지역 병ㆍ의원은 무려 47곳으로 평년 수준을 크게 웃돌고 있다. 광주시가 각 구청 보건소가 파악한 자료를 집계한 결과 최근 2~3년 동안 광주에서만 모두 200여 곳의 의료기관이 경영난으로 자진 폐업한 것으로 나타났다.
광주시청 관계자는 “진료과목별로는 한방이 48곳으로 가장 많았고 일반외과가 32곳, 치과 25곳, 소아과 18곳, 산부인과 7곳 등의 순이었다. 심지어 성형외과도 5곳이나 문을 닫았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폐업 사태는 급변하는 의료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 찾아오는 환자만 받아왔던 지역 병의원들의 소극적 진료 행태와 출혈 경쟁이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지적이다.
광주시 보건소측은 “저소득층 진료에 무게를 뒀던 소규모 병·의원들은 물론 과거 상대적 우위를 차지했던 대형 병원들도 날이 갈수록 줄고 있는 환자들의 발길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최근 몇 년 사이 수도권 내 대형병원의 몸집 불리기는 확연해졌다. 덩치를 키우지 않는 병원들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정도다. 세브란스병원은 1000병상, 서울아산병원은 600병상, 삼성서울병원은 700병상, 가톨릭의료원은 1200병상을 신축, '규모의 경제'를 전사적으로 펼치고 있다. 내년에 증가하는 병상 수를 합치면 수도권 지역에만 4500병상, 오는 2010년까지는 무려 1만 병상 가까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그래서 '국내 최고, 최대'의 수식어는 수시로 엎치락뒤치락한다.
대신 지역 의료를 떠받들던 중소병원들의 현 주소는 '쓰나미'가 지나간 것 같다. 심지어 일부 과는 의사 기근현상이 장기화 되면서 아예 해당과 운영을 포기하는 사태까지 발생하고 있어 대형병원을 겨냥한 중소병원들의 원성은 그칠 줄 모른다. 정부 차원에서도 중소병원들을 급격한 충격에서 보호할 수 있는 장치는 미약했고, 지역별로 병상의 총량을 제한하는 '병상총량제' 등 규제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중소 병원들의 계속되는 부도와 도산의 주된 이유는 의료산업화와 의료시장 개방이라는 최근 추세 때문인 것으로 풀이 된다. 의약분업 이후 1차 의료기관인 동네 의원이나 3차 의료기관인 대학병원과 대형 종합병원으로 환자가 쏠리면서 2차 진료기관인 중간 규모 병원의 경영난이 가중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결국 중·소 병원들의 임금체불과 고용불안, 서민층 의료서비스의 질적 저하 및 양극화로 귀결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무너지는 중소병원… 기반 약한 지방병원
지금 병원계에서는 대형병원인 3차 기관과 동네병원인 1차 기관은 존재하지만 ‘허리’나 다름없는 중소병원인 2차 기관은 존재하지 않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 대형 병원의 환자 쏠림 현상이 가속화돼 중소병원이 몰락하고 대형병원과 개인의원으로 양분화되면서 의료계의 지각변동을 몰고 왔다. 중소병원들의 경영난, 환자 쏠림과 이로 인해 가중되는 적체 현상은 /동네의원들의 상대적 박탈감으로 이어지고 있다.
얼마 전 대한병원협회 수장에 선출된 신임 지훈상 회장이 취임 일성을 밝히는 자리에서 대형병원의 대명사격인 '세브란스 병원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집중 '공격'을 받아 진땀을 흘린 일이 있었다. 이는 지방 중소병원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다는 여실한 증거다.
실제로 이들의 불만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데 그 타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지난 2002년 이후 현재까지 3년 연속 도산율 10% 안팎이라는 불명예 속에 경영난은 악화일로의 길을 걷고 있다. 급기야 중소 병원들은 대형 병원들의 무분별한 병상 확충 규제를 위해 각 시도별 해당 지역 병원들의 총 병상 수를 제한해 달라고 정부에 강력히 요청하기도 했다. 물론 '약발'은 먹히지 않았다.
대형병원, 이젠 경기도 등 수도권으로 발길
이제는 대형병원들이 땅 구하기 어려운 서울을 피해 비교적 지역 의료 기반이 취약한 수도권 내 지방, 중소도시로 진격하고 있다. 수원 최초 대학병원으로 문을 열고 지역 환자를 위해 중추 기관으로 성장해 왔다고 자부해왔던 가톨릭대학교 성빈센트병원. 그러나 차영미 병원장은 "무차별 경쟁을 벌이는 대학 병원들이 최근 땅값이 싸고 부지 확보가 용이한 지방에 진입하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면서 "그나마 대학병원이라 위기감은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별다른 방어력이 없는 지방 중소병원들은 아마 더 큰 타격을 입고 있어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막강한 자본력을 가진 대형병원들은 지방 도시 한복판에 진출, 병원권 전체를 흔들어버린다. 그야말로 간호 인력난은 직격탄이다. 경북대학교 간호대학 서순림 학장은 "대구 경북지역의 간호사들이 수도권 대형병원으로 옮겨가고, 그 빈 자리에 지방의 중소병원 간호사가 연쇄 이동하고 있다"면서 "남아 있는 간호사는 격무에 시달리고 환자들은 불편을 겪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2년간 서울에서만 최소 약 5000명의 신규 간호사 수요가 발생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 과정에서 지방의 경력 간호사와 지방대학 출신 간호사들이 주거 환경과 대우가 좋은 수도권 대형병원으로 대거 이동했다.
병원간호사회 박광옥 회장은 "경영여건이 좋은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이 간호사 채용을 늘리면서 상대적으로 중소병원은 간호사 부족 사태에 직면하게 됐다"고 말했다. 중소병원의 85%가 입원료가 깎이는 최하 등급인 7등급에 해당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정부가 오는 7월부터 시행하는 노인장기요양보험을 위해 전국 178개 관리운영센터 등에서 1028명의 간호사를 새로 채용했다. 낮 근무만 하는 정부 기관이라는 조건 때문에 기존 간호사들이 이곳으로 대거 몰렸다.
대형병원 진출 규제보다 중소병원 자생력 시급
하지만 대형병원의 병상 확충이 지방 중소병원들의 몰락을 가속화하고 타격을 입힌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한국 의료의 현대화, 대형화는 거스를 수 없는 추세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서울아산병원 박광옥 간호본부장은 "대형화로 가고 있다"면서 "규제를 통해 대형병원의 병상 확충을 제한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중소 병원이 특화해 균형 발전할 수 있는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형 병원들의 초대형화 흐름에는 상당 부분 긍정적 효과가 녹아 있다. 다양한 수익 사업을 펼치기도 하고, 병원 프랜차이즈 확대와 병원 지주회사도 꿈꾼다. 대규모 투자로 의료 수준의 발전과 향상이 예상되고 서비스의 업그레이드는 한층 가속화될 것이다. 환자 만족도는 높아지고 의료 시장 개방에 대비한 국가 경쟁력 확보 등 보이지 않는 이점 역시 속속 발견될 것이다.
가톨릭대학교 강남성모병원 한 교수는 "자유경제체제에서 자본의 역외 유출은 대형병원에만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대형병원이라고 해서 또 모두 경쟁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면서 "지역 전체 의료의 마스터 플랜을 만들어 여러 의료기관들의 공존을 모색해야지 중소병원을 보호하기 위해 대형병원을 규제하는 것은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병원협회 관계자는 "병·의원 간 기능 세분화가 안돼 있고 되도록 큰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자 하는 국민정서도 중소 병·의원 경영난의 원인"이라며 아울러 "의사들도 포화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세밀한 경영전략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심장혈관전문병원 세종병원 이태현 병원장은 "잇따르는 중소병원 폐업이 침체된 경제와 경영 능력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병원들이 대형 병원들의 확장으로 전문병원을 제외하곤 설 곳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소도시의 종합병원들이 경영에 어려움을 겪는 만큼 정부에서는 중소도시 종합병원 지원책을 마련해 주민들이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할 것" 이라고 강조했다.
http://www.dailymedi.com/news/opdb/index.php?cmd=view&dbt=article&code=93754&cate=class2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오프라인 6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출처 : 데일리메디 정숙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