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난에 대한 격려와 권고
성경
천 영 대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2~39)」
고난을 참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장래에는 말할 것도 없고, 현재 이 땅에서도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주 예수님을 믿고 그의 역사를 따라 사는 생활은 이 땅에서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세상에서 중히 여겨지는 것들을 해로 여기고 하늘에 속한 것들을 사모하며 사는 생활이며,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생활이다. 마태복음 16장 24, 25절에서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한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생활은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고 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피하고 싫어한다. 베드로전서 4장 12∼16절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워해야 한다.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 등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아서는 안 되지만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을 때는 부끄러워하는 대신에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빌립보서 1장 29, 30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은혜를 주신 목적은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그를 믿을 수 있고, 또 그를 위해 고난도 받을 수 있다. 우리 자신으로는 주님을 믿을 수도 없고, 또 그를 위해 고난도 받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로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고(엡 2:8), 또 그를 위해 고난도 받을 수 있다. 요한계시록 1장 9절에서는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 사도는 예수님 안에서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했다고 했다. 사도는 자신 독자적으로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지 않고, 예수님 안, 곧 은혜 안에서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할 수 있었다고 했다. 히브리서 10장 32, 33절에서는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라고 했다. 히브리 믿는 자들은 그 당시의 대제사장과 유대교도들로부터 많은 멸시와 천대와 고난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들 중의 얼마는 그들이 나왔던 유대교로 돌아간 자들도 있었고, 또 얼마는 유대교도로 돌아가야 하나, 그렇지 않아야 하나하고 망설이거나, 갈등하는 가운데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처음 주님을 믿고 유대교에서 나온 때로부터 유대교도들에게서 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았다. 고난의 큰 싸움을 참았고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것은 모두 주님의 은혜였다. 그런데 고난의 싸움과 비방과 환난으로서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오래 지속됨으로 그들의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주님과 우리의 대적자요, 원수인 마귀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 믿는 자들은 주님을 믿고 빛을 받은 후에 그의 은혜로 고난의 큰 싸움도, 다른 어떤 핍박도 감당할 수 있었다.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음
사람들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을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중히 여기면서 그러한 것들을 취하기 위해 불철주야 수고하고 애쓴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 것들은 영구한 것도 아니고 진정으로 우리를 유익하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땅에 있는 것, 세상에 속한 것, 우리 주님을 대적하는 것들을 중히 여기고 따라가는 자가 아니고, 하늘에 속한 것, 곧 주님께 속한 것을 중히 여기며 따라가는 자들이다. 하늘에 있는 것, 주님께 속한 것들은 영구하며, 또한 세상에 있는 것들의 실제이다. 고린도후서 4장 16∼18절에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했다. 우리의 겉사람은 후패하지만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다고 했다. 우리는 잠시 경한 환난을 받지만 이로 인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어내게 한다고 했다. 우리가 관심하고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들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땅에 있는 것, 세상에 속한 것들은 우리 주님께 속한 것,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고 예비하신 것들과는 비교가 되지 아니할 정도로 저급하다. 베드로전서 1장 3, 4절에서는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그 긍휼의 풍성하심을 따라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갖게 하셨고, 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얻게 하셨는데, 그것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해 하늘에 간직하셨다고 했다. 이것은 참으로 놀랍고도 복된 것이다. 히브리서 9장 15절에서는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들)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다. 주님께서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들을 속하기 위해 죽으심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셨다고 했는데, 히브리서 10장 34절에서는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줄 앎이라(히10:34)”고 했다. 히브리 믿는 자들은 유대교로부터 많은 고난과 핍박을 당했고 비난과 환난으로써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고 혹 그들과 같은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기도 하고, 또 그들은 갇힌 자들을 동정하고 그들의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꺼이 당했다. 그들이 그렇게 했던 것은 땅에 속한 산업 대신에 하늘에 속한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의 경우도 그러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서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했다. 주 예수님께서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함으로 영광스럽게 되셨다. 빌립보서 2장 5∼11절에서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했다. 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고, 모든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게 하셨다. 주 예수님께서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셨고 또,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이셨다. 사도 또한 놀라운 상급을 얻기 위해 세상에서 중히 여겨졌던 것들,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기꺼이 버리고 주님과 영원한 상급을 위해 힘을 다해 달려갔다(빌 3:12∼14).
인내가 필요함
주님께서는 그의 경륜 가운데서 여러 가지 약속을 하셨다. 그런데 그 약속의 성취는 주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루신다. 주님은 신실하신 분으로서 그가 약속하신 바를 분명히 이루신다. 그런데 그 약속의 성취는 주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루시므로 우리는 그때까지 참아 기다려야 한다. 이때에 필요한 것이 인내다. 약속은 받았지만 약속의 성취는 정한 때에 이뤄지기 때문에 그때까지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과 핍박이 있다할지라도 인내로 참아 기다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 여러 가지 이유로 중도에 포기해 버리면 약속은 받았지만 약속의 성취는 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약속하신 바를 분명히 이루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히브리서 10장 36절에서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 ‘약속’이라고 한 것은 ‘약속의 성취’를 말한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의 성취를 체험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그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참아 기다려야한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서는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고 했다. 주님을 믿는 자들의 생활은 믿음의 경주를 하는 생활이다. 고린도전서 9장 24∼27절에서는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했다. 사도는 달음질을 하는데 향방이 없는 것처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도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달린다고 했다. 빌립보서 3장 12∼14절에서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다. 사도는 푯대를 향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을 위해 좇아간다고 했다. 이렇게 사도는 계속해서 푯대를 향해 달려갔다. 디모데후서 4장 6, 7절에서는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했다. 사도는 죽음의 직전에 이르러서 그가 달려가야 할 길을 마쳤다고 했다. 이렇게 사도의 신앙생활은 믿음으로 달려가는, 믿음의 경주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시 동안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야 하는 믿음의 경주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로써 그 경주를 해야 한다. 인내하지 않는다면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할 수 없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하여 상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고난이나, 슬픔이나, 억울함도 참고 견디는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가 있어야만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다. 야고보서 5장 7∼11절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고 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삶
유대교도들은 히브리 믿는 이들을 심하게 핍박하고 고통스럽게 했다. 그들은 율법이나 그 행위를 중요시하는 가운데서(물론, 다른 것들도 중요시함) 그렇지 아니한 히브리 믿는 이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핍박하고 괴롭게 했다. 주님께서 육체를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으로부터 해방을 시켜주었지만 그들은 이것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아니하는 가운데서 히브리 믿는 자들을 가혹하게 핍박하고 못살게 했다. 그런데 히브리인이나, 이방인이나 믿는 자들의 생활은 율법의 생활이 아니고 믿음의 생활이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고 했다. 하박국 2장 4절에서는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다. 율법 시대의 선지자인 하박국도 의인은 율법의 선한 행위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 믿음으로 산다고 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서는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도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했고,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나왔던 유대교로 돌아가면 주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다. 고린도후서 4장 13절에서는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따라 말하지 않고 믿는 고로 말한다고 했다. 고린도후서 5장 7절에서는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한다고 했다. 이렇게 주님을 믿는 자들의 생활은 믿음으로 말하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믿음이 있어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도 믿음을 중히 여기시고, 또 기뻐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자가 하나님께 순종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1장 5절에서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라고 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주님을 대적하고 불순종하지만, 주님을 믿는 자들은 주님께 순종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그의 뜻을 이룬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서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한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순종하여 나아갔다고 했다. 이렇게도 믿음은 대단한 것이다.
영혼의 구원을 얻음
주님께서는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10:38)’고 했다. 주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자라고 했고, 유대교로 돌아간다면 그 마음이 기뻐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들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다시 율법으로 돌아간다면 주님의 죽으심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주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했다. 히브리서 10장 39절에서는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을 말했는데 이것은 영혼을 잃지 않고 얻는 것을 말한다. 마태복음 16장 24, 25절에서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했다. 이 내용에서는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고, 주님을 위해 제 목숨을 잃으면 찾는다고 했는데, 이 구절의 목숨은 (영)혼 생명을 말한다. 주님을 위해 자신의 혼 생명을 잃으면 찾는다고 하는 것은, 주님을 위해 자신의 혼 생명을 잃으면 혼 생명을 얻는 것으로, 곧 혼을 구원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믿는 자가 영의 구원을 얻는 것과 같은 일반적인 구원이 아니고 주님을 위해 자신의 혼 생명을 잃으므로 혼 생명을 얻는 것으로써 특별한 것이다. 이것은 주님을 위해 혼 생명을 잃음으로 얻는 보상 혹은 상급이다. 믿음으로 주님께 순종하여 어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굽은 길을 가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만을 추구하고 사랑하고, 섬기며 주님의 길을 가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이뤄질 것이다. 즉,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영)혼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영)혼의 구원을 얻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이기는 자들에게 주시는 보상이 될 것이다(히10:35). 주님께서는 사도를 통해 히브리 믿는 이들이 비록 많은 환난과 핍박을 받을지라도 뒤로 물러가지 말고 (율법이나, 유대교로 돌아가지 말고), 주님만 추구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푯대이신 주님을 향해 달려간다면 혼이 구원받는 상급을 받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영)혼의 구원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고 사도 바울과 같이 이기는 신앙생활을 한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보상이다. 고린도전서 9장 24절에서는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