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처럼 딱 달라 붙어서 좀 처럼 물러 갈 것 같지 않던 무더위가 언제 그랬냐는듯 사그러 들고, 바다를 거꾸로 매달은 듯 끝없이 파란 하늘이 높게 펼쳐져 있습니다.
더위에 약한 나는 쉴새없이 흘러 내리는 땀과 씨름하면서도 지난 8월에는 3일, 2일간 두차례로 나누어 휴가를 아주 유쾌하게 지냈습니다. 부부동반으로 2차에 걸쳐 휴가를 즐긴 덕분에 마누라로부터 점수 좀 따고 가을과 추석 명절을 느긋하게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금년에는 지난 5월부터 지난 달까지 예년에 비해 유난히 친구들과 단체로 몰려 다니며 즐길 기회가 많아서 행복한 비명을 질렀지만, 발가벗고 여름을 즐긴 후유증으로 화려함 뒤에 앙금처럼 남는 다소의 허전함과 정서적 고갈을 느끼고 있습니다.
7월부터 마케팅본부장에서 영업본부장으로 직책을 변경한 후 3개월에 걸쳐 전국에 산재한 200여 공구상 고객들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지역에 따라 농도는 다르지만 매출 감소로 의기소침한 고객들이 대부분이어서 소경영 자영업자들이 겪고 있는 경제적 심각성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건설 산업은 바닥을 긁고 있는지 제법 오래되어 전동공구, 수공구 등 공구유통업계 전체의 침체 상태는 오래 지속되었지만, 자동차, 조선 등 철을 깎고 자르는 절삭 공구분야는 지난 2년간의 좋은 흐름이 급격한 환경 변화로 금년도에는 바닥으로 가라 앉고 있었습니다.
공구유통업이 산업계의 밑바닥을 받치고 있어 공구유통업에 종사하는 자영업자들의 삶은 서민들의 삶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공구상 점원 또는 공장 기능공으로 시작하여 공구상 자영업자로, 어엿한 사업체 사장으로 성공한 이들은 자존감이 아주 강합니다. 개업한지 2-3년 초보 사장들은 처음 겪는 불황에 노심초사하기도 하지만, 10-20년 넘은 베테랑 사장들은 호황과 불황의 그네타기에 익숙하여 이번 불황도 넘어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잃지 않고 있으면서도, 일본 처럼 장기화 가능성이 있다는
언론의 구조적 장기 불황 주장에 상당히 긴장하는 모습이었습니다.
1997년도 LG전동공구 사업부에 자원하여 영업부장과 사업부장으로서 공구상들을 찾아 다니던 시절은 IMF 경제위기로 국가적 부도에 몰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산업계의 구조조정이 붐을 이루고 공구업계도 자고 나면 부도로 사라지는 업체가 많아 채권 관리에 비상이 걸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어려움을 딛고 지금까지 살아 남은 공구상들은 이제 1세대 시절을 마감하고 2세에게 사업을 물려 주는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70년대 우리나라의 산업화 시작부터 90년대 초까지 공구 공급부족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한 공구유통상들은 90년대말 IMF 위기와 2008-2009년 미국 리먼사태로 인한 국제 금융위기, 유럽 국가 재정 위기에서 비롯된 세계적인 금융 위기 등 3단계 경제적 위기상황을 겪으며 거품을 걷어낸 합리적인 경영으로 단단해지기는 하였으나, 공구상들도 대형점과 중소형점으로 양극화 되었고, LG, 삼성, 코오롱 등 대기업 MRO 업체들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번에 만나 본 공구상들은 호랑이 담배 먹던 호시절은 이제 다 지나고 생존을 위한 가쁜 숨만 쉬게 되었다는 부정적 시각이 많았습니다. 공구유통업계 역시 생태계 변화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공구상들은 도태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무더위 속에서 진땀을 흘리며 공구상들과의 만남을 지속하던 나는 이들의 삶이 솔직히 부러워졌습니다. 비록 판매부진으로 위기를 겪고 있으나, 상품에 정통하고 시장을 꿰뚫며 저마다의 영역에 뿌리를 강하게 박고 삶의 터전을 일구어 온 공구상 사장들이 존경스러웠습니다. 조만간 월급여 생활을 청산해야 하는 나로서는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으므로 이들 자영업자의 위치가 새삼스럽게 부러움으로 다가 왔습니다.
요즘 처럼 경제적 환경이 어려운 상황에선 월급쟁이가 부럽다는 자영업자들이 적지 않지만, 직장 생활 초기 단계에서 결코 후회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지금까지 버텨 왔슴에도 불구하고, 일가를 이룬 자영업자들이 부럽다는 생각은 숨길 수 없는
솔직한 심정입니다.
학교 졸업후 전력투구한 30년 손익계산을 하다 보면 진땀 나는 것이 대부분의 월급쟁이들이겠지요. 부장 시절에 사직하고 급여 생활을 청산하려던 후배에게 급여 생활도 스마트하게 살아 갈 수 있다는 나의 조언으로 사직 의사를 철회하고
지금은 대기업 임원으로 성공한 후배는 지금 쯤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합니다.
그도 나처럼 퇴직을 앞둔 시기가 되었으니 다른 길을 선택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지 한번 물어 볼 작정입니다.
LG 부회장으로 퇴직하신 존경하는 경영자 한 분도 퇴직후 모임에서 자영업자들이 부럽다는 얘기를 서슴없이 하여 나의 원성을 산적이 있었으니, 나의 이런 푸념이 크게 비난 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페이스북에서 명쾌하게 상인의 길을 설파하는 뉴욕의 성공한 사업가 고교 동창 송신철이 <상인의 길>을 제목으로 하는 책을 발간했다고 하니 한번 읽어 보고, 새로운 삶을 어떻게 개척할지 배워 볼 생각입니다.
<商才란 상업의 재능을 말하는 것으로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고 타고 나야 한다>
<業이란 하늘에서 부여 받는 것이고, 職이란 직책으로 업을 나누어 맡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살아 가는데 먹는 것을 구하는 길은 대체로 業과 職 두가지로 나누어진다>
송사장이 페이스북에 명쾌하게 정리한 상인과 월급쟁이를 구분한 글입니다.
직책으로 30년을 먹고 산 내가 새로운 삶으로 상인의 길을 도모한다면, 하늘이 주시지 않은 재능을 탐하는 욕심꾸러기가 되는지 몹시 궁금해집니다.
새 삶을 꿈꾸기 전에 휴가로 충전한 몸과 마음을 잘 활용해서 직장인의 귀감이 되는 길을 찾아 보는 것이 나에게 당장 주어진 과제임은 틀림 없겠지요.
2012년9월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