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엄마 따라 교회를 다녔던 나는 뭐든 열심이었다. 기도원까지도 부지런히 따라 다녔다. 그러다 엄마는 자신을 전도했던 집사님에게 큰 배신을 당했고 그 상심으로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나 역시 그 무렵 주일학교 선생님한테 큰 실망을 했던 터라 엄마와 함께 자연스레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교회로부터 멀어지고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나는 남편을 만나 다시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남편이 좀 더 교회에 열심이었다. 그래서일까. 남편 바짓가랑이만 붙들고 따라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구원받겠지, 천국에 이르겠지 하고 막연히 기대하면서 신앙생활에 그다지 열심 내지 않았다. 여기에는 아쉬울 게 별로 없던 삶도 한몫했다. 그렇게 삶에 나름 만족하며 10년 여를 보냈다.
“엄마, 은혜받아야 해”
난임으로 결혼 10년 만에 아이를 낳은 후 마땅히 맡길 곳이 없어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을 퇴사하고 말았다. 게다가 남편이 부산으로 발령이 나서 홀로 육아를 감당했다. 그에 더해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이 폭풍처럼 덮쳐들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안온한 삶을 영위하던 내게 극도의 우울증이 찾아왔다. 내적 좌절, 허무감, 고통 가운데 사로잡혀 삶의 의지를 상실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 문득 여태껏 경험하지 못했던 신을 만나고 싶은 간절함이 생겼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하나님이 계시는지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교회는 한 달에 한 번 수양관에서 정기적인 신유집회를 열었다. 주일마다 주보에 광고가 나왔지만 평소엔 주의 깊게 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 광고가 이날따라 내 눈에 띄었다. 평소 성경공부에 열중하고 간절히 울며 기도하던 남편 모습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았다. 어디든 찾아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2009년, 아들이 다섯 살 때였다. 당시 지금의 코로나19 사태처럼 신종플루라는 전염병이 유행했다. 유명 연예인의 일곱 살 아들도 신종플루로 사망했을 정도로 온 국민이 지금처럼 긴장하던 시기였다. 기도원 집회가 있던 날 수양관으로 가려고 아이를 카시트에 태우자, 갑자기 엄청난 양의 구토를 시작했다. 열이 39도까지 치솟았다. 집에서 씻기고 나서 카시트에 다시 앉혔는데 구토는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괴로워하던 아들이 그때, 설핏 한마디를 던졌다.
“엄마, 가서 은혜받아야 해.”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한 결기가 생겼다. ‘이게 혹시 악한 세력의 방해인가? 사탄이 하나님을 못 만나게 막는 건가? 그렇다면 그냥 물러설 수는 없어.’ 그렇게 아이와 함께 출발했다. 요즘의 코로나19 사태였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고 무모한 짓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집회 장소에 도착하자 아이의 열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는 게 아닌가.
극적인 기쁨 뒤 극한의 고통
집회는 3박 4일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설교와 기도, 그리고 아픈 이들에게 안수하는 순서가 대부분이었다. 첫 날, 둘째 날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실망스러웠다. 집으로 돌아가면 교회도 나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지루한 시간을 억지로 참았다. 그리고 마지막 날 저녁 설교 시간이 다가왔다. 설교자의 메시지가 이상한 강렬함으로 와 닿았다. “예수는 하나님의 기쁨이고, 그 기쁨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이 한 말씀,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 ‘기쁨’이라는 단어가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충격이었다. ‘나는 지금 너무나 슬프고 고통스러운데 왜 기쁨이란 단어가 이토록 깊이 와 닿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설교가 끝나고 회개기도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나 나는 어릴 적 기억까지 끌어와 잘못한 일들을 떠올리며 억지로 쥐어짜도 5분을 넘기지 못했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고 다 누구누구 때문이야’라는 원망만 나오고 도무지 회개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기도했다. ‘저의 죄가 뭔지 떠오르게 해주세요.’ 그러자 잠시 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미움, 아니 증오의 대상들이 떠올랐다. 동시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무엇보다도 삶을 놓아버리려 했던 내 자신이 주님 앞에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다.
오랜 시간 울며 기도했다. 정말이지 평생 흘릴 눈물을 모두 쏟은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울었을 때, 한 음성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너무 놀란 탓에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상하고 생소한 경험이었다. 하나님의 기쁨은 예수님 차지 아니었나.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신다고? 이해되지 않았지만 황홀했다.
그때부터 나의 본격적인 신앙생활이 시작되었다. 성경공부 모임에 열심히 나갔고, 아이를 데리고 기도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봉사, 전도 등 교회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헌신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다. 그 모든 열심의 목적은 내가 주님의 기쁨이 되기 위함이었다.
그러다 2016년, 신앙생활에 커다란 위기가 찾아왔다. 내가 다니는 교회는 전성기 시절 몇 만 명이 출석할 정도의 초대형 교회였다. 그러나 담임목사의 성폭행, 성추행 사실이 담긴 이른바 ‘X파일’과 재정 비리가 공개되어 교회 분열을 맞았다. 그 결과 2017년 3월 초엔 교인수가 8천여 명으로 감소했다. 교회는 담임목사에 반대하는 개혁 성향의 교인 6천여 명과, 그를 여전히 지지하는 교인 2천여 명으로 양분된 채 분열과 대립이 계속되었다.
2016년, 나는 기도를 해주겠다며 과도한 스킨십을 시도한 담임목사를 고소했다. 당시엔 기도를 빙자한 추행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성추행이었다. 방송 뉴스를 통해 담임목사의 실명이 거론되며 성추행 사실이 폭로되었다. 경찰에서 기소의견으로 넘겨져 담임목사의 처벌을 자신했던 사건은 검사의 이해하기 어려운 수사로 불기소 처분을 받고 말았다. 1년여 간의 피 말리는 법정 싸움으로 내 영혼은 황폐해졌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고, 담임목사를 지지하는 이들로부터 살해 위협까지 받았다. 교회를 오갈 때마다 조롱과 야유를 들어야 하는 건 덤이었다.
상처 입은 치유자로 일어서기까지
미투 사건의 대부분은 가해자를 비난하며 피해자를 긍휼히 여긴다. 하지만 교회 내 성폭력을 폭로한 미투는 다르다. 가해자를 두둔하며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분위기다. 악을 미워하고 공의를 행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악한 자를 두둔하는 아픈 현실이다. 게다가 수사기관은 남성 중심의 성인지, 종교기관에 대한 이해 부족 등으로 교회 내 권력형 성범죄에 세밀한 접근을 하지 못했다.
매일 매순간이 지옥이었다. 심장 박동 소리가 끊임없이 귀에 들려올 정도였고 통증으로 괴로웠다. 기도도 나오지 않고 말씀도 들리지 않았다.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했다. ‘그때 들었던 음성은 대체 뭐였나요? 왜 하필 저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기도원에서 경험한 그 기쁨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그분은 분명 나를 기뻐하신다고 하셨건만, 당시의 나는 하나님이 전혀 기쁘지 않고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하나님은 그냥 하늘의 경찰관 같았다. ‘주님, 잠깐만 눈감아주시면 안 될까요? 저 좀 제 의지대로, 마음대로 살게 내버려 두세요.’
그때 나는 생각했다. 지난 날, 철저히 기쁨이 탈색된 상황에서 ‘기쁨’이라는 단어가 내 가슴 속 깊이 울렸던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나는 하나님과의 동행에 충실하지 못했다.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던 남편을 나무랐고, 직장생활에서 오는 성취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런 나를 기뻐하신다고 했을까? 하나님을 꼭 한번 만나보겠다는 간절함 때문이었을까? 아님 진정 어린 회개의 결과였을까? 그 이유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 이후로는 정말 그분의 기쁨이 되려고 착실히 신앙생활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더 의문이었다. 그런데 왜, 내가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 걸까?
절망과 비탄의 질문만 남은 내게 교계 목회자들은 ‘기독교위드유센터’ 설립 참여 제안을 했다. 센터의 설립 취지는 ‘미투 운동’에 ‘위드유’(#with you)로 응답할 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예방하는 통합적 젠더의식을 교육하고 다문화가정 및 탈북이주민을 지원하는 사회통합 사업을 펴나가고 함께 연대하자는 것이었다. 처음엔 화가 났다. 내 상처도 아물지 않았는데 대체 누구를 돕는단 말인가? 그러나 주변의 끈질긴 설득과 도움에 힘입어 어렵게나마 설립 과정에 뛰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시련은 멈추지 않았다. 설립 3개월이 될 즈음, 센터 설립과 운영 과정에 내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느낀 고통과 절망은 더 말해 무엇할까. 그럼에도 이대로 누워 있을 수만은 없다는 자각이 나를 붙들었다.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후원자들에게 차마 그만두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후 교계 여성단체, 사회단체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도움을 구했고, 함께 연대할 것을 요청하고 다녔다. 다행히 지금은 조금씩 회복해가면서, 교회 내 성폭력으로 상처받은 피해자들의 상담과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해나가고 있다. 내 고통을 위무하고 교계 상황을 잘 알고 도와준 이사님들을 만난 덕분이다.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삶
기독교위드유센터 사역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많은 고난과 아픔이 따라왔다. 그 과정에서 수시로 왜 하필 나였냐면서 펑펑 울며 기도했다. 울음이 쌓이고 쌓이던 어느 날이었다. 그토록 오래 침묵하시던 하나님이 내 영혼 깊은 곳에서 말씀하셨다.
‘내가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며 죽어갈 때, 열한 제자들은 문빗장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다. 그러나 나와 함께한 여인들은 무덤까지 함께했다. 그래서 영광스런 부활의 첫 소식을 전하는 일에 부름받은 건 그녀들이었다. 앞으로도 이와 같이….’
그 순간,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기쁨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었다. 주님은 연약한 자들, 그러면서 주님의 고난에 끝까지 함께하는 자들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내 신앙생활을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절망과 상실, 고통과 실패 가운데서 내게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이며 무가치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분별하기 시작했다.
내게 닥쳐온 어려운 일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이지만 기쁨이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셔서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 바탕에는 내가 가는 길을 그분이 지지해주신다는 무의식적인 안정감이 있다. 솔직히 내 삶의 이야기를 하기가 여전히 부담스럽다. 그러나 지금도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모든 상황과 사건 속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토록 역사하신다고 믿기에 조심스레 용기를 내어본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 주님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을까? 내가 추구하는 모든 일이 실패로 돌아가도 기뻐할 수 있을까? 온전히 자신할 수는 없다. 이런 질문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을 헤집지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무능력하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마음이 평안해진다. 그리고 그때에야 바로소 모든 게 가능하다는 믿음이 스며든다. 그리하여 좌절, 허무감, 고통, 현실의 가혹함 속에서도 주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희망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거듭해나갈 수 있다.
그렇기에 모든 면에서 부족한 나는 오늘도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육체의 것으로 기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삶을 살게 도와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