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갑오년 신년특집으로 ‘종교와 정치, 올바른 관계를 묻다’란 주제의 대담을 진행하고자 한다. 지난해 말 현 정권의 행보에 반기를 들며, 종교계에서 일제히 비판적 정치참여 활동을 벌인 것에 전 국민의 관심이 쏠린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의 정치참여 활동을 두고는 국민들 뿐만 아니라 종교계 내에서 조차 여전히 그 활동의 폭이나 깊이를 둘러싸고는 이견이 있는 게 사실이다. 또 한국사회 내 특정 정치 아젠다와 연계해 종교 집단 내 진보와 보수가 이념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러한 소모적 성격의 종교 집단 내 대립은 각 종교에 몸 담고 있는 종교인들을 지치게 하며, 때론 갈등마저 유발하게 한다. 이번 대담에서는 ‘종교가 우리사회의 보편적 가치인 도덕성과 공동체성을 보존하고, 이를 발전시키는 것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종교가 정치와 어떤 관계를 맺고 나아가야 하는지를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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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본지 편집고문)를 최근 그가 지내고 있는 경기도 소사에 있는 자택에서 만났다. |
- 종교의 정치 참여를 본격적으로 논하기 전에 먼저 히틀러 나치 정권 시대 정치 투쟁을 벌인 저항의 신학자 본회퍼를 조명해 보는 일은 유의미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행동하는 신앙인이라는 별칭이 붙은 그의 정치 참여 행위를 우리는 정치적 행동으로 평가하는 게 옳을까요? 아니면 신앙의 행동으로 평가하는 게 옳을까요?
“본회퍼는 사실 신학적으로 그렇게 진보적인 사람은 아니에요. 독일의 기독교 전통 중에는 장로교 전통과 루터교 전통이 쌍벽을 이룹니다. 본회퍼는 철두철미하게 루터교 입장에서 보수적 입장을 많이 취했어요. 보수적이라기 보다 정통 루터교 테두리 안에서 신학을 한 사람이었다는 말이죠. 장로교 전통과 루터교 전통은 정치와 종교 문제를 다루는 입장이 서로 분명했습니다. 루터교 입장은 두 왕국론이라는 사상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머리라고 가정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치리하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오른손, 즉 종교이고 다른 하는 왼속, 즉 정치라는 것입니다.
이 종교와 정치가 서로 상관관계를 가지면서 종국에는 하나님 나라라는 목표 실현을 위해 협력하여 일을 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이를 잘못 이해하거나 오해한 루터교 신자들 중에는 ‘종교는 정치와는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요. ‘두 왕국론’이란 이름이 붙여져서인지 이런 오해가 발생하는데 루터가 실제로 얘기하고 싶은 바는 왕국의 실재론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었어요.
루터 신학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치와 종교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거든요. 오른손과 왼손이 기능은 다를찌라도 한 지체이기에 떼어질 수 없듯이 말이죠. 종교와 정치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기에 종교적 행동이 때론 정치적 행동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또 정치적 행동이 때론 종교적 행동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정치와 종교의 관계를 상호 협력하고, 상호 대립하는 것으로 파악을 했어요. 만약 왼손 정치가 잘못되면 오른손 종교를 이용해서 수정할 수 있게하고, 또 오른손 종교가 잘못하면 왼손 정치에 종교 본연의 자리로 되돌릴 책임을 주었던 말이죠. 종교와 정치가 상호 보완적이면서 상호 대립하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본회퍼 활동 당시 히틀러 같은 독재자는 교회의 얘기를 귀담아 듣지 않았고, 전쟁 범죄를 통해 인권을 침해하지 않았습니까? 종교는 잘못된 정치에 대해 책임있는 자세를 취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오랜 전통의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경우는 ‘폭군은 교회가 살해해야 한다’고까지 얘기했거든요. 그 전통에 서서 본회퍼가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 저항을 한 것입니다.
혹자는 본회퍼가 어떤 정치단체, 즉 암살단에 속해 있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하면서 신앙 행동과는 구분된 다른 정치적 목적의 활동이라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저는 본회퍼가 암살단에 가입하면서까지 투쟁을 벌인 근거는 신앙적 동기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의 목표가 정권을 잡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독재자를 제거하려 했던 종교적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치와 종교의 관계를 자꾸 떼어놓으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봐요. 그래서 루터는 정치와 종교는 (기능적인 면에서)구별은 된다고 하면서 종교가 말씀으로 교화해서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반면, 정치는 칼, 즉 무력으로 악인을 제거하며 세상을 평화롭게 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종교 지도자들이 부패한 정치에 항거해야 할 책임이 있는 파수꾼이라고 봤어요. 구약의 이사야서를 보면 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개라는 것은 주인을 대신해서 도둑놈이 오면 짖어서 도둑놈이 제 할일을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에요. 이사야서는 이 개를 당시 성직자로 비유했거든요. 왜냐하면 성직자들이 응당 부정, 부패한 정치 권력 앞에 짖어대고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야 하는데 배부른 개처럼 도둑이 와도 짖을 생각은 않고, 먹을 것만 탐한다는 지적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런데 요즘 한국의 가톨릭 교회에는 종교와 정치와의 관계를 놓고 일대 혼란이 빚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염수정 대주교라는 사람이 보수 매체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이 사람이 가톨릭 전통과는 좀 동떨어진 보수적 입장을 자꾸 내놓아 논란이 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염 주교의 입장이 가톨릭 전통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있다고 봐요. 그 전통을 현재로서 잘 따르려고 하는 사람이 현재의 교황이라고 봅니다. 이번에 새로 뽑힌 교황은 라틴 아메리카의 고통 받는 사람들의 경험이 있기에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바른 비판을 갖고 있잖아요. 교회가 잘못된 사회에 대해서 발언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배부른 개처럼 짖지는 않고 하품이나 하고 졸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나라 교회 지도자들도 보면 대부분 감투나 돈이나 탐하고,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무관심한 것 같아요. 지도자라는 목사들이 계속 청와대를 기웃거리며 얻어 먹을게 없나 하고 배회하고 말이죠. 故 강원용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런 말을 하셨어요. “지도자라는 것들이 말이야 밤낮 청와대에서 불러주기만 기다리고 들어가서 봉투나 얻어갖고 나오고 큰일 났다”고요. 그런 점에서 가톨릭 박창신 신부가 종교의 정치 참여 행위를 시작한 것이 가톨릭계 내에서도 종교와 정치의 올바른 관계 정립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계기가 되질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 정치가 올바르게 치리되지 않고, 국민들을 해치고 부정의하게 이뤄질 때 종교는 파수꾼의 역할로 마땅히 개 처럼 짖어야 하는 부분이 있다고 보는데 그런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정치에 유착해 배부른 개가 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내세지향적으로 경도된 신앙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결국 신앙의 내면화 작업에만 치우쳐 속세의 문제들을 더럽고, 천한 것으로만 취급하고 천국행(行) 열차를 타기에만 급급한 신앙 양태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정치 참여에 무관심 하게 하는 동인으로도 보이는 이런 신앙의 자세를 어떻게 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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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규태 명예교수는 요즘 사회에 만연한 공로주의, 업적주의에 관해 깊은 성찰의 필요성을 제기했으며 동시에 싸구려 믿음(cheap grace)에 안주하여 성숙한 신앙으로 발돋움 못하고 있는 한국교회 현실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지적했다. |
“복음서에 보면 하나님 나라도 마태복음서에는 하늘 나라라고 표기되어 있어요. 예수의 활동이 굉장히 현실적인 삶을 지향했던 것인데 그것을 자꾸 내세지향적이라고 할까, 탈정치적이라 할까, 탈현실적이라 할까 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데 이것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라고 봅니다. 예수는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면서 우리의 삶을 얘기하고 있는데 바울은 십자가를 질 필요는 없고, 다만 십자가를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을 하잖아요. 소위 바울의 이신칭의가 있질 않습니까?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된다는 것이에요. 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믿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거든요.
루터 역시 이런 바울의 전통에 입각해서 ‘오직 믿음으로만’을 구호로 외치기도 했지만, 이는 가톨릭 교회가 당시 타락했기에 그에 대한 반동적 성격으로 외친 구호였었죠. 당시 가톨릭 교회 정서는 물질만 바치면, 면죄부를 받기만 하면 천당간다는 것이잖아요. 이런 물질주의를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공로주의, 업적주의라고 할 수 있겠는데 돈 많은 사람은 많이 헌금을 하여 천당가는 티켓을 산다는 것 아니겠어요? 사람 마음의 변화 유무는 중요하지 않고 물질만 내면 된다는 거잖아요. 그런 것에 반대하기 위해서 ‘믿음으로만’을 강조한 것이 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추상화되고 내세화되는 경향으로 나타나면서 부작용이 생긴 것이죠.
본회퍼는 루터교 전통에서 ‘오직 믿음으로’의 구호의 부작용으로 생기는 믿음을 싸구려 믿음(cheap grace)이라고 비판 했잖아요. 헌신도 안하고, 노동도 안하고 그저 값싼 믿음을 구하는 신앙에 대해 잘못된 것이라고 꼬집는 것이거든요. ‘오직 믿음으로’의 구호가 나오게 된 시대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일이 중요한데 요새 말로 얘기해 본다면 학교 가서 공부못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회사가서 업적 못내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때문에 공로를 내지 못하고 남의 도움을 얻어 살아야 하는 사람의 삶은 비참한 것이죠. 은혜라는 게 없는 사회죠. 복지사회라는 것은 은혜의 사회를 뜻하는데 이런 사회를 우리의 현실에서는 꿈 조차 꿀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업적을 못내는 사람이 있더라도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공로에 업혀서 살아가는 것이 복지사회인데 말이죠. 이런 면에서 업적지상주의에 대한 반동의 의미로 ‘오직 믿음으로’만의 루터 전통을 새겨 보는 것은 유의미한 일이라고 봅니다.
다시 돌아와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이런 구호가 우리 한국교회 현실에서 현실성을 떠나 신앙이 점차 내세적으로 흘러가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판적으로 성찰을 해야 한다고 봐요. 장로교에서는 성만찬 의식을 1년에 한번 정도 밖에 치르지 않거든요. 예수의 피와 살을 받아 예수가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구체성을 확인하는 것인데 이 같은 의식(儀式)이 축소되고 있다는 것은 우려되는 부분이죠. 결국 내세지향적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인데 이런 탈세상적인 모습은 고등 종교가 갖는 두드러진 특징인 것 같아요. 종교가 내세지향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야 보통 사람들이 현세는 비록 못 살아도 내세에는 잘 살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붙들게 되는 것이거든요. 때문에 이런 소망을 갖는 이들이 모여들고 말이죠.
그런데 이런 종교의 모습을 마르크스는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직시해야 할 고통은 못 느끼게 하고, 자꾸 위로한다"고 비판을 합니다. 종교가 ‘민중의 아편’과 같아서 지배자에게는 지배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피지배자에게는 복종의 불가피성을 강요하고 있다는 말이잖아요. 결국 종교가 내세를 끌어들여 사회 변혁이라는 면에서는 정의를 실현하고 복지 사회를 구현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지적이거든요. 현실은 그저 악마에게 맡기고, 하늘의 일들만 생각할 것을 강요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내세지향적인 것에 교회가 자꾸 드라이브를 거니까 사람들이 악한 세상에 순응하거나 악한 세상을 도피한다든가 하며 현실 속에서 책임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정치나 경제나 다 타락했으니 하늘만 보고 가야된다는 말인데 그렇게 되면 이익을 보는 것은 종교 지도자들이나 정치 지도자들이 아닌가 싶어요. 왜냐하면 믿는 이들이 현실에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하니까요.”
- 내세지향적인 고등 종교의 이런 속성은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이득을 주는 반면, 믿는 자들에게는 마치 아편과 같아서 현실 변혁 의지를 꺾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지적 같습니다.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된 이토 히로부미라고 하는 사람이 1910년 침략 당시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 다양한 교파들의 한국 선교사들을 잔뜩 불러다 놓고 하는 얘기가 있었어요. ‘이 조선땅을 다스리는 문제는 우리 일본이 잘할테니까 선교사들은 하늘을 다스리는 영적인 문제만 힘써달라’고 말이죠. 그러고는 샴페인을 터뜨리고,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이 같이 종교와 정치가 올바른 관계 정립이 되지 않을시 자연히 정교유착이 생기는 것이에요. 땅의 문제는 정치가들이 알아서 할테니까 천당 문제는 종교 지도자들이 하란 말이거든요.
이런 흐름에서는 루터가 얘기했던 정치와 종교의 상호 견제, 상호 비판이 점점 없어지게 되고 자연히 썩게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되면 솔직히 종교 지도자들도 편리하고, 정치 지도자들도 편리한 것이거든요. 그 때에는 정치 지도자들이 종교 지도자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것이죠. 또 종교 지도자들은 그 혜택을 받아서 활동을 많이하고 말이죠. 박정희 정권 시절 복음주의학생단체 C.C.C.라는 데서 美 복음주의 지도자 빌리 그래함 목사의 부흥 대회할 때 무대 세트장 설치를 군인들이 했어요. 내세지향적 설교를 한다는 목사가 와서 부흥 집회한다니까 박정희가 적극 협조를 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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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규태 명예교수는 정치와 종교의 올바른 관계 정립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 관계가 올바르게 설정되지 못할 경우 발생 가능한 정교유착의 문제들에 대해 설명을 했다. |
- 영/육 이원화 작업도 내세지향적 신앙 자세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봅니다.
“사람을 영육으로 나눈다든지 또 영과 혼과 몸으로 나눈다든지 하는 개념은 구약에도 신약에도 나오는 개념들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영혼은 몸에 갇혀 있다가 죽음은 해방이 되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데 기독교인들도 그와 유사한 생각으로 자신이 죽어서 영혼이 천당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플라톤 ‘영혼불멸’ 사상인데 그것이 기독교에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인지 내가 부활하고 영생하는 것을 여기에 곧잘 접목해서 이해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성서에는 분명이 영과 육의 구분은 있지만, 분리는 없어요. 몸이 하는 일하고, 영이 하는 일이 따로 있으나 그런데 분리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이거든요.
故 강원용 목사가 삼위일체의 틀에 한국교회들을 넣어서 분석한 적이 있었어요. 아주 보수적인 장로교는 율법주의적이라 권위주의적이고 여자들을 무시합니다. 당회의 운영도 비민주적으로 이뤄지고요. 유교적 스타일의 이런 교회 모습을 성부에 비유를 했어요. 또 오늘날 오순절 교회들처럼 성령을 강조하는 힐링을 제창하는 교회는 어머니와 같은 모성이 담겨진 성령에 비유를 했고요. 마지막으로 미래지향적이고, 역동적이며 혁명적인 전통이 강한 기장과 같은 교회는 성자로 비유된다고 했습니다.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개념이 로마의 삼두정치에서 나왔다고 하는가 하면 바르트는 삼위일체를 삼권분립에 적용을 시키기도 합니다. 이렇듯 서로 다른 기능을 나타내는 삼위가 일체를 이룬다는 기독교의 특징적 교리가 갖고 있는 함의는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성부만 강조한다든지 성자만 강조한다든지 성령만 강조하다든지 하면 문제가 발생하거든요. 성부만 강조하면 서로 옳다고 잘났다고 우기면서 갈라지고 싸우게 되는 것이죠. 장로교가 교회 분열의 온상이 되고 있다는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또 성령만 강조하면 교리와 전통이 무시되기 쉬워 자칫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져들 수 있어서 문제이고요.
저는 건전한 교회가 되기 위해선 삼위일체 전통을 살려 나가야 한다고 봐요. 교회가 성부만 강조한다든지 성자만 강조한다든지 성령만 강조한다면 삼위일체가 갖는 통합성이 상실되고 서로 관계가 깨지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나 싶어요. 또 흥미로운 것은 성령론을 강조하는 사람이 보면 실제로 영적인 세계, 타계만을 관심에 두고 있지 않고, 오히려 더 물질적인 것에 탐욕이 있고 또 내세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다 버리고 탐구하는 것 같는데 그렇질 않거든요. 이들도 역시 현세의 물질적인 것에 욕심을 냅니다. 이런 정신분열적 요소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많은데 이것에 대한 연구도 필요할 것 같아요. 겉으로는 굉장히 경건한 척하면서 속에는 갖은 탐심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척하면서 물질주의적인 것으로 얽혀 있는데 이것이 인간의 정체성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 같아요.”
- 본회퍼 얘기를 좀 더 해보고 싶습니다. 오늘날 정신분열적인 증상을 종교가 가지고 오는 면이 없지 않은데 신앙 따로 생활 따로. 신앙과 생활이 따로 따로 된 오늘날 한국교회 대다수의 의식을 개선하는 차원에서라도 신앙과 생활의 일치를 보여준 앞서간 선조들의 면모를 파악하는 일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본회퍼는 신앙과 생활의 일치를 보여준 성자라고 생각되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본회퍼야 아주 철두철미하게 신앙과 삶의 일치를 이루려 노력했던 사람이죠. 그 분의 시 가운데 ‘사고의 세계로 도망치지 말고, 행동의 폭풍으로 뛰어나가라’고 하거든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비겁한 면이 있다고 생각하는게 60, 70년대 그렇게 우리사회가 고통 당할 때 폭풍의 현장으로 나가질 못했다는 것이에요. 나갔다면 찢어지든지 아니면 유명한 사람이 되었을텐데 그 시를 읽을 때마다 내가 참 행동하는, 생활 신앙을 제대로 보이질 못했구나 하는 반성이 굉장히 많이 생기죠. 그런 폭풍의 현장으로 나간 전태일 열사 같은 고통 당한 사람을 보면 존경 받을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구요.
한신대와 기장을 만들었던 김재준 목사님이 우리에게 늘 가르치던 것이 있어요. 신앙 생활을 하지 말고, 생활 신앙을 하라고 하셨어요.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가서 신앙 생활 하지 말고 일주일 내내 생활 가운데 신앙을 실천하란 가르침이었습니다. 일요일에만 신앙 생활하는 선데이 크리스천이 되지 말라고 하신 것이거든요. 오늘날에도 유효한 것 같아요. 큰 교회들 보면 일주일 내내 속되게 살다가 주일날만 와서 헌금 받치면 모든 죄가 사해지고, 구원이 보장이 되는 것처럼 살지 않는가 돌아볼 일이죠. 옛날에 성철 스님을 집사람하고 한번 만난 적이 있었거든요. 스님이 하는 얘기가 ‘요새 말이야 장성들이 와가지고 교회에다 헌금을 많이 한다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 아마도 세상에서 나쁜 짓을 많이 해서 돈을 갖다 주고 사함을 받으려고 그런 것 아니냐’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평소 생활은 세속적으로 살고 주일성수 한답시고 교회에 한번 나가 기도하고 헌금하면 모든 죄가 사해진다는 소위 잘못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비극이에요.
독일 교회에 나가보면 큰 교회 안에 할아버지, 할머니들 20여 명 정도 밖에 앉아있지 않아요. 찬송가 부를 때 소리가 잘 들리질 않아요. 성만찬 할 때에는 독일에는 앞에 나와서 성만찬을 받거든요. 성만찬 받으라고 하면 쩔쩔매죠. 거동이 시원치 않은 노인들만 있으니까요. 그러니 거기서 목회하는 목회자들이 종교세 통해 월급은 많이 받지만서도 목회하는 것이 영 재미가 없는 것이에요. 주일에 보면 젊은 사람들이 씨가 말랐으니까요. 교회의 현실은 이런데 재밌는 것은 독일 사람들에게 크리스천이냐고 물어보면 70~80프로는 크리스천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때마다 출석을 하고 있지 않으면서도요. 왜 그들이 크리스천이라고 스스로를 고백하는 것일까. 자기들은 교회를 나오지 않아도 종교세를 내거든요. 교회를 나오지 않았어도 종교적 의무를 다했으니까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한국에서 대형교회를 목회하던 목사들이 독일교회 현장을 보고선 ‘독일이 망했다. 독일에는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이 없다’라고 성급하게 단정을 내리곤 합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에는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자랑을 늘어 놓곤 해요.
그런데 저는 그것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독일 사람들이 주일성수를 꼬박꼬박 지키는 신앙 생활은 하지 못하고 있지만 대부분 생활에서 신앙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이죠. 내가 희생해서 남에게 은혜를 베풀어 가난하고 힘든 장애자들도 복지를 누리며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데 동의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거든요. 이런 생각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생활 신앙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정신에서 말이죠. 독일 사람들은 교회에서 찬송을 부르고 그렇지는 않지만 신앙 생활이 삶 가운데 스며들어 있어요.
저는 유럽 사람들이 교회 생활은 잘 안해도 삶 가운데 신앙을 실천하고 있다고 봐요. 그것이 바로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가는 것이거든요.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훨씬 가까이 왔다는 것을 저는 독일에서의 생활에서 경험했어요. 교회에 나와서 찬송 부르고, 새벽 기도 나와서 방성대곡하고 통곡하는 신앙 생활도 중요하겠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 가운데서 예수의 정신을 실천해 나가는 것이라고 봐요. 약하고 힘들고 권리가 없는 사람들과 같이 사는 방법에 동의하고, 자기 것을 내놓고 말이죠.
그런데 우리 한국인들은 어떻습니까? 이명박 대통령이 통일세 걷겠다고 하니까 부자들이 세금 안내겠다고 난리가 났잖아요. 요즘 젊은이들은 어떤가요? 이 사람들도 통일이 싫다고 합니다. 우리가 왜 (굶주린 북한 동포들을)먹여 살려야 되느냐 이 말이죠. 독일 사람들은 매달 자신들의 월급에서 300불씩 떼어서 통일세 냅니다. 통일세 내는 행위가 자신의 생활 속에서 나는 동독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아가겠다는 것에 모두 승인하고 따라가는 것이거든요. 그게 바로 생활 신앙이라고 봅니다.
성서에도 ‘말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마다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게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뜻 대로 살아가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이거든요. 우리는 기독교가 들어온지 120년 조금 넘었는데 여전히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어요. 기독교가 점차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물질 만능주의에 빠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돈을 사랑하는지 분간 못할 정도로 탐욕에 빠져 있으니까요. 크리스천들이 어떤 면에서 제일 에고이즘(egoism)적이고, 이기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한국교회의 큰 문제죠.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하면 남을 인정하고 그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곧 생활 신앙이라고 봐요.”
- 종교 밖의 정치 참여 활동을 함에 있어서 종교 안의 문제를 검토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종교적 진보 집단이든 보수 집단이든 자신들의 신념만이 옳다고 하는 ‘독선’에 빠질 때 그런 신념이 선, 악을 판단하는 신앙적 잣대로 둔갑해 국가든 사회든 가정이든 교회든 분열과 분쟁을 낳기 마련인데 신앙인들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이 ‘독선’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세계 종교 가운데 가장 배타적인 종교가 유대교라고들 하죠. 그것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기독교가 그 다음인데 배타주의가 강력하게 등장시킨 집단이 칼빈주의 가운데서도 소위 근본주의 신앙하는 이들거든요. 그런데 칼빈주의 중에서도 배타성 문제가 강하게 제기된 것이 칼빈의 이중예정론을 신봉하는 집단에서 나타났어요. ‘한 집단은 염소고, 다른 한 집단은 양’이라는 것인데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하나님이 염소라고 하면 천당에 못가고, 설혹 교회를 안 다녀도 하나님이 양이라고 하면 천당에 간다는 말입니다. 칼빈에게서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절대주권, 절대성, 전체성이거든요. 이것이 강조되다보니까 소위 이중예정론까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중예정론을 신봉하는 이들이 우리는 선택됐다는 선민주의에 쉽게 빠지게 된다는 것이거든요.
그런 신앙이 우리나라 초기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됐어요. 미국의 장로교 중에서도 근본주의적 신학파인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우리나라 기독교에 그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관용이 없기로 유명합니다. 남을 인정하고 관용하는 게 없어요. 영국 같은 경우에는 성공회와 장로교가 싸우다가 나중에 관용법을 선포해서 성공회도 장로교도 다 믿을 수 있다는 법을 통과시켰고, 독일에도 루터파와 가톨릭이 서로 싸웠는데 1555년 아우스부르크에서 회담을 통해 가톨릭도 루터교도 믿어도 괜찮다는 법을 통과시켰었거든요. 그런데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근본주의자들은 관용에 대한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우리나라에 선교를 와서 모든 재래종교, 유교 등을 우상으로 규정해 논란을 일으켰어요. 유럽 사람들은 타종교를 우상으로 규정하지 않았거든요. 하여간 한국 기독교인들의 독선 이면에는 미국의 근본주의하고 한국에 있었던 성리학과 같은 배타적 사상이 결합이 되어 있었던 게 아닌가 분석을 해봅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하늘 시민이기도 하지만 이 땅을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는 민주시민이기도 하거든요. 민주시민이 되는 첫번째 조건이 나와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사상을 인정하며 공존해 살아가는 것이잖아요. 자유민주주의라는 게 무엇입니까? 서로 간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거든요.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이단시 하고, 반목하고 말이죠. 그런 잘못된 관행이나 행태에 큰 영향을 준 것이 종교 지도자들이었다고 봐요. 그런 점에서 볼 때 굉장히 야만적이고, 옛날에 종교 전쟁 할 적의 사상이 우리 사회와 교회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타인의 존재, 타인의 사상,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는 게 참 중요합니다. 게다가 오늘날 한국사회는 바야흐로 다문화 사회에 접어들어서 다른 종교 문화 전통의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와 있는 상황이라 더더욱 관용의 정신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런데 이 정신이 가장 부족한 곳이 교회라는 거에요. 불명예입니다.”
[대담= 김진한 편집국장, 사진편집 및 정리= 이서진 기자]
첫댓글 손교수님께서는
재작년 부활절에 신앙강좌 형식으로
대전 주교좌 교회에서 본회퍼 강의를 해 주셨었습니다.
작년에도 다시 모시고 싶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고 해서 초대를 못했었습니다....
손교수님!!!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가톨릭에서도 아주 존경합니다. ...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
손교수님이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