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집보살학론大乘集菩薩學論> 또는 <제요경집諸要經集>이라한다
대승집보살학론은 한글대장경 249번, k- 1121(33-996)에 번역되어있다.
♣경의 내용
티베트 망명정부가 자리한 다람살라에서는 달라이라마께서 집전하는
법회의 시작과 끝에 다음과 같은 티베트말 게송을 함께 합창한다.
(장춥 쎔촉 린포체) 보리심의 귀한 보석이며
(마께 빠남 께규르찍) 보리심을 아직 일깨우지 않은 이들은 일깨우고
(께빠 냠빠 메빠이) 보리심을 일으킨 이는 기울지 않도록 하며
(공네 공두 팰와르 쇼) 보리심은 항상 위로 증장할지어다.
♣보리심 공덕 찬탄품(讚歎品)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께 예경합니다
선서(善逝)의 법신을 지니신 보살과 예경 받으실 모든 분께 정례하오며
보살의 율의(律義)에 들어감에 대하여 경에서와 같이 간략하게 말하겠습니다.
이전에 없었던 것을 여기에 말한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를 '위한다'는 생각 또한 저에게는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바른 습을 들이기 위해 이를 짓습니다.
선업에 길들여져 나의 믿음은 이러한 신심을 순간 자라게 하리니
저와 선연(善緣)이 같은 다른 이들도
만일 이 내용을 보게 된다면 뜻을 얻게 될것입니다.
이 가만(暇滿=法緣)은 얻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인간의 뜻을 이루었으니 만일 이런 좋은 기회에도 성취하지 못한다면
어찌 다음 생에 완전한 기회가 다시 오겠습니까?
마치 구름 낀 칠흙 같이 어두운 밤
순간 번개의 섬광이 모든 것을 드러내듯
이처럼 한때 부처님의 위신력(威信力)으로 이세상 복과 지혜 생겨납니다.
이처럼 선의 힘은 항상 약하고
강한 악업의 힘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완전한 보리심이 아닌
그 어떤 선으로도 악을 조복 받을수는 없습니다.
무량한 세월동안 중생의 이로움에 대해 깊은 사유를 행하신
모든 부처님께서 이 보리심 만이 중생에게 유익함을 보시고
아주 쉽게 궁극의 안락을 얻게 하셨습니다.
끝없는 윤회의 고통을 없애고
중생이 불행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갖가지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면
언제나 보리심만은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보리심을 일으키면
윤회의 쇠사슬에 얽매인 가련한자도 보살이라 불리며
세간의 천신과 사람들이 함께 받듭니다.
모든 것을 금으로 변하게 하는 최고의 연금액(鍊金液)처럼
깨끗하지 못한 이 몸뚱이르 부처 몸으로 만들고
값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보석으로 바꾸려면
'보리심' 을 견고히 잘 지녀야 합니다.
온누리의 으뜸이신 오직 당신, 부처님의 한량없는 지혜로
온전하고 바르게 잘 관찰하시어 값진 보배로 보리심을
인정하시었으니,중생계(衆生界)를 벗어나려고 하는 이들은
소중한 보리심을 굳건히 지녀야합니다.
세상의 다른 선업(善業)은 파초와 같이
열매를 맺고나면 시들지만
보리심의 나무는 항상 푸르러
끊임없이 열매 맺고 시들지 않으며 잘 커나갑니다.
무섭고 큰 죄를 지은 자라도
보리심에 의지하면 찰나에 그 업을 벗습니다
용맹하게 보리심을 일으키면 모든 공포가 사라지니
의식이 있는 자(者)라면 어찌 이것에 의지하지 않겠습니까?
보리심은 말겁(末劫)의 불처럼
어떤 큰 죄도 순식간에 소멸시켜 줍니다
보리심의 이로움이 '헤아릴 수 없음'에 대해
지혜의 미륵보살께서 선재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보리심을 요약하면
두 가지 유형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하나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마음(願菩提心)이고
다른 하나는 보리심을실천하는 마음(行菩提心)입니다.
가기를(菩提道)를 바라고 실제로 가는
차이를 이와 같이 아는 것처럼
그와 같이 지자(智者)는
이 둘의 차이를 차례로 알아야 합니다.
원보리심 자체만으로 윤회 세계에서 큰 과보를 얻지만
행보리심처럼 끝없는 공덕을 맺지는 못합니다.
계율을 지니고 유정세계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불퇴전의 마음으로 이 보리심을 바르게 수지한다면
그때부터 잠에들거나 방일(放逸)하더라도 공덕의 힘은
끊임없이 허공과 같이 커다랗게 자라납니다.
이는 아주 합당한 것이며 선비보살경(善臂菩薩經)에서
소승에 안주하려는 중생을 위하여
여래께서 직접 말씀하신것입니다.
유정의 두통(頭痛)만이라도 없애려고한다면
그 또한 유정을 이롭게 하려는 생각이기에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얻게 됩니다 .
하물며 중생 개개인의 헤아릴 수 없는 불행을 없애려고 한다면
중생 개개인을 위해 한량없는 공덕을 얻게 하려는 것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이타심이 어떤 유정에게 있겠습니까?
아버지나 어머니, 천신이나 신선
또 그 어떤 바라문에게 있겠습니까?
이 모든 유정이
일찍이 자기를 위해서 이런 마음을
꿈속에서 조차 내지 않았다면
이웃을 위하여 마음은 어찌 생기겠습니까
이웃은 물런 자신을 위해서도 일어나지 않는데
모든 중생을 위하려는 마음이 어디에서 생기겠습니까?
이 탁월한 마음의 보배는
예전에 없던 희유한 탄생입니다.
모든 중생에게 기쁨의 씨앗이요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 주는 영약이되는
보배로운 보리심의 공덕 모두를
어찌 헤아릴 수있겠습니까?
도우려는 생각만 하여도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보다 수승하거늘
한 중생도 남기지 않고
모두의 복락을 위하여는 노력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중생은 고통을 여의려고 하지만
오히려 고통 속으로 내달리고
안락을 원하지만 무지로 인해
스스로 자신의 안락을 원수처럼 부숴버림니다.
그 누가 안락이 다하여
많은 고통 속에 빠진 그들에게
모든 복락으로 만족을 주며
모든 고통을 여의게 하고
그들의 무지 역시 없애려고 하겠습니까?
이와 견줄만한 선행이 어디ㅔ 있습니까?
그와 같이 행하는 선지식 어디에 있습니까?
이와 같은 공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도움에 대해 보답을 바라고 행한 것에도
칭찬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보답을 바라지 않고서 하는
보살들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몇 안되는 중생에게 계속해서 음식을 베풀고
어쩌다 한 번 보시를 하고
천시하는 마음으로 반나절을 배부르게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은 그가 덕행을 행했다며 칭송합니다.
한량없는 유정에게 긴 세월 동안 변함없이
여래의 위없는 안락을 얻도록
마음의 한량없는 소원을 채워주고,항상 베푸는 보시에
무슨 칭송의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누구든지 이처럼 보시하는 보살에게
행여라도 나쁜 생각을 일으킨다면
나쁜 생각을 일으킨 만큼에 해당하는 양을
지옥에 머물게 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어떤 이가 이러한 일에 큰 신심을 일으킨다면
그 과보는 그보다 훨씬 많이 늘어 가리니
그런 보살에게는 큰 일이 닥치더라도
죄악은 생기지 않고 선업만 저절로 늘어가니다.
거룩하고 보배로운 마음과
나투신 그 몸에 절 하옵고
심지어 해치려는 자에게도 안락을 주는
기쁨의 원천인 당신께 귀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