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자료는 운영자 개인적으로 고려와 조선조 사료를 기반으로 추적한 선춘령의 위치이다.
고려사 卷56 志 卷第十 地理 一
惟我海東, 三面阻海, 一隅連陸, 輻員之廣, 幾於萬里. 高麗太祖, 興於高句麗之地, 降羅滅濟, 定都開京, 三韓之地, 歸于一統. 然東方初定, 未遑經理, 至二十三年, 始改諸州府郡縣名.
成宗, 又改州府郡縣及關驛江浦之號, 遂分境內爲十道, 就十二州, 各置節度使. 其十道, 一曰關內, 二曰中原, 三曰河南, 四曰江南, 五曰嶺南, 六曰嶺東, 七曰山南, 八曰海陽, 九曰朔方, 十曰浿西. 其所管州郡, 共五百八十餘, 東國地理之盛, 極於此矣.
顯宗初, 廢節度使, 置五都護·七十五道安撫使, 尋罷安撫使, 置四都護·八牧. 自是以後, 定爲五道·兩界, 曰楊廣, 曰慶尙, 曰全羅, 曰交州, 曰西海, 曰東界, 曰北界. 惣京四, 牧八, 府十五, 郡一百二十九, 縣三百三十五, 鎭二十九. 其四履, 西北, 自唐以來, 以鴨綠爲限, 而東北則以先春嶺爲界. 盖西北所至不及高句麗, 而東北過之. 今略據沿革之見於史策者, 作地理志.
주) 고려초 압록강은 대릉하로 추정.
고려사 예종2년
睿宗二年 以平章事尹瓘爲元帥 知樞密院事吳延寵副之率兵擊逐女眞置九城立碑于公嶮鎭之先春嶺以爲界至.
고려사 卷五十八 志 卷第十二 地理 三 동계 함주대도독부 공험진
공험진
公嶮鎭睿宗三年, 築城置鎭, 爲防禦使. 六年, 築山城.【一云孔州, 一云匡州. 一云, 在先春嶺東南·白頭山東北. 一云, 在蘇下江邊.
東界本高句麗舊地, 成宗十四年, 分境內, 爲十道, 以和州·溟州等郡縣, 爲朔方道. 靖宗二年, 稱東界【與北界, 爲兩界】, 文宗元年, 稱東北面【或稱東面·東路·東北路·東北界】. 後咸州迆北, 沒於東女眞. 睿宗二年, 以平章事尹瓘, 爲元帥, 知樞密院事吳延寵, 副之, 率兵擊逐女眞, 置九城, 立碑于公嶮鎭之先春嶺, 以爲界. 至明宗八年, 稱沿海溟州道.
권96 열전 권제9 제신(諸臣) 윤관
瓘·延寵, 至東界, 屯兵于長春驛(현 장춘), 凡十七萬, 號二十萬. 分遣兵馬判官崔弘正·黃君裳, 入定·長二州, 紿謂女眞酋長曰, “國家將放還許貞·羅弗等, 可來聽命.” 設伏以待. 酋長信之, 古羅等四百餘人至, 飮以酒醉, 伏發殲之. 其中壯黠者五六十人, 至關門, 持疑不肯入. 使兵馬判官金富弼·錄事拓俊京, 分道設伏, 又使弘正, 帥精騎應之, 擒殺殆盡. 瓘自以五萬三千人, 出定州大和門, 中軍兵馬使·左僕射金漢忠, 以三萬六千七百人, 出安陸戍, 左軍兵馬使·左常侍文冠, 以三萬三千九百人, 出定州弘化門. 右軍兵馬使·兵部尙書金德珍, 以四萬三千八百人, 出宣德鎭安海·拒防兩戍之閒, 船兵別監·吏部員外郞梁惟竦, 元興都部署使鄭崇用, 鎭溟都部署副使甄應圖等, 以船兵二千六百, 出道鱗浦. 瓘過大乃巴只村, 行半日, 女眞見軍勢甚盛, 皆遁走, 唯畜産布野. 至文乃泥村, 賊入保冬音城.
瓘遣兵馬鈴轄林彦與弘正, 率精銳急攻破走之. 左軍到石城下, 見女眞屯聚, 遣譯者戴彦諭降, 女眞答曰, “吾欲一戰以決勝否, 何謂降歟.” 遂入石城拒戰, 矢石如雨, 軍不能前. 瓘謂俊京曰, “日昗事急, 爾可與將軍李冠珍攻之.” 曰, “僕嘗從事長州, 過誤犯罪, 公謂我壯士, 請于朝宥之, 今日, 是俊京殺身報効之秋也.” 遂至石城下, 環甲持楯, 突入賊中, 擊殺酋長數人. 於是, 瓘麾下, 與左軍合擊, 殊死戰, 大破之, 賊或自投巖石, 老幼男女殲焉. 賞俊京, 綾羅三十匹, 又遣弘正·富弼, 錄事李俊陽, 擊伊位洞, 賊逆戰, 久乃克之, 斬一千二百級. 中軍破高史漢等三十五村, 斬三百八十級, 虜二百三十人, 右軍破廣灘等三十二村, 斬二百九十級, 虜三百人. 左軍破深昆等三十一村, 斬九百五十級, 瓘軍自大乃巴只, 破三十七村, 斬二千一百二十級, 虜五百人, 遣錄事兪瑩若, 告捷. 王喜賜瑩若爵七品, 命左副承旨·兵部郞中沈侯, 內侍·刑部員外郞韓皦如賜詔, 獎諭兩元帥及諸將, 賜物有差. 瓘又分遣諸將, 畵定地界, 東至火串嶺, 北至弓漢伊嶺, 西至蒙羅骨嶺. 又遣日官崔資顥, 相地於蒙羅骨嶺下, 築城廊九百五十閒, 號英州, 火串嶺下, 築九百九十二閒, 號雄州, 吳林金村, 築七百七十四閒, 號福州, 弓漢伊村, 築六百七十閒, 號吉州, 又創護國仁王·鎭東普濟二寺於英州城中.
세종실록 권155 함길도
함길도는 본래 고구려의 고지(故地)이다. 고려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경내(境內)를 나누어 10도(道)로 하고, 동계(東界)로써 삭방도(朔方道)를 삼았는데, 함주(咸州) 이북이 동여진(東女眞)에게 함몰되어 예종(睿宗) 2년 정해 【송나라 휘종(徽宗) 대관(大觀) 원년(元年).】 에 중서 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윤관(尹瓘)을 원수(元帥)로 삼고,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군사 17만을 거느리고 동여진을 쳐서 몰아내고, 함주(咸州)에서 공험진(公險鎭)에 이르기까지 9성(九城)을 쌓아서 경계를 정하고, 비석(碑石)을 공험진의 선춘령(先春嶺)에 세웠다. 사신을 보내어 요(遼)나라에 알리니, 천조제(天祚帝)가 회답하여 조칙(詔勅)하기를, "경(卿)은 황가(皇家)를 호위[藩衛]하여 해표(海表)를 진무(鎭撫)하고, 정토(征討)를 오로지하여 직분(職分)을 지켜, 도적을 쳐부수는 데 노고가 있도다. 싸움에 이김으로 인하여 항복을 받고, 드디어 강토(疆土)를 넓혀서 보루(堡壘)를 두어 이에 오로지 시설(施設)하니, 서로 화평하게 지냄이 편의할 것이로다. 지난번에 사신을 보내어 먼 곳까지 와서 승첩(勝捷)을 알리니, 길이 찬미(讚美)를 할 만하므로, 진실로 위로하는 바이다." 하였다.
경원 도호부(慶源都護府)
사(使)가 1인이니, 길주도 우익 병마(吉州道右翼兵馬)를 겸한다.
옛 공주(孔州)로서 혹은 광주(匡州)라고도 칭하는데, 오랫동안 호인(胡人)에게 점거(占據)되었었다. 고려의 대장(大將) 윤관(尹瓘)이 호인(胡人)을 몰아내고 공험진 방어사(公險鎭防禦使)를 두었다. 본조 태조(太祖) 7년 무인에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이 있다고 하여 경원 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성(城)을 수축하기 위하여 땅을 파다가 인신(印信) 1개를 얻었는데, 그 새긴 글에 ‘광주 방어지인(匡州防禦之印)’이라고 되어 있었다. 태종(太宗) 9년 기축 【영락(永樂) 7년.】 에 목책(木柵)을 소다로(所多老)의 영기(營基)에 설치하고 부(府)를 옮겼고, 10년 경인에 야인(野人)의 난리로 인하여 경성군(鏡城郡)에 합쳤다가, 17년 정유 【영락 15년.】 에 경성(鏡城)의 두롱이현(豆籠耳峴) 이북의 땅을 떼어서 다시 도호부로 삼고, 부가참(富家站)에다 목책(木柵)을 세우고 치소(治所)로 삼았다.
주)광주(匡州)는 지금의 영고탑이다.
복호봉(伏胡峯) 【부의 동쪽에 있는데, 본부 사람들이 진산(鎭山)으로 삼는다. 】 대천(大川)은 두만강(豆滿江)과 【부(府)의 동북쪽에 있다. 그 근원이 백두산(白頭山)에서 나오는데, 동쪽으로 흘러서 동량북(東良北)으로부터 사지(舍知)·오음회(吾音會)·수주(愁州)·동건(童巾)·다온(多溫)·미전(迷錢) 등지를 지나 회질가(會叱家)에 이르고, 남쪽으로 흘러서 소다로(所多老)·동림(東林)·오롱초(吾弄草)·아오지(阿吾知)등지를 거쳐 공주(孔州)를 지나고, 동쪽으로 23리를 흘러서 사차마도(沙次亇島)에 이르러 갈라져 5리 정도쯤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 수빈강(愁濱江)이다. 【두만강 북쪽에 있다. 그 근원은 백두산 아래에서 나오는데, 북쪽으로 흘러서 소하강(蘇下江)이 되어 공험진(公險鎭)·선춘령(先春嶺)을 지나 거양성(巨陽城)에 이르고, 동쪽으로 1백 20리를 흘러서 수빈강이 되어 아민(阿敏)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20리, 서쪽으로 경성(鏡城) 두롱이현(豆籠耳峴)에 이르기 40리, 남쪽으로 연해(連海) 굴포(堀浦)에 이르기 12리, 북쪽으로 공험진에 이르기 7백 리, 동북쪽으로 선춘현(先春峴)에 이르기 7백여 리, 서북쪽으로 오음회(吾音會)의 석성기(石城基)에 이르기 1백 50리이다.
호수가 2백 91호요, 인구가 3천 2백 33명이다. 군정은 익속군(翼屬軍)이 3백 1명, 수성군(守城軍)이 58명이다. (중략)
영가 사오리(英哥沙吾里)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백두산(白頭山)이 있는데, 산이 대개 3층으로 되었다. 꼭대기에 큰 못이 있으니,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豆滿江)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소하강(蘇下江)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압록(鴨綠)이 되고, 서쪽으로 흘러 흑룡강(黑龍江)이 된다. 그 산에 사는 새와 짐승은 모두 흰빛이며, 산허리 이상은 모두 속돌[水泡石]로 되어 있다.
주)고려초기 백두산은 현재의 백두산이 아니다.
세종실록 지리지
①동림성(東林城) 북쪽으로 5리쯤에 소다로영기(所多老營基) → 회질가탄(會叱家灘) → 현성(縣城) → 어라손참(於羅孫站)→ 허을손참(虛乙孫站) → 유선참(留善站)→ 거양성(巨揚城) → 선춘현 → 수빈강 건너 고성터까지 연결되는 동북방향 7백리 지점.
②동림성(東林城)-소다로(所多老)→ 어두하현(於豆下峴)→ 동건리(童巾里) → 두만강탄(灘)→ 오동사오리참(吾童沙吾里站) → 하이두은(河伊豆隱) → 영가사오리참(英哥沙吾里站) → 소하강변 공혐진까지 북방향 7백리지점.
소하강은 어디인가?
세종실록 지리지에 속평강(愁濫河, 愁濱江,, 綏芬河)을 소하강(蘇下江)과 동일시하여 그 발음과 동일한 청나라 황조일통여지전도에는 綏芬河 로 대수분하와 소수분하로 나뉘어져있다. 이강은 러시아 하바로브스크를 남북으로 흘러 블라디보스톡만으로 들어간다.
따라 구글지도로 보면 수빈강(= 綏芬河)의 이름을 딴 수빈현이 현재 흑룡강성 에 위치하므로 흥개호부근에 윤관의 공험진과 동북 九城이 있다고 보여진다. 실록에는 경원에서 600여리 떨어진 곳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지역을 곧 흑룡강성 동녕현 도하진으로 비정한 이인철의 주장이 눈에띈다.
백두산 추정지 (요녕 개원 북쪽)
심제
첫댓글 수분하~먼저 저 한자 綏이 글자에 한민족의 연관성이 좀?? 綏中, 綏化등등..아마 저 지역은 많은 분들이 말씀하시는
지역이죠! 지명이나 전설 유물등등 많이 이야기되는 곳 입니다. 동북으로는 계서, 목릉까지 고려? 고구려??등 생활관
련지명들이 넘치는 다만!! 그것이 후대에 중국인들이 통칭부르던 것인진?? 항상 의문인 지역입니다. 수분하에도 고려
등 지명 다수 존재하며..지도에 영고탑이 좌측으로 존재하는 것을 보니 이지도는 1660년 전의 지도로 보입니다. 나선
정벌후 영고탑은 지도의 골짜기에서 우측 영안으로 이전하였기에..바로 밑에 있어야 할 발해의 동경성은 안보이는..
암튼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휴일 되세요~
아참~그리고 수분하란 어원은 중국선 唐称“率宾水”,金称“苏滨水”、“恤品水”,明称“速频江”、“恤品河”, 清代
始称“绥芬河”。绥芬河??? 발해 솔빈부지역!!즉 우리가 잘 아는 발해 솔빈부는 수분하서 나온 말!! 지명이나 전설이
요하개주~위로 장춘밑~수분하까지 고려? 고구려?? 생활지명, 전설이 넘쳐 남은 무슨 곡절일까요??그 주변 현재
급격한 도시화로 산이 깍이고 물길변하고 바다등 지형 천지개벽중이라 후대에 또 고지도론 위작논쟁 후손들 걱정
그런데도 오늘도 백두산, 집안에만 죽어라 답사가는 주류사학계는 도대체 머 하는 사람들인지? 요하부터 말도 아
닌 역사비정하고 후손들 세뇌에 책,글,말장사까지 하는 꾼들
요와 전투서 포로로 잡힌 고려군 집단거주지로 알려진 요나라 고주등 보름정도 7월초에 다녀왔는데 고려관련지
명등 현재도 남아있는 한민족풍습등 현지 중국블로그 글 참고 확인하였는데 기록에 3만이라고 아마 추정치는 그
이상이라고..어디 고려를 그 좁은 청천강에 집어 넣는지..가보지도 않고 중국지역 블로그수준도 안되는 님들!! 참
답답한 현실. 배가 고프니 답사 안되고 스승님 글 벗어나면 밥그릇깨지니 아니다 말 못하고..암튼 요와 국경은 요
하가 합당하며 강조의 군사등 포로였을 고려군은 대략 300km걸어 遙최대주둔지로 몽고군방어..현재 우리풍습남
아 우릴기다림..후손세뇌 대표엉터리 장사꾼 S,S,Y,K 님들 반성~
금나라 마지막 수도가 하남성 개봉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