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팬들을 설레게 했던 '박스컵' 트로피, 어디 있나 했더니…
순금 750g 1971년 제작 1995년 코리아컵 바꾸며 기존 트로피 이름 바꿔
1999년 대회 치르고 퇴장 상징적 보관료 1년 1만원
얼마 전 사상 첫 FIFA(국제축구연맹) 대회 우승 트로피가 한국에 왔다. 여자 축구 대표팀이 17세 이하(U-17) 월드컵에서 우승하면서 가져온 것이다. 이 트로피는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 보관돼 있으며 곧 협회 내부에 전시된다.그런데 우리 축구엔 역사상 처음 만든 국제대회 트로피도 있다. 1971년 개최한 '박 대통령배 쟁탈 아시아축구대회' 트로피다. 태국의 킹스컵, 말레이시아의 메르데카컵에 대항하려 만든 '박스컵'은 지금 어디 있을까.
■한국 축구 국제화의 기념물
1960년대만 해도 한국 축구는 세계의 이방인이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예선 때 북한에 패할까 두려워 월드컵 불참을 선언하는 치욕적 결정을 내렸다가 FIFA의 징계를 먹기도 했다.
- ▲ 하나은행 서울 수송동 지점 대여금고에서 잠들어있던 진품 박스컵 트로피.‘ Korea Cup’이란 표기가 붙어 있다.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정도로 이음매가 헐거웠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지구본을 밟은 사자 머리 위에 축구공이 새겨져 있고 맨 위에 대통령의 상징인 봉황(鳳凰) 문양이 들어갔다. 이 트로피엔 순금 750g이 포함돼 있었다. 순금 750g의 현재 시세는 약 3600만원에 이른다.
트로피의 행방에 대한 관계자들의 기억은 엇갈렸다. 당시 축구협회 국제업무 담당 오완건(81) OB축구회 고문은 "버마와 한국이 제1회 대회에서 공동 우승한 뒤 버마가 트로피 원본을 가져가고 6개월 뒤 우리가 찾아왔다"고 했다.
진품 트로피를 우승국에 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모조품(레플리카)을 줬다"고 기억하는 관계자들도 있다. 순금이 들어간 '대통령 하사품'을 분실할 위험 때문에 우승국에 레플리카를 줬다는 얘기다.
이 트로피는 1979년 박 대통령이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시해당한 후 대회 명칭이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로 바뀌면서도 계속 사용됐다. 대통령배는 1993년 제20회 대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수리가 시급한 박스컵
트로피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하나은행에 보관돼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5일 서울 수송동 하나은행 지점, VIP클럽 안쪽 육중한 철제 슬라이딩 도어와 격자 철제문을 차례로 열고 들어가자 가지런한 금고가 나타났다.
오른쪽 맨 아래 '0189번' 금고를 열자 협회와 은행의 봉인(封印) 6개가 찍힌 박스가 나타났다. 봉인 연도는 2001년. 포장을 벗기자 10년 만에 봉인에서 풀린 '박스컵 트로피' 진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빛나는 황금색이었다.
트로피는 아래쪽 나무 받침이 헐거워서 떨그럭거렸고 이음매도 불안하게 흔들렸다. 손에 들고 흔들며 우승 세러모니를 한다면 당장 이음매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수리가 시급해 보였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 진품 트로피 하단부에는 대통령배를 뜻하는 영문 명칭 'President's Cup' 대신 'Korea Cup 1995'가 새겨져 있었다. 어떻게 1971년도부터 사용된 트로피 전면에 이런 이름이 새겨졌을까.
이야기는 정몽준 축구협회장 체제가 출범하던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 신임 회장은 참가팀 수준이 하향세를 걷던 대통령배를 대신해 '코리아컵'이라는 국제대회를 1995년에 창설했다.
- ▲ 1971년 5월 2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1회 박스컵 개막식에서 시축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 /대한축구협회 제공
지금 박스컵 트로피 진품에 'President's Cup' 대신 'Korea Cup 1995'가 찍히게 된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결국 1971년 1회 박스컵 우승 트로피는 1999년 코리아컵이 막을 내릴 때까지 29년이나 활동한 뒤 퇴역했다.
박스컵 트로피는 행사가 없을 때 은행 금고를 전전했지만 경로는 불분명하다. 협회가 1997년 말~1998년 초에 주거래은행인 서울은행 종로1가 지점에 트로피를 맡긴 사실은 조정수 전 협회 상벌위원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이전에는 1972년부터 대한축구협회장직을 맡은 고태진(당시 조흥은행장)씨가 조흥은행 금고에 보관했던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이 트로피는 서울은행과 하나은행이 합병된 후 지금의 수송동 지점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현재 하나은행이 받는 트로피 보관료는 1년에 단돈 1만원이다. 하나은행은 "축구협회가 주요 고객이기 때문에 상징적인 금액만 받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은행 측도 금고에 보관된 것이 박스컵 트로피인 줄은 모르고 있었다.
- ▲ 17세 이하 여자월드컵 우승 트로피는 서울 신문로 축구협회 건물에 보관돼 있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한국에 온 여자 U-17 월드컵 우승 트로피는 대한축구협회 소유물이다. FIFA에 반환할 필요가 없다.
FIFA의 대회 규정에 따르면 U-17 우승 트로피는 FIFA가 진품을 따로 보관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에 온 것이 ‘진품’인 셈이다. 한국 협회 측은 FIFA가 대회 때마다 새로 트로피를 만들어 지급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남자 A 대표팀 월드컵 트로피는 다르다. 18K 금으로 제작된 진품은 따로 있고 우승팀엔 모조품이 주어진다.
진품 트로피의 경우 각종 전시행사 때 전용기로 이동하며, 기압 변화 장치가 달린 특수 트렁크에 실릴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는다. 한국 투어 때는 안전요원 6명이 경호하기도 했다.
국내의 경우 각종 트로피는 축구협회 안의 수장고에 잠자고 있으며, 일부는 개인 수집가들이 소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