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정원 / 정미선 (2024. 5.)
가을의 서정을 이기지 못해 산인면 입곡 호수공원을 찾았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출렁다리 아래로 윤슬이 눈부시다. 물 위를 노니는 보트의 관광객이 여유롭다. 일렬로 공중을 질주하는 자전거도 보인다. 단풍 숲 사이로 늘어선 인파가 잘 채색된 그림 같다.
걷기 좋게 만들어진 둘레 길은 낭만의 풍경을 만드는데 한몫하고 있다. 물 위에 비친 산 그림자도 손뼉을 치며 찬사를 보내기에 충분하다. 여기저기서 절로 터지는 탄성이 들렸다. 나는 아주 천천히 우거지다 못해 내려앉은 덤불 사이로 쌓여 있는 낙엽을 조심스럽게 밟아보았다. 가랑거리는 느낌이 발자국에서 손끝까지 전해졌다. 무언가 벅찬 선물을 받는 희열감이었다.
빨간 모양새를 천천히 훑으며 가슴 한편에 깊이 묻어둔 침묵의 소리를 잠시 성찰해본다. 한 시절을 풍미하던 충족이 지금은 서글픈 마음으로 무정한 시간들을 견디고 있다. 심지를 태우듯 구절구절 애절히 풀어내는 것 같은 몸짓이 고비고비 넘어가는 삶의 가지처럼 흔들린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다독여 주는 것도 같다. 가야 할 때를 예감하고 자세를 갖추는 잎사귀가 지혜롭다. 사계절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청청함을 자랑하던 잎사귀에 투영된다.
바람 따라 향기 따라 홀씨로 부여받은 파릇한 줄기가 영근 햇살을 바라기 삼아 한 떨기 꽃을 피워낸다. 단 내를 내며 벌 나비를 불러들이던 시절도 있었다. 달콤한 열매를 맺어 당당한 자신을 자랑스럽게 뽐낼 때도 있었지. 아낌없이 품어내는 열정의 가치가 인생이 지나가는 꽃다운 청춘의 한 페이지와 닮아있다.
힘들고 빛나던 여정이 비로소 완성되었을 때를 생각해본다. 무성하다고 자랑하던 잎들이 무심코 스치는 작은 바람에 힘을 놓아 버렸다. 봄이 오면 다시 오겠다는 언약 같은 거 있었을까. 고락을 의지하던 무리에서 떨어질 때 이별의 아픔 같은 거 있었을까. 어쩌면 마지막을 받아들이는 고고한 자세로 조용히 낙하하였을 수도 있다. 결국은 떨어져 나앉은 한낮 가랑잎으로 바람에 나부낄 뿐이다. 쓸쓸하고 허무한 게 자연의 흐름일까.
아름다움을 과시하던 화려한 장미도 해만 바라본다는 해바라기도 결국은 시간 앞에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아무리 왕성하고 영광스러운 삶이라도 세월을 이길 수 없다는 진리가 새삼 떠오른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계절 앞에서는 자세를 낮출 수밖에 없나 보다.
사람의 일생에서 늙음을 맞이하는 계절이 가을이라 하고 떨어지는 낙엽이 삶의 기로라는 말이 있다. 만나고 헤어지는 게 인생의 다반사라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이별의 아픔을 몸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시간이다.
세상에 알려진 백 세 인생이 몇 줄의 글자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한해의 계절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짧은 문자로 요약되는 글 속에서 아무리 공들여 지켜온 백 년 지기 삶이라도 어느 순간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단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실낱같은 바람이 스쳐도 몸이 움츠려진다. 파랑 같은 시절의 그 어디쯤에 있던 하루가 지쳐가는 풀 섶으로 돌아온다. 기운이 다해 하늘거리는 잎처럼 마음이 허망해지고 자기연민에 빠져든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게 순리이고 가을의 사랑이라지만 그렇게 즐겁지 않다.
허접스러움에 잔뜩 눌려있는 일상이 보인다. 가슴 저 밑바닥에 깔려 홀로 주고받는 고독한 저항이 순순하게 스치는 색채의 바람결에 꿈틀거린다. 마냥 쟁여지는 삶의 찌꺼기들이 발밑에 밟혀 지는 낙엽처럼 바스락거린다. 가슴 시리던 아픈 기억들이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것 같다. 붉은 단풍은 되는 것 하나 없이 세월 따라 구르고 있는 나에게 다 그렇게 살아가는 거라고 위로해준다.
그렇다. 나는 위로받고 있다. 사실 외로움 하나를 이기지 못해 자신을 가을 속에 밀어 넣었다. 가슴을 조여 가며 겨우 붙들고 있는 작은 열정마저도 떠나려 하여, 무엇이라도 기대고 싶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새삼 어루만지듯 편안하게 부는 바람에 아무 시름없이 가슴이 따뜻해진다. 내 안의 부족한 것이 나뭇잎 싸이듯 차곡차곡 채워지고 있다.
생각이 많아지는 단풍나무 아래에서 계절의 묘한 감각을 한 번 더 느껴본다. 어디선가 기러기 날개 젖히는 소리가 들린다. 한 잎 한 잎 물감을 쏟은 듯한 다홍빛이 두 손 가득하다. 보고 또 보아도 색의 경이로움에 다시금 숙연해진다. 눈길 미치는 곳마다 절정으로 햇살을 받은 가을 서정이 넉넉하게 어우러지
첫댓글 정미선 선생님,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다른 작품으로도 자주 뵈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