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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우연히 본 드라마의 한 장면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죽음을 앞에 둔 한 젊은 여성이 남자 친구와 함께 자신의 유골이 안치될 자리를 미리 예약하기 위하여 납골당을 찾는 장면입니다.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힘들 자신의 부모님이, 딸의 유골을 안치할 납골당을 찾아나서야 하는 그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 싶다는 그녀의 마음, 그리고 가까이 다가온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하는 그 모습에 마음이 먹먹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 12장 첫머리에 나오는 에피소드 한 장면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유월절 엿새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본문은 먼저 밝히고 있습니다. 유월절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이 일은 불과 엿새 전에 예수님의 죽음을 코 앞에 두고 있었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이 일로 인하여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분이야말로 생명의 주인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를 죽이기로 모의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유대 지역을 떠나 빈 들에 가까운 에브라임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셔야 했다고 요한복음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유월절이 다가왔고,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은 베다니 마을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이제 그분의 생애 마지막 한 주간을 예루살렘에서 맞이하고, 최후의 사명을 완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의 남동쪽으로 약 3km쯤 떨어진 동네로, 감람산의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동네,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그리고 나사로가 살고있는 바로 그 마을입니다.
마을에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죽음을 앞에 둔 예수님이시지만, 제자들이나 베다니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듯, 예수님을 환영하는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그 사건의 충격과 놀라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잔칫집에서도 마르다는 분주하게 음식을 만들고 봉사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어느 공동체나 이런 분이 꼭 필요합니다. 말없이 수고하는 이런 분들이 있어 공동체가 편안하고 구성원들이 행복한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얼마 전에, 죽었던 자신의 오라비 나사로를 살려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아마도 왜 마리아는 일을 돕지 않느냐고 불평할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그녀는 힘든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은 자’ 중에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앉았다’는 말은 유대인들의 식사할 때 취하는 자세로 옆으로 기대어 눕듯이 앉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하는 나사로의 그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다시 찾은 새 생명의 감격이 넘쳤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이렇게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예수님을 대접하느라 바쁜 언니도 돕지않고,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서 열심히 말씀을 듣곤 했던 마리아가, 방안에도 보이지 않고, 주방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때 마리아가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의 두 손에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이 들려있었습니다. 나드는 주로 인도에서 생산되었는데, 어떤 식물 뿌리에서 추출하는 향유라고 합니다. 당시 근동지역에서 매우 귀하게 여겨졌고, 이스라엘에서도 비싼 가격에 거래되는 향유였습니다. 방으로 들어온 마리아는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긴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향유 냄새가 집안에 가득하였다고 요한복음은 말씀하였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면 마치도 그림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 흥겨운 잔치 광경, 그리고 비스듬히 앉아서 식사하는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아드리는 마리아의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집니다. 그리고 마치 내가 그자리에 있는 것같이 느껴지고, 나드 향유의 은은한 향기까지도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이야기는 사복음서에 모두 나와 있습니다. 어떤 복음서에서는 머리에 부었다고 하고, 다른 복음서에서는 발에 부었다고 전하기도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을 맞이할 때 허그를 하며 볼 인사를 하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고, 발을 씻겨 주기도 하였습니다. 손님을 환영하고, 또한 당신을 귀하게 여긴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풍습입니다.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는 것도 그렇지만, 마리아가 향유를 발에 부어드렸다는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물이면 족하지만, 그러나 값비싼 향유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인이 감당해도 될 그 일을 자신이 직접 하고 있습니다. 발에 기름을 붓기 위해서는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고 허리를 숙여야 가능합니다. 더구나 이 여인처럼, 수건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로 그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윤기나는 머리카락은 여인의 명예요 자존심입니다. 그 머리카락으로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상대방에 대한 최고의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 행동입니다.
명품으로 알려진 옷이나 장신구, 그리고 향품은 당시에도 여인들에게는 로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나 장신구, 그리고 향품의 명성만큼, 자신의 가치라든가 자신의 존재의 의미가 높아진다고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이 여인도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얼마나 부자였는지 알 길은 없지만, 그러나 예루살렘 성문 밖 산기슭에 있는 작은 마을에 살아가는 평범한 여인입니다. 그런 여인이 300데나리온이나 나가는 값비싼 행유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노동자들이 하루 종일 일하고 받은 임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300일을 모아야 할 만큼 값비싼 향유였습니다. 마리아가 어떻게 이런 값비싼 향유를 소유하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이 나드 향유를 갖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또 절약해서 돈을 모았을 것입니다. 사치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을 지닌다는 것은 곧 평범한 한 여인으로서 기대할 수 있는 행복을 의미하였습니다. 그 행복을 얻기 위해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향유에는 지난 날의 노동과 절약과 인내와 기다림이 다 들어 있습니다. 행복에 대한 기대와 희망도 들어있습니다. 그 나드는 그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드를 아낌없이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를 풀어 머리칼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린 것입니다. 예사롭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성경은 설명해 주지 않지만, 우리는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었던 오빠 나사로를 살려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의 발 아래 앉아 기회있는 대로 열심히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내 생명을 그분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는, 의탁해야 할 주님이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가장 귀한 것을 그분께 드리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존재의 의미라고 여기며 간직해온 나드를 그녀는 아낌없이 그분의 발에 부어 드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털로 그 발을 씻어드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행동이 곧 그가 하고자 하는 그 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나의 존재의 의미를 지금까지는 이 세상에서, 보이는 것에서 찾았지만, 이제는 오직 주님께 있음을 내가 믿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생명, 나의 구원이십니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고백은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졌습니다. 가룟 유다가 정적을 깬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어떤 말투였는지 아시겠습니까? 마가복음에는 이 말을 한 사람을 특정하지 않고, ‘어떤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면서 여인을 책망하였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이 말을 한 사람이 ‘제자들’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있으면, 그 중에서도 스피커를 자처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나까? 여러 사람이 그렇게 화를 내고 분개하였고, 그 중에서도 가룟 유다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한 것입니다.
유다의 발언은 지극히 합리적입니다. 정의롭습니다. 우리들도 다른 제자들이나 어떤 사람들처럼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있습니다. 사회정의를 생각한다면 마땅히 품어야 할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 해도 그것은 타당한 말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다른 사람을 향하여 퍼붓는 비난의 말은 지극히 타당할는지 모르지만, 그 자신의 삶은 자신의 말에서 한참 빗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내로남불이라는 신조어는 노무나 익숙합니다. 남이 하는 어떤 행위를 비난하지만, 자신도 똑같은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판단하고, 그 잘못을 지적하기는 쉽지만, 그러나 그 자신 또한 자신이 비판했던 그 문제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날카롭게 다른 사람을 비판하면서, 자신이 무척이나 선하고 완전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비판의식을 비판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비판의식을 똑같이 자신의 삶에도 적용해야 하는데, 문제는 그의 비판의식과 실제의 삶이 일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은 의롭다고 착각하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나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자존심 상하기도 하고, 자신의 명예가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변명하고, 말도 안되는 논리로 합리화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여당이나 야당, 진보나 보수, 가릴 것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에서 가룟 유다는 지극히 합당한 말을 하였습니다. 분개하고 화까지 내는 그 말투를 보면 가난한 자를 위하는 그의 마음이 지극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의 속마음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이 말을 한 것은 가난한 자를 생각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돈궤를 맡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에서 회계를 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계산이 밝고 규모있게 공동체의 살림을 해나갈 수 있는 똑똑한 사람이었고, 또 믿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돈궤에 담겨있는 돈 중에서 일부를 훔치곤 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돈을 벌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아마도 헌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 가운데 일부를 빼돌려서 사적인 용도로 쓰곤 하였다는 것입니다. 회계부정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의 문제는 자신의 생각, 혹은 가치관이나 사상이 자신의 실제 삶과 하나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은 돈을 사랑하고 돈을 탐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내어놓을 줄 알아야 한다고 분개하며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이나 사상은 가장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것 같지만, 그 자신은 여전히 자신의 탐욕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비난에 예수님은 “가만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은은 “그가 지금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너희도 주님의 죽음 앞에서 주님의 몸에 부어드릴 향유를 준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마지막 유월절, 희생양으로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유월절이 되기까지 엿새 동안,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정화하고 백성들을 가르치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마지막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 희생양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다는 사실은 생각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여전히 돈을 탐하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권력이요 명예였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임하였을 때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까, 예수님의 보좌 좌우 편에 과연 누가 앉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를 두고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죽음 앞에, 그의 십자가 앞에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삶의 의미요 삶의 희망이었던 나드 향유도 아낌없이 그분의 발에 부을 수 있습니다. 무릎 꿇고 머리를 숙여 나의 머리칼로 주님의 발을 씻어드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같은 헌신은 주님의 대속의 은총을 깨닫고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온전히 깨달은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7절 이하에서 바울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전에 좋던 것, 이전에 가치와 의미를 두었던 모든 것을 오히려 해로 여기고, 온전히 내려놓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그 의미를 붙잡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인간적인 탐욕에 매여 있습니다. 권력이나 재물을 좇는 것입니다. 그의 삶과 그의 입술이, 그의 행위와 고백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나드 향유는 향기가 되어 온 방 안에 가득하였습니다. 이것이 진정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알고 그 죽음에 연합하며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들의 향기입니다. 굳이 말하지 않고, 누그를 비판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아도, 그의 몸에서, 그의 삶에서 그 향기는 풍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삶에서, 내 인격에서는 어떤 향기가 풍겨나고 있을까요? 그 향기를 나의 주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함께 맡을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아름다움 아닙니까? 굳이 명품 의상이나 향수를 가지고 나 자신을 꾸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향수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아직 목욕이나 샤워 시설이 없었던 시절에 유럽에서, 귀족들이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가리기 위한 용도로 발전하고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의상으로, 향수로, 자신을 가리기에 급급한 것이 사람입니다. 하지만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께 내 삶을 맡기고 헌신하고, 진정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존경한다면, 그 삶이 곧 향기가 되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 향기를 발하는 삶이 되기를 우리는 또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어떤 사람이 주님께 달려와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주님의 모든 계명을 어려서부터 성실하게 지켜온 그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네 보화를 나누어주라는 것입니다. 보화는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가장 귀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입니다. 재물이기도 하고, 권력이기도 합니다. 지식이기도 합니다. 내 삶을 가치 있게 하고 의미 있게 하고, 나를 구원할만한 가치와 힘이 있다고 믿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가난한 자들과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단은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 그리고 그 죽으심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가능한 것입니다. 진정한 제자됨의 조건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낌없이 그분의 발에 나드 향유를 부을 수 있는 참된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