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0/수. 생태적 공부, 격물
공부
나는 교육을 말하지 않는다. 오직 공부를 말할 뿐이다. 가르침을 말하지 않는다. 오직 배움을 말한다. 왜냐하면 교육과 가르침 자체가 권력의 지배방식이기 때문이다. 교육은 공부와 동거할 수 없다. 가르침은 배움과 동거할 수 없다. 교학상장 줄탁동시의 안이한 환상과 합리화에 속지 않는다.
교육과 가르침은 인간을 부단히 대상화하지만 공부와 배움은 인간 스스로가 주체화한다. 대등한 인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생태적 공부
생태적 공부 혹은 배움은 자연 안에서 그리고 사회 안에서 인간이 주체로 살아가는 일체의 과정 자체다.
그런데 왜 공부 앞에 생태라는 수식어를 넣는가? 왜냐하면 생태가 곧 개체와 환경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과정과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과정이며 관계다. 개체도 과정이며 관계다. 개체의 목적은 온통 좋은 관계를 맺는 데 있다. 과정의 목적이 관계이다. 자연에서는 적응이고 조화이며 사회에서는 의미이고 인정이다. 행복은 이러한 목적이 성취된 상태이다. 그게 삶 아닌가? 공부 혹은 배움은 이런 관계적 존재가 되기 위해 개체가 환경과 부단히 교섭하며 성장하고 성숙해가는 일체의 과정이다. 결국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은 생태적인 사람이 되고 생태적인 삶게 된다. 관계지향적이며 조화롭게 적응된 삶을 살기 때문이다.
격물
주자는 예기의 대학과 중용을 따로 독립시켜 논어, 맹자와 더불어 4서를 확립했다. 대학에서 공부의 제일 중요한 방식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격물(格物)의 공부다. 격물의 목적은 치지(致知)에 있다. 하지만 격물치지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대학에서는 모든 사물(事物)에 본말과 시종이 있다고 말하고, 그것을 치밀하게 규명해 이해하는 것을 격물공부라고 말한다. 즉 세상 모든 사건과 사물이 모두 격물 공부의 대상이다. 그렇게 하는 공부를 평생 놓치지 않고 하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의 태도다.
하지만 격물의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라 선조들도 많이 고생을 했다. 격물 공부한다고 사물을 뚫어지게 들여보다가 안질에 걸리기도 하고, 생각이 너무 많아 어질병에 걸리기도 하였다. 그러다 격물 공부를 작파하고 책을 달달 외우는 공부에 빠져 관념론적 독선주의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나마 격물공부에 충실했던 이들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자들이 아닐었을까 싶다.
나의 경우는 산에서 3년을 보내다보니 격물 공부의 방법이 새삼 절실하게 다가왔다. 처음엔 중부지방에 살다가 남부지방으로 와 산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온통 자극이 되었다. 하지만 초여름이 되자 온통 낯선 식물과 곤충이 마구 나타나기 시작했다. 풀, 나무, 곤충, 고사리, 버섯, 지의류, 새 등 수도 없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생명 앞에 나는 절망을 느꼈다. 멍텅구리가 된 것 같았다. 그래서 공부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간혹 특이하게 관심을 끄는 것 하나씩 알아가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이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렇게 3년을 보내니 격물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사물과 만남이 많아질수록 앎도 많아지고 깊어지고 맛도 알게 되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내 앎이 해변의 모래알 정도도 안 되리라는 것도 더 확실해졌다. 관계를 통한 앎이 깊어질수록 나라는 존재가 자연 안의 관계적 존재임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그래서 기꺼이 거미가 되기로 했다. 물거미이든 땅거미든 늑대거미든 무당거미든 상관없다. 그저 내가 만나는 세상의 일과 사물과 가능한 관계의 실을 이어 잠시 흔들리다 갈 뿐이다.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 자연의 모든 존재가 그렇게 살고 있다.
그렇다. 치지란 방향이지 목적이 아니다.
권위 있는 이의 가르침 따위는 필요 없다. 내가 직접 감각하고 느끼고 알아가지 않는 한 그것은 내게 의미가 없다. 권력이 있다고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내겐 격물공부로 충분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