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예송과 갑인예송
기해예송(己亥禮訟)은 1659년(현종 즉위) 5월 효종이 서거하자,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예설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서인들은 효종이 인조의 중자임을 들어 기년복을 주장하였고, 남인들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여 인조의 장자에 해당한다고 하여 삼년 복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영의정 정태화는 『경국대전』을 근거로 장자와 차자를 구분하지 않는 기년복의 시행을 주장하였다. 현종은 몇 번의 수의(收議)를 거쳐 기년복으로 확정하였다. 그러자 남인 윤선도가 서인들의 기년 설을 ‘효종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이분화’한 것이라고 공격하였다. 이에 서인들이 격분하여 윤선도를 유배시키고 예송에 가담한 남인들을 조정에서 축출하였다.
현종 대에 일어났던 두 차례의 예송은 효종이 종법적(宗法的) 지위에 대한 학자들 간의 인식 차이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즉 효종을 인조의 장자로 볼 것인가, 차자로 볼 것인가에 따라 자의대비(慈懿大妃, 趙大妃)의 복이 결정되는 것이었다.
모든 문제는 1645년(인조 23) 2월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6월에 인조가 적장손인 세자의 아들을 제치고 차자였던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시작되었다. 효종은 인조의 차자였지만, 종법에 의하면 차자도 대통을 계승하면 장자가 되는 규정이 있었으므로 그를 장자로 볼 여지가 있었다. 서인들은 그를 차자로 인식하여 기년복을 주장하였고, 남인들은 그를 장자로 간주하여 삼년 복을 주장하였다. 이 예송에는 16세기 이후 조선에서 예학이 크게 발달하였고, 서인 학자들이 예법의 보편성을 강조한 반면, 남인 학자들은 왕실 전례의 특수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두 차례의 복제 예송이 더욱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효종이 서거한 이후, 당시 정권을 주도하고 있던 서인들은 계모후(繼母后)인 자의대비의 상복을 기년복으로 정하고자 하였다. 이는 효종이 인조의 중자(衆子, 차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인 학자였던 윤휴(尹鑴)는 국왕의 상에는 모든 친족이 참최복(斬衰服, 3년)을 입는다는 『주례』규정을 들어 참최복을 주장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1660년(현종 1) 3월에 기년복의 기한이 다가오자, 남인 허목(許穆)은 ‘왕위를 계승한 아들은 장자로 간주한다.’는 『의례』주소(註疏)를 근거로 자의대비의 복제 개정을 주장하였다. 이에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등의 서인은 『의례』주소에서 대통을 계승해도 참최를 입지 못하는 네 가지 예외 규정[사종설(四種說)] 중에서 세 번째에 있는 ‘체이부정(體而不正: 서자가 계승한 경우)’을 들어 기년복을 주장하였다. 서인과 남인들의 논쟁이 격화되자,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태화(鄭太和)는 장자와 중자를 구분하는 두 설을 다 버리고, 『대명률』과 『경국대전』에 ‘어머니는 장자와 중자에게 모두 기년복을 입는다.’는 규정(이를 ‘국제 기년복’이라 함)을 들어 기년복의 시행을 주장하였다. 국왕은 몇 번의 수의(收議)를 거쳐 기년복으로 확정하였다. 그러자 남인 윤선도가 상소하여 송시열의 기년설을 ‘효종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이분화[비주이종(卑主貳宗)]’한 것이라고 공격하였다. 이에 서인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윤선도를 탄핵하여 삼수로 유배시켰다. 조경(趙絅)·권시(權諰) 등의 남인들이 윤선도를 옹호하자, 서인들은 예송에 가담한 남인들을 대거 조정에서 축출하고 정권을 독점하였다.
기해 예송은 비록 효종의 장자 차자 지위를 구분하지 않는 정태화의 ‘국제 기년복(國制朞年服)’이 채택되었지만, 기년복은 기년복이었으므로 서인들의 승리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 때 장자 차자를 구분하지 않은 것은 이로부터 14년 후 제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 일어나는 빌미가 되었다.
조선의 정치는 1623년(인조 1)의 인조반정 이후 효종 때까지 50여 년간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참여하면서 경제와 비판을 기조로 하는 이상적인 붕당정치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기해예송으로 인하여 당파 간의 감정이 격화되고 군자 소인의 구별을 주장하는 흑백 논리가 팽배해지면서 상대 당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일당 전제와 치열한 정쟁으로 여러 차례의 환국(換局)을 겪는 등 급격한 정국의 변환을 초래하게 되었다.[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