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백사진
책 읽다 흑백사진을 발견했다.
거제의 구조라에서 학동으로 가는 배에 탄 사람들의 풍경이다. 1974년 초겨울에 찍은 건데 차가운 바닷바람을 헤치고 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오래된 삶을 만났다. 반년 동안 거제에 머물며 구조라와 학동을 여러 차례 다닌 적이 있다. 거제도가 육지와 연결된 때는 1971년 거제대교의 준공이었지만, 개통 이후 1974년 까지도 섬의 내륙 도로는 열악했을 거다.
구조라는 반달 모양의 모래 해변이 아름다운 곳이다. 해수욕장 맞은편의 윤돌섬은 바다 수영인들이 해마다 오픈 워터로 왕복하며 수영을 즐긴다. 거제 살면서 꼭 한번 구조라의 윤돌섬 수영을 해보고 싶었는데 못 한 게 내내 아쉽다. 문화원 화실 동료들과 번개팅으로 놀러가 참소라를 잡았는데 그때 잠깐 수영을 한 게 전부였다. 잡아온 참소라는 알이 크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학동은 몽돌이 깔린 해수욕장이 유명하고 수산마을의 별신굿 또한 이름났다. 별신굿은 예부터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 의식인 동제(洞祭)로 거제지역 어촌마을을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매년 진행하고 있는 곳은 동부면 수산마을의 별신굿이 유일하다.
사진을 찍은 해의 십년 전에는 장마 통의 산사태로 장승포 주민과 경찰관 등 수십 명이 유명을 달리한 참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추모비가 능포에서 거제 문화원 가는 길에 서 있다. 섬사람들은 크고 작은 아픔을 겪으면서 삶을 키워냈다. 지금은 일주도로와 동서간의 교통망이 미끈하게 연결되었지만 당시 구조라와 학동은 해안의 가파른 산이 가로막아 배로 이동하는 편이 수월했던 모양이었다.
사진작가의 카메라가 터진 곳은 배의 뒷부분인 고물이다. 이물 쪽에는 건장한 사내들이 찬바람에 부딪치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고 가운데 붙박이 의자에는 흰 두루마기 차림의 노인이 중절모를 쓰고 카메라를 응시한다. 앞의 오른쪽에 국민학생 정도의 사내아이가 인상을 찌푸린 채 앉았는데 카메라의 등장이 불편한 기색이다. 그는 지금 육십 전후의 장년이 되었으리라. 털실로 짠 목도리를 두른 치마 차림의 아낙은 소년의 뒤에 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렸는데 우는 게 아니라 부러 카메라의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다. 아낙의 앞쪽에 연탄 몇 장이 오도카니 자리를 차지하고 파도에 몸을 맡긴다. 아낙 뒤의 아낙은 수건 같은 방한용구를 머리에 친친 감고 보퉁이를 엉덩이로 깔고 몸을 웅크린 채 바닷바람을 견디는 모습이다. 이물 너머로 출렁이는 겨울 바다와 봉긋하게 솟은 섬의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겨울 끝물부터 동백의 붉은 꽃이 피울음을 토하듯 연하여 피고, 푸른 솔과 후박나무, 돈나무가 무성한 초록 빛을 띠는 산이다. 섬의 산들은 일제히 바다에 빠진 듯 종아리를 짠물에 담근 형국인데, 사철 푸른 곰솔과 화강암 바위가 어우러진 빼어난 풍광이다. 선수(船首) 쪽의 사내들은 양복을 입고 두 다리를 감싸안은 채 생각에 잠기는 사람,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무연히 바라보는 사람 등 포즈가 각색이다. 나무 의자에 앉은 노인 옆에 또 다른 노인은 배의 앞을 보고 있고, 중절모의 노인은 구태여 카메라를 피하지 않고 외려 궁금한 듯 바라본다. 바람은 쌀쌀했으나 웅크린 사람들의 모습은 어쩐지 억세고 강하게 보인다. 사나운 바다와 거친 태풍을 견뎌낸 탓일까.
거제는 한양과 워낙 멀리 떨어져서 조선 시대에는 유배지로 쓰인 섬이었다. 한국 전쟁 때는 포로수용소를 급하게 지어 피난민과 17만의 포로, 주민을 합해 한때 섬은 북새통을 이뤘다. 휴전과 함께 풀려난 포로들은 북으로 남으로 떠났는데 그 중에는 섬에 남아 정착한 포로도 있을 거라 짐작된다. 이후 조선업의 발달로 양대 조선소와 협력업체의 노동자들이 대거 입도(入島)해서 살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조선소에서 퇴직한 노동자가 섬에 정착해서 섬 주민이 되어 지금 원주민의 비율은 30%정도이고 나머진 외지인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대만(台湾)의 경우 청나라 시절에 타이완 섬으로 이주한 한족의 후손으로, 대만 인구의 85%를 차지하는 본성인(本省人)과 대륙에서 공산당을 피해 나온 국민당의 외성인(外省人)과의 해묵은 갈등에 비하면 거제도 원주민들은 피난민들을 먹이고 입혀주었다. 섬사람들은 전쟁의 공포와 고향을 잃은 피난민들을 따뜻한 인간애로 품어준 것이다. 장(醬)을 헐고 쌀을 모아 주린 배를 채워주던 인심은 지금도 거제 사람들의 공감과 연대 의식으로 흐른다.
육지와 배로 이동하던 시절 거제는 섬안의 도로도 마찬가지로 열악했을 거다. 지금은 차로 이동해도 구조라와 학동은 십 분이면 닿는 거리다. 배를 타고 생필품과 연탄을 싣고 이동하는 주민들의 삶은 신산했으리라 짐작된다. 작가 강운구는 사람과 풍경에서 역사와 인문을 표현하는 에스노그라피(Ethnography) 작가다. 어느 전시회 강운구 작가의 서문에서 ‘사람들 얼굴 위로 빛과 그늘이 부단히 교차한다. 시간은 시계 속에 그대로이고 사람들은 지나갔다. 흐르는 것은 사람이다.' 라고 말한다. 존재의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유한하면서 이어지는 시간성을 인간의 체취로 담아내려는 그의 작품은 다큐멘터리 같기도 시대의 만화경 같기도 하다. 범상한 듯 범상치 않은 작가의 시선은 삶의 구석구석에서 명멸하는 인간의 순간을 포착한다. 그것을 심상치 않은 의미로 포획하는 건 순전히 독자의 몫이지만.
불문학자 황현산 선생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를 읽다 만난 흑백사진에서 거제의 바닷바람과 그 시절의 사람을 만났다. 떠나온 섬의 따스한 사람들이 사뭇그리운 밤이다.
구조라 해변과 윤돌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