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협정 70주년 기획] 초대 주한 교황사절 패트릭 번 주교의 순교 ‘그날의 기록’
“한국인 섬기려 한 패트릭 번 주교의 결정이 순교로 이끌다”
- 초대 주한 교황사절 패트릭 번 주교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한 민족사의 대비극 6·25 전쟁.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간 이어진 동족상잔은 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목숨마저 앗아갔다. 그 희생자 가운데는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받도록 이바지한 인물이 있었다. 초대 주한 교황사절 패트릭 번(Patrick J. Byrne, 1888~1950, 메리놀외방전교회) 주교다.
서울에서 북한군에 피랍된 번 주교는 ‘죽음의 행진’을 겪고 중강진 수용소에서 순교했다. 사인은 감기가 악화된 폐렴. 향년 62세였다. 번 주교의 구체적인 임종은 함께 납북된 선교사들이 석방돼 증언하기 전까지 쭉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교황청은 물론, 고국인 미국 교회에서도 그의 행방과 생사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정전 협정 체결 70주년을 맞아 미국에서 보도됐던 70년 전 당시 기사를 본지가 재조명해 ‘그날의 기록’을 소개한다.
철의 장막 너머 침묵하는 번 주교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교계 언론은 한국 신자와 자국 선교사들의 안위에 대한 크나큰 염려를 일제히 쏟아냈다.
세인트루이스대교구가 운영했던 주간지 ‘세인트루이스리뷰’는 1950년 6월 30일 자 신문에서 “현재 남한에 메리놀회와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사 등 미국인 1700명이 남아 있다”고 긴급 보도했다. 발행 당시 이미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서울을 점령한 뒤였다. 전쟁으로 연락할 길이 없는 탓에 교황청도 “번 주교와 선교사들이 서울에 남아 있을 것”이란 추정만 내놓을 뿐이었다. 마침내 번 주교의 이름은 신문 1면에 등장하기에 이른다.
미국 필라델피아대교구 주간지 ‘가톨릭 스탠다드 앤 타임스’(CS&T) 1950년 7월 21일 자 1면 기사 제목은 ‘철의 장막 너머에서 침묵하는 번 주교’. 북한 점령하의 서울에 있을 번 주교와 비서 윌리엄 부스(메리놀회) 신부로부터 아무 소식이 없다는 뜻에서 붙인 제목이다. ‘철의 장막’은 공산권과 비공산권의 경계를 뜻한다.
- 6·25 전쟁 소식을 전하는 세인트루이스리뷰 1950년 7월 7일자 기사. 당시 한국 가톨릭교회 선교사와 정치인 사진을 수록했다. 맨 위 왼쪽부터 패트릭 번 주교·장면(요한, 주미 한국대사)·토마스 퀸란(춘천지목구장) 몬시뇰·패트릭 브레넌(광주지목구장) 몬시뇰. 이 가운데 번 주교와 브레넌 몬시뇰은 전쟁 중 순교했고, 퀸란 몬시뇰은 훗날 주교품에 올랐다.
“떠나시오. 우리는 서울에 남을 것이오”
그해 7월이 끝나갈 무렵,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미국 주교회의가 운영하던 ‘가톨릭 뉴스 서비스’(CNS)가 1950년 7월 24일 “번 주교가 대피하는 대신 서울에 남았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CNS는 “번 주교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도 ‘전혀 놀랍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적성국인 미국인이면서도 일본에 남아있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톨릭 스탠다드 앤 타임스’는 또다시 7월 28일 자 신문 1면에 이렇게 실었다. ‘번 주교가 여전히 서울에 있는 것으로 보고됐다’. 이어 8월 7일 번 주교의 행적을 담은 또 다른 자료가 CNS를 통해 공개됐다. 6월 27일 미국 정부 요청에 의해 일본으로 피신했던 조지 캐롤 몬시뇰이 보낸 편지를 CNS가 보도한 것이다. 그는 편지에 27일 오전 번 주교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를 적었다. “아침 식사를 하는데 번 주교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몸을 피하시오. 나는 비서 부스 신부와 함께 서울에 남을 것이오.’”
평양에서 찾지 못한 번 주교
‘세인트루이스리뷰’는 1950년 9월 29일 자 신문에서 미국 대사관을 통해 입수한 정보로 “번 주교가 평양에 수감됐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번 주교가 북한군이 주는 음식을 잘 소화하지 못해 건강이 매우 취약하다는 소식도 전했다. 이처럼 번 주교와 부스 신부는 7월 11일 서울대교구 주교관에서 북한군에 붙잡혀 인민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일 평양으로 이송된 것으로 알려졌다.
1950년 9월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고,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에 입성했다. 하지만 아무리 샅샅이 찾아도, 평양의 무덤이란 무덤을 다 뒤져봐도 번 주교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CNS는 10월 30일 자 보도에서 “평양에서 해방한 남한 포로들에게 물었지만, 모두 외국인 포로가 수감된 건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고 밝혔다. 평양 가톨릭 신자들도 주교의 행방에 대해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실은 평양 입성 며칠 전 북한군이 그를 끌고 갔기 때문이다.
- ‘메리놀회의 두 번째 순교자’. 번 주교를 다룬 세인트루이스리뷰 1952년 11월 7일 자 기사.
모두가 주교를 위해 기도했지만…
평양에서의 수색이 허사로 돌아갔지만, 미국 교회는 마냥 실망하지 않았다. 메리놀수녀회는 11월 24~26일 전 세계 신자들과 번 주교를 위한 사십시간 기도를 봉헌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번 주교는 기도 시작 이튿날인 25일 수용소에서 주님 곁으로 떠났다. 이를 알 턱이 없던 신자들은 그저 머나먼 극동 땅에서 추위에 떨고 있을 번 주교를 떠올리며 정성을 다해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메리놀회 뉴욕 본부는 12월 29일 번 주교와 부스 신부를 위한 장엄 미사도 봉헌했다. 번 주교가 세상을 떠난 사실을 모르던 언론은 꾸준히 그의 행방에 대한 추측을 내놓기만 했다.
1951년 1월 바티칸 관영통신사 ‘피데스’는 믿을 만한 취재원을 통해 입수한 내용이라며 “번 주교가 다른 선교사들과 국경을 넘어 만주로 끌려갔다”고 보도했다. 접경 지역인 중강진에 수용된 것이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CNS 특파원 패트릭 오코너 신부가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추측”이라고 일축하는 일이 벌어진 사실들이 당시 기사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편, 기사에 ‘루이스 장’(Louis p. Chang)으로 등장하는 한국인이 “번 주교가 초대 평양지목구장 시절 본인이 세운 성당 근처에 억류돼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 내용이 CNS에 실리기도 했다. 장면 총리의 형제라고 기재된 것으로 보아, 장발(루도비코) 화백인 것으로 확인된다. 이처럼 번 주교의 행방과 생사가 묘연한 어지러운 형국 가운데, 메리놀회는 1951년 설립 40주년 돌을 맞았다.
번 주교, 순교자 반열에 오르다
1952년 11월 1일 마침내 교황청은 “확증은 없지만, 번 주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발표했다. 북한이 유엔에 제출한 외국인 포로 목록에 비서 부스 신부는 있는데, 번 주교는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CNS가 발행하던 ‘가톨릭 월드 인 픽처스’는 1면에 번 주교 얼굴과 함께 이 소식을 실었다. ‘가톨릭 스탠다드 앤 타임스’도 1952년 11월 14일 자 신문 1면에 특필했다. ‘한국인을 섬기려 한 주교의 결정이 순교로 이끌다.’
미국 뉴욕 메리놀회 본부는 5일 장례 미사를 거행했고, 메리놀회 총장 레인 신부는 전기 작업에 착수했다. 1955년 출간된 번 주교의 전기는 같은 해 서울대목구가 운영하던 경향신문에 연재됐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1994년 국내에도 정식으로 출간됐다. 성바오로출판사가 펴낸 「기억의 돋보기 : 패트릭 번 주교의 생애」이다.
- ‘사망으로 추정’. 가톨릭 월드 인 픽처스 1952년 11월 3일 자 1면에 실린 패트릭 번 주교 기사. 교황청이 그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발표한 내용을 담았다.
- 1면에 번 주교의 순교를 특필한 가톨릭 스탠다드 앤 타임스 1952년 11월 14일 자 신문
- 1994년 성바오로출판사에서 펴낸 「기억의 돋보기 : 패트릭 번 주교의 생애」 표지. 번 주교와 절친했던 전 메리놀회 총장 레인 주교가 1955년 출간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3년 7월 23일, 이학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