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기도 일기(홍진호, 제노, 첼리스트)
그레고리안 찬트, 바흐의 칸타타, 어린이 성가대, 무반주 모테트를 비롯해 양희은, 이선희, 이상은, 조용필 등 어린 시절 집 스피커에서는 쉴 새 없이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음악을 켜놓고 청소하시는 시간이 시부모님을 모시며 바깥일과 집안일을 병행해야 했던 고단한 어머니의 일상에 몇 안 되는 나름의 힐링 시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직 생활을 하셨던 어머니가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시면 어머니의 곁을 졸졸 쫓아다니며 옆에서 크레파스로 그림도 그리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 따위를 집으며 한시도 어머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던 그때가 생각납니다.
그날도 역시 집안을 가득 채웠던 음악은 그저 생활의 일부일 만큼 익숙해져, 별다른 감흥 없이 가끔은 익숙해진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숙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에 울려 퍼졌던 낯선 야수의 음악이 저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는 시발점이 됐습니다. 첼로 연주였습니다. 방바닥을 통째로 흔들며 가슴속을 무언가로 박박 긁어 대는 듯한 강렬한 소리는 고작 열한 살이었던 어린 저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그와 동시에 저런 소리를 내는 게 무엇인지 궁금하게 했으며 더 나아가 저 소리를 내고 싶다는 욕심까지 생기게 했습니다. 한 달 가까이 식음을 전폐하며 첼로를 배우게 해달라고 난데없이 생떼를 부리는 철부지 아들에게 풍족하지 않았던 경제적 상황과 훌륭한 클래식 악기 연주자로 성장하기에는 다소 늦은 감이 있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고려해 부모님께서는 취미로 한다는 전제하에 마침내 첼로 수업을 받게 해주셨습니다. 처음으로 악기를 손에 쥐고 활을 그었을 때 고스란히 가슴에 전달되던 첼로의 울림은 방바닥까지 흔들며 포효하던 야수의 울림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첼로와 급속도로 사랑에 빠진 저는 음악과 함께 성장하는 과정이 마냥 순탄치는 않았지만, 이제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떼어낼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제가 첼로 연습을 하거나 공부를 할 때마다 다른 방에서 묵주 기도를 하시던 어머니는 종종 기도 제목을 기록하시기도 했는데 어머니의 기도 일기에는 늘 남을 아끼고 배려하는 아이로 성장하게 해달라는 간절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첼로에 욕심이 생기면서 남보다 더 잘해야 하고 빨리 성장해서 친구들의 악기 실력을 따라잡아야겠다는 욕심만 커지던 저를 보며 걱정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부끄럽게도 이런 욕심을 아직 완전히 버리지 못했지만, 현재도 진행 중인 차곡차곡 쌓여가는 어머니의 기도 일기처럼 저 또한 조금씩은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통화할 때마다 이어지는 어머니의 잔소리에 오늘도 또 한 번 마음이 따듯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