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당무계한 백선엽 장군의 독립군 토벌설을 밝힌다.
작성일: 2020-05-28 14:00:53
내가 이 명제에 대해서 여러번 말했었다.
오늘 또 김대중 아들이 헛소리를 하니 나도 또 밝히겠다.
다부동 전선의 백선엽 장군
--------------------------------------
백장군은 40년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자무스의 만주군 신병훈련소에 교관요원으로
있다가 간도특설대에 전속했었다.
이 문제를 자기 아버지가 경북 경산군의 보도연맹원이었다가 처형당해서
대한민국에 원한이 있던 민족문제 연구소장 임모가 모사를 부려 군에
친일 프레임을 걸 상징 인물을 찾다가 백선엽 장군이 걸려들었고
그 공작에 친일파의 대표 브랜드로 낙인찍혀 버렸다.
--------------------------------------------------------------------
임모!
항일만 외치면 민족의 지고지순한 지도자가 되냐?
문학을 공부했고 제법 허우대가 멀끔해서 문학 공부하겠다고 따라다니는
아줌마들에게 황당한 개인 교습료를 갈취한다는 악명이 자자하더라 .
더 이상의 소문은 밝히지 않겠다.
------------------------------------------------------------
이 진보 집단의 저질 놈들아 !
그리고 백선엽 이야기만 나오면 입에 게거품을 물고 날뛰는
항일 지사 코스프레하는 얼간이 홍위병 놈들아!
기본적인 한마디를 물어보자 !
그때 만주의 항일 조직은 모두 앞에 리더, 또는 지휘자의 이름을 붙여 통칭되었었다.
김홍광부대 ,최현부대, 박득범,부대라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백장군이 토벌했다면 그 '독립군'이라는 부대가 어느 부대였고 토벌당한
'독립투사'가 누구였는지를 먼저 밝혀라 .
그것이 전문성을 내세우며 국고까지 지원받았던 기관의 예의다.
지금 '독립군'이라는 아리송한 美稱부터가 진보 집단의
모략 수준이 얼마나 유치하고 무식한지를 밝히고 있다.
거짓의 허상이 6.25 공산 남침에서 몸받쳐서 싸웠던 창군 원로를 모욕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진정으로 독립군으로 불러 모셔야할 독립군은 양세봉의 부대로서
이 분이 1934년 암살당하고 부대는 몇년 뒤에 소멸하고 말았다.
-----------------------------------------------------------------
-김일성도 길림 육문 중학교에서 퇴학 당한후 유격전을 하겠다고 양세봉의
부대를 찾아갔다가 그가 공산주의자임을 알고 거절하자 비적인 이종락 부대로 갔다.
이 부대에서 김일성은 비협조자 농민들을 목졸라 죽이는 살해 솜씨로 인정받았었다.
이종락도 나중에 김일성이 죽여버렸다.-
------------------------------------------------------------------------------
광복군이 창설되기전 마지막 민족계 독립군 지도자 양세봉 선생.
-1934년 일본의 간계에 암살당했다. 대한민국이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의
경칭을 붙여 줄 부대는 이 분의 부대가 최후였다.
-------------------------------------------------------------
조선인이 많이 거주하던 남만에서 있었던 독립군은 중국인 양정우가 지휘하던
중국 공산당 조직인 동북 항일연군의 한 지대였고 역시 중국 국적의 김일성이 지휘했었다.
독립 운동보다도 약탈과 주민 세금 갈취로 원성이 높던 비적 성격의 집단이었다
.
중일 전쟁이 커지고 배후에 있는 만주의 공산세력에 칼을 뽑아든 일본은
노조에 쇼도쿠 소장이 총괄 지휘하는 일본군 .만주군 .만주 경찰. 그리고 자경단등
무려 7만 병력에 조선 회령의 9전투 비행단까지
동원해서 1939년 10월 대토벌전을 개시했다.
그때 간도 특설대는 김일성과 직접 전투를 한 것이 아니라 주로 조선인 부락등에서
정보 수집과 기타 긴급 출동을 하는 별동대 역할을 했었다.
그러면 최대 인원수 200명의 김일성 부대는 누가 추격했을까?
그것은 통화성 경찰청장 기시다니 류타로가 지휘하는 2,000명의 전투 경찰
특별 공격대였다.[기시다니는 일본 패망후 자살]
절대 간도특설대는 아니었다!
쫓기던 김일성은 버티다 못해 다음해인 1940년 10월 목단강쪽에서 소련으로 도주해서
소련이 조직한 88여단의 대대장으로 해방 때까지 머물러 있었으며 아들 김정일도
소련 하바로브스크 한 병원에서 태어났었다.
-백두산 탄생설을 또 하나의 신격화 거짓이다.-
보기 드문 사진이다. 김일성 본처 김혜순이다. [한성희라는 설이 있지만 그가 육문중학교 시절
사귀던 여자였고 김혜순이 두번째 부인이라는 설이 있다.]
김일성 부대에 30명의 여자대원이 있었는데 김혜순이 가장 예뻤다고 한다.]
그때 일본군의 공세와 공작이 거세서 김일성의 김혜순은 일본군 헌병대 나카지마 다마지로
[長島 玉次郞]공작반에 체포되어 전향 , 고향으로 보내져서 재가했었다.
[1994년까지 평양에서 생존 거주]
북한의 지식인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나카지마 다마지로 소조[曺長 -상사.]
의외로 남한에 알려지지 않았었다.
김일성은 물론 양정우 부대를 모략으로 붕괴시킨 공작의 최고 명수였다
패전후 소련에 잡혀갔지만 정체를 들키지 않아 살아 돌아와서 사도 섬에서 살았다.
--------------------------------------------------------------------
김혜순은 김일성이 쓴 피바다의 연극에서 주연을 했다고 한다.
마누라를 잃어버리자 김일성의 실성하다시피 했다는데
여자없이 못하는 그는 곧 변심해서 부하 지순용의 애인이던 김정숙을 빼앗아 소련으로
넘어가기 전 산중 결혼식을 올렸었다.
그는 정권을 쥐고 유명 요정 세일관 마담[유부녀]을 강간하는등 황음무도한
오입을 즐겼는데 김원봉과 같이 606[살바르산]에 매어 살던 만성의 매독환자였었다.
그 목소리가 해방후 녹음 된 목소리와 달라져서 탁음이 된 것은 이 병의 영향이 크다.
기려야할 "위대한 독립군 지도자"의 한 모습이기에 올려본다.
--------------------------------------------------------------------------------
이때 김일성을 따라다니뎐 최현, 박성철, 오진우, 유경수등
졸개들이 동족 상쟁의 앞장에 섰었다.
창군기의 북한군의 골간이 된 -민족문제연구소가 간도특설대가 토벌했다는- '독립군'들
뒷줄 왼쪽에서 5번재 빨간색 동그라미 류경수(황순희의 남편)
뒷줄 왼쪽에서 6번째 파란색 동그라미 오진우 (인민군 원수)
중간줄 왼쪽에서 1번째 검은색 동그라미 리영호 (인민군 차수)
중간줄 왼쪽에서 2번째 빨간색 동그라미 최광 (인민군 원수)
중간줄 오른쪽에서 1번째 노란색 동그라미 리을설 (제62광수, 현 인민군 원수)
이 '독립군'들이 곧 남한을 피바다로 만드는 민족의 원흉이 되어 남침의 선봉에 선다.
-----------------------------------------------------------------------------------------------
사실이 이러한데 어떻게해서 민족을 침략한 김일성의 전범 집단의
전신을 독립군의 성스런 칭호를 올려햐 하는가 말이다.
백선엽 장군은 김일성이 소련으로 토낀 뒤인 40년 10월 봉천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자무스에 있는 신병훈련소에서 근무했었다.
만주의 공산 유격대 말소후 간도특설대는 열하성으로 이동해서 만주군
연대의 鐵壁 部隊로 개명하고 모택동 군대와 전투를 했었다.
백선엽 장군이나 박정희나 이 부대 즉, 간도특설대가 아닌, 철벽 부대로 전속 명령을 받았었다.
열하성의 모택동 부대는 전면에 조선인 부대가 나타나자 급히 모택동의 근거지 연안에서부터
조선인들을 불러 증원했다.
그때 연안의 조선인 부대는 최창익과 김무정의 휘하에 있었는데 열하성으로
파견한 부대의 크기나 정체, 그리고 임무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이들
토벌에 백선엽 장군의 부대가 출동하기도 한 것으로 추측된다.
다시 밝히지만 이 조선인 부대는 -그 졸병이라해도 -10년 뒤에 모두 북괴군의
간부가 되어 동족상쟁의 남침에 나서는 전쟁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이따위 것들 역시 독립군으로 불러주기에 비참한 6.25남침의 비극을 겪은
민족의 멍든 가슴이 용서하지 않는다.
이것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백장군이 토벌했다는 '독립군' 김일성 부대 졸개 유경수가 지휘하던
105 전차 사단이며 '사이드 카' 부대는 전원 독립군의 후배인 조선족들이다. '
'독립군'출신 유경수는 서울을 점령하자 북괴군 부상병 병상 확보차 서울대학 병원, 세브란스 병원,
적십자 병원에서 군 부상병 포함 일천명의 기동불능 환자를 학살했다.
지난 현충일날 대전 현충원에서 친일파 파묘를 요구하며 창군 원로 묘지에 소돼지 오줌을 끼얹은
민족 문제 연구소 대전지회의 들개들아 !
1950년 7월 이 독립군 유경수의 전차 30대가 대전시가에 뛰어 들어와 미군들과 싸운다고
수백명의 대전 시민을 무차별 사격으로 죽이다가 미군기의 공격을 받고 절반이 파괴 된 뒤에
허겁지겁 도망간 것을 알고나 있나? 대전 시민들이' 독립군'의 정체를 안다면
소돼지 오줌을 네놈들의 상판떼기에다 퍼부어 줄 것이다.
-------------------------------------------------------------------------------------------
그가 동작동에서 묻히지 못할 정도로 죽일 놈의 친일파라면 위대한 민족지도자인
조만식 선생이 왜 귀국한 그를 비서로 채용했겠나?[
--북한에 절망한 백장군이 월남하기전 비서를 몇개월 했었다,
조만식 선생은 김일성이 감금하다가 살해 했다. ---
고당 조만식 선생 -김일성의 부하가 된 남침 때 민족보위상인 최용건을 무척사랑했지만
그는 중국으로 가서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북한에 와서도 조만식 선생을 구할 수가 없었다.
------------------------------------
감수성많은 나이의 젊은 장교인 백선엽 장군은 국가가 망한 민족이라서
동족끼리 싸워야했던 자괴감을 간직하고 있다가 먼 뒷날 자서전을 쓸 때 술회했었다.
한국 출판사에서 혹시 오해가 있을까봐 이 대목을 삭제해버렸지만
그 원고는 일본으로 넘어가서 일본어로 그대로 출판되었다.
이것이 진실인데 백선엽 친일파 공세가 시작되었으나 관료적으로 굳어버린
군의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변명의 보신 체계와 자신이 떳떳하니 조용히 있으면
넘어가겠지하고 수동적인 태세를 견지했던 백선엽 장군의 무대응이 예상치 못했던 온라인의 출현으로
이 황당무계한 거짓은 눈덩이처럼 커져서 구케의원의 기본적인 자격도 없는 경제 사범
애송이에게 이렇게 더러운 수모를 겪는 지경까지 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