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윗이 바라본 그리스도 / 사무엘하 22:36-51
어느 사람이든 자기 미래에 대해 궁금증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의 미래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해마다 새로운 해가 가까워지면, 토정비결을 보는 곳이 바빠지는 것도,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왜 이처럼 미래를 알고 싶어 할까요? 그것은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에 의한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면, 미래에서라도 지금보다 좀 더 나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미리 내다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세상의 누가 인생의 앞날에 대해 미리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인생의 앞날은 운수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인데, 누가 과연 하나님의 일하심을 미리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미래를 알고 싶어 하지만, 알 수 없고 불확실하다고 느껴질 때, 사람은 자연 자신의 미래를 위해, 기도라는 것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미래를 두고 기도하는 것 역시 불확실한 미래가, 자기를 중심으로 펼쳐지기를 꿈꾸는 욕망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간섭하시는 것이라면, 미래 곧 인생의 앞날을 알고자 하는 것은, 불신앙의 산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앞날에 대해 알 필요가 없고, 알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인생이라는 것은, 자기 인생에 대해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시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시는 인생이기에, 분명 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참된 미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내 인생이 멸망으로 끝나느냐, 영생으로 계속되느냐에 대한 관심보다는, 내일의 경제 문제나, 주식 동향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내일은 사는 것이 좀 더 나아질 것인가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의 앞날에 대한 관심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미래를 위해 기도하기보다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지난날을 돌아보며, 무엇을 기도하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 현재가 과거가 없이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기에, 곧 하나님께서 지난 인생을 이끌어 주셨기에, 지금 현재에 이른 것이므로, 그래서 현재를 바라보며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에 감사하지 않고 만족하지 않는다면, 과거를 두고 기도하지도 감사하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만을 생각하며, 미래를 위해 기도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는 지금보다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이끌고 계시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인생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이,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의 의도에 따라주기를 고집하는 것일 뿐입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으로 흘러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곧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흘러가는, 세상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내가 원하는 다른 현실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세계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는 성도는, 자신이 잘되고 못되는 것으로, 기뻐하고 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울고, 기뻐하는 세상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가 중심된 미래를 꿈꾸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미래를 소망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장에 한나의 찬양이 나옵니다. 한나의 찬양이 단지 아이 낳지 못하던 억울한 여인이, 기도하여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긍휼이 사라진 불의한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입니다. 그래서 나온 한나의 찬양은 바로 메시야 찬양이 됩니다. 이러한 메시야 찬양의 역할을 하는 자가 다윗입니다. 다윗이 메시야 역할을 한 그 내용의 감사 찬양이, 오늘 본문 22장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시편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지 않으면, 다윗의 영웅시로 볼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온전하게 행함으로, 여호와께서 구원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자신의 완전함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함을 보여주는 역할입니다. 다윗 자신에게서 완전함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한나의 찬송은 다윗의 찬송과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전쟁이 어떠함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전쟁이란, 이 세상의 질서와 가치를 모두 전복시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질서 속에서 추구하는 가치들을 더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원수임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이 세상의 것들이 아닌 하늘의 것들로 채워주십니다. 그 일을 자기 언약을 따라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눅 1장에 나오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찬송인 1:55절에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언약하신 것을 영원히 하신다고 합니다. 한나와 다윗과 마리아의 찬양이 어떻게 그리스도로 연결되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주의 약속을 믿고 삽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면서,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다윗의 노래에서 바로 그러한 믿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44-45절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전하사 모든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이방인들이 내게 굴복함이여, 그들이 내 소문을 귀로 듣고 곧 내게 순복하리로다.” 다윗의 노래는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는 것이지만, 이 노래에서는 현재 주어진 구원을 감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미래에 주어질 구원을 미리 내다보며, 감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44절에서 다윗이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전하사 모든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셨으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 백성들이 자신을 반역한 일, 곧 압살롬이 반역한 때나 세바가 반역을 했을 때, 백성들이 다윗에게 등을 돌리고, 반역자의 편을 들었던 일을 두고 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구원에 대한 다윗의 노래는, 하나님이 이미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한 감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라는 말을 보면, 다윗언약 안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을, 미리 내다보는 노래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란 이방인을 뜻하는 것입니다. 곧 이방인이 하나님이 모든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신 다윗에게 나아와, 다윗에게 굴복하고 다윗을 섬긴다는 뜻인데, 이것은 다윗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바라보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일을 미리 내다보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언약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다윗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중심으로 흘러가는 세상이었습니다. 언약에 의해서 세상이 어떻게 되어질 것인가를 미리 내다보며, 그 구원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내다보는 세상은, 언약의 성취가 함께 한 세상이었습니다. 곧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메시야가 세상에 오심으로 주어질, 구원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하여 왕으로 세우신 다윗에게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유익을 앞세워 배척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그런 이스라엘에게서 건지시고, 모든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다윗 앞에 나아와 다윗에게 굴복하고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곧 구원이 이스라엘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옮겨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누구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곧 다윗의 노래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바라보는 자의 노래인 것입니다. 자신의 구원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성취되어질 구원을 바라보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사 55:4-5절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의 말과 다윗의 노래가, 같은 맥락의 내용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곧 이사야나 다윗이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성취될, 메시야의 구원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45절의 내용으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메시야의 소문을 듣고 나아와, 순복한다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구원의 노래는, 다윗 개인을 바라보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로 인한 구원을 바라보는 노래인 것입니다. 곧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메시야로 인한 구원을 바라보기에, 47절에서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라고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메시야를 보내심으로 성취될, 구원을 내다보고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성취될 구원이기에, 하나님을 ‘내 구원의 반석’이라고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다윗의 노래를 대하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여러분과 아주 다른 노래를 부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내다보는 것은 기껏해야, 세상에 생존할 동안에 주어질 나의 미래일 뿐인데, 다윗은 세상 안에서의 자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되어질 일을 내다보며, 구원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 노래는 우리에게는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다윗은 메시야의 구원을 내다보고 있고, 메시야가 오심으로 되어 질 일을 바라보고 노래하는 것이지만, 오늘 우리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되어 진 일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래 구원과 상관이 없는 이방인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섬기겠다며 이렇게 나온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다윗은 메시야의 구원을 바라보고 노래하지만, 오늘날 성도는 메시야로 성취된 구원을 기뻐하며 노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구원을 내다보며, 기뻐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51절 “여호와께서 그의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하도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
다윗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다윗과 그 후손이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곧 하나님의 큰 구원과 인자하심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가 큰 구원에 참여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복을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생이야 말로 참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함께 하는 인생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잊는 것이야 말로, 스스로 망하는 길로 달려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성도는 그리스도안의 세계를 내다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안의 세계를 내다볼 때, 눈에 보이는 현실이 결국은, 헛된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절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그 미래가 아무리 잘되고 풍족하면 뭐합니까? 그리스도안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고, 그 세계만이 영원하며, 그리스도 밖의 세상은 사라지는 것이 현실이라면, 세상에서 아무리 잘돼봐야, 결국 헛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현실을 내다보며 살아갑니까? 아무리 예수님을 말한다고 해도, 바라보는 현실이 그리스도안의 세계가 아니라 이 세상이라면, 그는 믿음으로 사는 성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사라질 현실과 함께 어둠에 영원히 묻힐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가 잘된다는 것, 아무런 의미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 인생이 잘된다는 것, 역시 아무런 의미 없습니다. 그리스도안의 세계는,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기뻐하며 감사하는 세계이지, 교회가 잘되고 내 인생이 잘되는 것으로, 기뻐하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윗의 노래를 통해서, ‘나는 무엇을 내다보며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내다보며, 무엇으로 기뻐하고, 무엇으로 울며 살아가는지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성도가 바라봐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본다고 다 믿는 것은 아닙니다. 눈앞에서 뻔히 보면서도 놓치는 것이 많습니다. 요즘 마술하는 것을 보면 눈앞에서 뻔히 보는 것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치 심령술로 홀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눈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눈앞에서 보던 것이 사라지고, 눈앞에서 물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심지어 사람의 몸을 싹둑 자르기도 합니다. 눈을 의심할 정도가 아니라, 바보가 된 느낌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때때로 ‘귀신에게 홀렸나?’라는 말을 합니다. 악한 영의 악한 술책에 빠지게 되면, 눈에 보는 것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마치 귀신에게 홀리듯, 눈앞에서 보는 것도 믿지 못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눈을 우러러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우러러 보아야 합니다. 우리 눈으로 보기를 거부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눈을 들어 주님을 향하면 주님이 보이고, 빛을 향하면 빛이 보입니다. 세상을 향하면 세상이 보이게 꼬이고, 어둠을 향하면 어둠을 보게 꼬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께 눈을 고정시키자는 뜻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가데스 바네아에서 큰 실패를 맛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므로 하나님께서 불 뱀을 풀어 백성들을 물어 죽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불 뱀에게 물린 사람들이 높은 장대에 달린 구리 뱀을 보게 하였고, 구리 뱀을 보는 사람은 모두 살았습니다. 높은 장대에 달린 구리 뱀에게 잠깐 고개만 들면 될 것을, 사람들은 들지 않고 죽었습니다. “그걸 본다고 낫겠나?”라고 했을 것입니다. 사무엘하 22:25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의 눈앞에서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 죄를 씻어 깨끗하게 하시고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진짜로 지켜보는 것, 특히 나를 우러러 보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상대방에게 아주 중요한 축복입니다. 우리가 봐주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도 복을 받습니다. 누군가를 보아줌으로써 복을 받는다는 사실은, 아이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열심히 장난하고 놀면서도, 끊임없이 부모님 쪽을 보면서 “엄마, 아빠, 여기 좀 보세요”라고 합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복을 받고,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십자가가 존귀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내가 십자가를 통하여 복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히신 십자가를 밝히 바라보면, 십자가가 축복이 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축복이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통하여 얻는 복과 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춘추전국시대에 한비자라는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학자였고, 책략가였고, 전국책이었고, 정치에 조예가 깊고 뛰어난 학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분, 오두, 내외저설, 세림, 세난’과 같은 책을 썼습니다. 진시황은 한비자의 책을 보고, 그의 지식에 감탄하여 그를 얻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한 사람을 얻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비자는 그 후에 다른 신하의 모함 때문에 진시황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의 책 ‘오두’에 나온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송나라에 어떤 농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토끼가 세차게 달려와, 밭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의 그루터기에 부딪쳐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운이 좋게 토끼 한 마리를 얻은 농부는 그 후로 농사는 안 짓고, 매일 그 나무 그루터기만 쳐다보고, 토끼가 달려와 부딪치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농부는 결국 세인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멀리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고, 땅만 보는 것은, 그 자체가 어리석은 일입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아닌, 세상의 사람들만 바라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령이 아닌 육체에만 집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베드로후서 1:9절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어리석은 자는 영적 눈을 뜨지 못한 자입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은 사람입니다. 눈에 밝히 보인 십자가를 보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밝히 보게 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속죄를 잊지 않고, 십자가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복음으로 무장한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놀라우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실패의 자리, 곤고한 자리에서도 주님을 부르짖으며, 성공한 자리, 형통한 자리에서도 주님을 높일 수 있는, 저희들의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온 세상이 그리스도 예수, 만왕의 왕 되신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옵소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다윗의 찬양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삶에 이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깊은 말씀의 은혜들이 양식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날마다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삶게 하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구원하심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힘과 구원이 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높이며, 만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삼고, 그 분만을 바라며, 그 분만을 의지하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