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열왕 4,42-44; 에페 4,1-6; 요한 6,1-15
+ 오소서 성령님
지난 한 주 안녕하셨어요? 무더위에 지내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오늘은 제4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인데요, 교황님께서는 2021년, 코로나-19의 세계적 유행으로 더 큰 외로움과 고통 중에 계신 어르신들을 위로하고, 신앙의 전수를 비롯한 가정과 사회에서 어르신들의 역할과 중요성을 되새기며 어르신들의 소명을 격려하고자 이날을 제정하셨습니다.
저희 집안에 신앙을 전수해 주신 분은 저희 외할머니신데요, 덕분에 외가 쪽으로는 모두가 신자이십니다. 병환으로 누워 계신 중에도 항상 머리맡에 기도상을 차려 놓고 기도하셨는데, 제가 유학을 떠나기 전 찾아가 뵈었더니, 기도상 한가운데 자리한 십자가 옆에 놓인 제 서품 상본과 서품식 초대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부족함 투성이인 제가 그나마 잘 지낼 수 있던 것이 기도 덕분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유학 중에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장례 때에 오지 못한 것이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는데요, 막상 유학에서 돌아오니, 떠날 때 아저씨, 아주머니였던 부모님이 어느새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계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이토록 빠르다는 것을 왜 잘 깨닫지 못할까요?
교황님께서는 발표하신 담화문 제목이 “다 늙어 버린 이때에 저를 버리지 마소서”라고 번역되었는데, “제가 나이 들었을 때 저를 버리지 마소서.”(Do not cast me off in my old age, 시편 71,9 참조)라고 번역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교황님은 담화문에서 룻기를 인용하십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며느리들과 함께 살아가던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각자 친정으로 돌아가서, 새 남편을 만나 잘 살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두 며느리 중 룻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습니다. 모든 권리가 성인 남성을 통해 행사되던 시대에, 홀로 남은 시어머니의 미래가 걱정되어 떠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룻은, 시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보아즈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는데, 그 아들은 오벳으로, 후에 다윗의 할아버지가 됩니다. 즉 룻은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는데,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라 불리시기에, 결국 룻은 메시아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은 첫머리에서 예수님의 족보를 말하면서, 단 네 명의 여성 이름만을 언급하는데, 그중 하나가 룻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심으로 인해 “임마누엘, 즉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이 이루어졌는데, 이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 룻이 먼저 나오미 곁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감동적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과 함께 머무를 때,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머무신 것입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하면 복을 받는다’는 말씀을 여간해서는 잘 하시지 않는데, 이번 담화문에서는 이례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르신들 곁에 가까이 머무른다면, 그리고 가정과 사회와 교회 안에서 그분들이 갖고 계신,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알아본다면, 우리도 많은 선물과 많은 은총과 많은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교황님은 담화문을 이렇게 맺으십니다. “사랑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또한 그분들 곁에 있는 모든 이에게, 저의 축복이 기도를 통해 가 닿기를 빕니다. 여러분도 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당신 역시 노인이시기에, 당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교황님께서 유머러스하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껴져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일제는, 우리나라가 독립 운동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술과 도박 등 중독 문화를 많이 퍼뜨렸다는 것입니다. 저희 할아버지 세대가 이에 해당하고요, 이것을 보고 자란 저희 아버지 세대는 ‘저렇게 약하니까 나라를 빼앗겼다’고 생각했기에 ‘강해져야 한다’는 신념이 일종의 강박처럼 자리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아버지들의 성격이 강하셨고, 자녀 교육도 엄하게 시키셨을 뿐 아니라, 국가 지도자도 강한 성격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아버지 세대 밑에서 자란 것이 불만이었던 저희 세대는, 자식들에게 부드럽게 대한다는데요, 다른 집은 모르겠지만 저희 집을 보면 이 이야기가 상당히 일리 있어 보입니다. 우리에게 세대 간 갈등이 있다면, 거기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던 수많은 사회적 요인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열왕기 하권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맏물로 만든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을 자루에 담아 하느님의 사람인 엘리사 예언자에게 가져왔습니다. 레위기(23장)에 따르면 이는 햇곡식을 하느님께 바치는 축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엘리사는 이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라하고, 백 명이 넘는 사람이 먹고도 남았습니다.
이 기적은 오늘 복음 말씀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단순히 빵을 많게 하시는 기적을 재현하실 것을 예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가 수넴 여자의 아들을 살린 후 이 기적을 행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후 오천 명을 먹이심으로써, 세상에 생명을 전해준 엘리사의 기적이 예고한 바를 완성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세상에 참생명을 주는 성체성사의 예표입니다.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시고,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으라고 말씀하시는 것’ 모두가 성체성사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당신 몸으로 봉헌하신 십자가의 희생을 기념하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바쳐진 것은 어떤 아이가 가져 온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이 아이는 왜 혼자 먹기에는 부담스러운 양의 음식을 들고 다녔던 것일까요? 처음부터 자기 것만 챙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군중 속에서는 턱없이 부족한 양의 이 음식을 내놓으면, 자기도 제대로 먹지 못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가진 것을 다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됐다. 그건 너나 먹어라.”라고 돌려주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신 것이 아니라, 아이가 가져온 바로 그 빵으로 기적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기적적인 것, 초자연적인 은총을 간절히 바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적은 인간의 노력과 별개로 하늘에서 갑자기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봉헌한 희생으로, 그 희생의 열매를 풍성하게 해 주심으로 인해 일어납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른 나라보다 상대적으로 풍족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기적을 베푸실 수 있도록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어야겠습니다. 또한,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우리 부모님들과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열심히 일해주신 덕분이라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과 독재정권의 어려운 시기를 온몸으로 견디시며, 당신 먹을 것보다 우리 먹을 것을 더 먼저 걱정하신 부모님, 조부모님이야말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인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봉헌한 바로 그 아이이십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는 작가의 ‘타나토노트’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신 부모님의 기저귀를 빨면서 그것이 너무나 힘이 든다고 항변하자, 그는 이런 대답을 듣습니다. “네가 그토록 힘들어하는 그 일을, 너의 부모는 네가 아기 때 웃으면서 했었다.”
우리 부모님이 이곳에 계시다면 전화로, 하늘나라에 계시다면 기도로, 감사하다고, 사랑한다고 말씀드리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2독서의 말씀을 되뇝니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빵의 기적 성당 바닥의 모자이크, 타브가, 이스라엘
출처: Church of the Multiplication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