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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자아와 내성의 언어
---박지현의 시세계
홍용희 경희대 교수
박지현의 시 세계는 단아하면서도 강렬하고 적요하면서도 견고하다. 그의 시편에는 장황한 수사나 화려한 분식이 노정되지 않는다. 마치 봄날의 촉기와 여름날의 무성함을 지나 분분한 낙엽의 가을까지 건너온 “겨울나무”의 목질과 내성에 비견된다. 그는 모든 위세나 장식을 떨군 고졸한 “겨울나무”의 인생에 당도해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수식도 설명도 필요 없다. 오직 자신만의 견고한 내성으로 회귀한 시간인 것이다. 이를테면, “지금은 나만을 위한 시간”이며 나만으로 세상과 마주하는 단독자의 시간이다. “겨울나무” 인생론은 가장 본원적인 자신의 삶의 원형에 해당한다.
다 떠나보내고
맨몸으로 추위에 떨고 있겠구나
동정하신다면
넣어 두세요
이제야 모든 장식 다 떼고
온전히 나를
드러내고 있답니다
지금은 나만을 위한 시간
찬바람과 친구 하며
이 겨울을 마음껏 즐길 겁니다
함께 휘파람을 불고 싶으시다면
바람 부는 언덕으로 놀러 오세요
- 「겨울나무」전문
“겨울나무”는 “맨몸”이다. 모든 것을 다 “떠나보내”고 “모든 장식 다 떼”어 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울 추위도 “맨몸”으로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말한다. “동정”하지 말라고. 오히려 “온전히 나를/드러내”면서 진정 “나만을 위한 시간”을 향유하고 있다고. 시적 정조가 이제 본래의 자신으로 회귀한 것에 대한 각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동안 나무는 무성한 잎들과 열매들을 키우고 보살피는 역할론에 충실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을 온전히 살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것을 인생론에 비견하면 마치 자식을 키우고 가정을 돌보고 사회적 위상과 관계의 역할 속에서 자리매김 되던 비본래적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서 본래의 자아로 회귀한 단계이다. 그래서 이 겨울은 “마음껏 즐”기고 느껴야 할 나를 위한 나만의 소중한 시간에 해당된다. 하강의 극점에 해당하는 겨울 인생론에 대한 긍정의 자세가 담담하게 드러나고 있다. 실제로 “겨울나무”는 가장 응축된 수렴의 귀결점이면서 새로운 시작의 봄을 향한 견인의 속성을 지닌다.
바로 이러한 “겨울나무”의 인생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봄, 여름, 가을 나무의 인생론과 비교 속에서 그 변별성을 제대로 규명할 수 있다. 이를 인간 삶의 구체에 비견하면 노년기의 참모습은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의 생래와 비교 속에서 조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물음표
세상은 정말 신기하고
궁금한 것 투성이야
청년 시절의 나는 느낌표
방향만 정해졌다면 어디든 갔을 거야
아무도 날 막을 순 없었을 걸
중년의 나는 쉼표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지러워
어디든 걸터앉아 쉬고 싶어
머리 희끗희끗해진 나는 다시 물음표
긴 세월 살았어도 아는 건 별로 없고
머릿속엔 의문들이 가득해
앞으로 내게 남은 부호는
어떤 것일까
이젠 그만 멈추라는
까만색 마침표일까
- 「인생의 부호」 전문
노년기에서 반추해 보는 유년 시절, 청년 시절, 중년 시절을 제각기 서로 다른 “인생의 부호”로 변별시켜 표상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인생론은 마치 자연의 순환 리듬과 이법을 설명하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의 국면과 대응되는 특성을 드러낸다. 음양오행은 우주의 만물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반복적인 원리에 대한 해명인 바, 인간의 생애 역시 여기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은 자연의 순환 리듬을 설명하는 음양오행(陰陽五行)에 대응시키면 목(木)의 국면으로서, 힘의 집중, 생명의 내적 배양력, 생의 용력(湧力)에 해당한다. 따라서 유년기는 식물의 생장수장(生長水藏)에서 싹을 틔워 자라는 생(生)의 단계에 해당된다. 인생에서 이때는 “세상은 정말 신기하고/궁금한 것 투성”이다. 그래서 호기심과 도전의식이 발현되는 시기로서 “물음표”로 표상된다.
“청년 시절”은 음양오행에서 화(火)의 국면에 해당한다. 화(火)는 생명력의 외적 분출(長), 무성한 잎, 여름, 한낮을 표상하는 바, 끊임없이 뚫고 나가고 싶어하는 속성을 지닌다. 이를테면, 나무의 줄기를 타고 올라온 내적 힘이 잎새의 창대한 빛으로 분열·확산하는 형상에 비견될 수 있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방향만 정해졌다면 어디든 갔을 거야/아무도 날 막을 순 없었을 걸”하고 회고한다. 그래서 “느낌표”의 탄성이 연속되는 시기이다.
“중년”은 음양오행에서 금(金)의 국면에 해당한다. 금(金)은 내적 수렴, 열매, 가을, 저녁을 표상하는 바, 수렴과 하강의 성향으로 선회하기 시작한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지러워/
어디든 걸터앉아 쉬고 싶”은 형국으로서 “쉼표”로 표상된다.
“노년”은 수(水)의 국면으로서, 견고한 내적 응축, 씨앗, 겨울, 밤을 표상하는 바, 끊임없이 단단해지고 싶어하는 속성을 지닌다. “마침표”를 향해가지만 그것이 끝을 뜻하지만은 않는다. 끝은 출발의 원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표”에는 유년기의 “물음표”가 동시에 내재되어 있는 형국이다.
또한 이때의 “물음표”는 지나온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의 연대기를 미적 거리를 두고 반추하고 직시하고 발견하고 성찰할 수 있는 지적 호기심이며 동력이기도 하다. 시적 화자는 바로 이와 같이 삶의 연대기에 대한 총체적 성찰이 가능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다음 시편은 이러한 미적 거리에 대한 구체적 지각을 드러내고 있어서 주목된다.
공간을 둘로 나누고
창이 속삭인다
좋은 건 다 건너편에 있어
봐, 꽃도 더 붉고
잔디도 더 푸르고
햇살조차 더 환해 보이지 않아?
내가 자리를 옮기면
다시 생겨나는 건너편
나는 매일 창에 기대어
건너편을 바라보며
한 뼘씩 야위어 간다
좋은 건 왜 늘 건너편에 있을까
- 「건너편」 전문
미적 거리를 통해 대상의 진경을 재발견한다. 다시 말해, 미적 거리를 둘 때 소중한 기억과 그 의미를 제대로 인지하고 감상할 수 있다. 미적 거리는 풍경을 조감하는 방법론인 것이다. 이에 대해 시적 화자는 “좋은 건” 모두 “건너편”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건너편”에 있을 때 “꽃도 더 붉고/ 잔디도 더 푸르고/ 햇살조차 더 환”하게 온전히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명화를 올바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와 같이 미적 거리를 통한 반추 속에 가장 아름답고 빛나게 반사된 풍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이다. 인생에서 사랑은 가장 순도 높은 고귀한 가치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의 사랑의 서사는 강렬한 열도를 지닌다. “수많은 사람들 중 단 한 명/그대를 만”난 “인연”(「인연」)은 오랜 세월에도 풍화되어 사라지지 않는 경험된 현재인 것이다.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
하늘이 유난히 까맣던 밤에
우리는 다시 마주쳤지요
아무렇지 않은 듯 인사를 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안부를 물었지요
어쩌면 그날, 우리
가슴 깊숙한 곳에 펌프를 대고
묻혀 있던 서로를 퍼올릴 수도 있었겠지요
한 때 우리를 태웠던 그 불로
현실이라는 주유소를 살라버리고
다시 부둥켜안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하필 그날, 신호처럼
차가운 눈이 펑펑 쏟아져
온 세상을 덮고 있었지요
지난 일은 뒤돌아보지 말라는 듯이
하얗게 잊어버리라는 듯이
짧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시 헤어졌지요
어깨에 쌓여가는
얼어버린 눈물들을 털어내면서
- 「쉘부르의 이별」 전문
“짧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헤어진 인연이지만 그러나 그 기억은 지금, 여기에 현존한다. “지난 일은 뒤돌아보지 말”고 “하얗게 잊어버리라” 생각하고 다짐했지만 그러나 그 기억은 생생하게 되살아 난다. 다시 말해, 뒤돌아보거나 잊어버리지 말자고 다짐하는 것이 다시 돌아보고 기억하는 과정이 되고 있다. 롤랑 바르뜨에 의하면 사랑을 하는 주체는 나 자신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다. 그래서 잊는다거나 생각하는 것은 사랑의 의지의 소관이지 결코 나의 의지로 결정될 수 없다. 따라서 뒤돌아보거나 잊어버리지 말자고 다짐하는 것은 뒤돌아보거나 잊어버릴 것을 두려워하는 심리의 산물이다. 사랑을 잊어버리는 것은 사랑 자체로부터 완전히 떠나는 것, 즉 무관심이다. “한 때 우리를 태웠던 그 불로/현실이라는 주유소를 살라버리고/다시 부등켜안을 수도 있었겠지요”는 아직 그와의 정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사랑은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인생의 가장 순도 높은 의미이며 가치이다. 시적 화자에게 사랑은 이처럼 현실에서는 부재하지만 의식속에서는 현존하는 역설적 존재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가상과 현실이 혼종하는 시편이 씌어진다.
때 되면 나타나 실눈 뜨고서
가만히 훔쳐본 거 모를까봐요
금빛 눈썹 내리깔고
고요히 내려다봤죠
그래 놓곤 말도 없이
가버리다니
나도 같이 바라본 거
설마 그대 모르셨나요
- 「눈썹달에게」전문
시적 화자는 “눈썹달”이 “실눈 뜨고서/가만히 훔쳐”보다가 “말도 없이/가버”렸다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눈썹달”의 상황이나 의지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시적 화자에게는 분명하게 실재하는 심정적 진실이다. 시적 화자의 미적 주관성이 객관적 사실을 압도하고 있다. 사랑의 회억은 이처럼 가상과 실재의 경계가 없다. 그래서 현존과 부재, 과거와 현재의 경계 역시 따로 없다. 사랑이 일시적 가치가 아니라 녹슬지 않는 영원한 가치일 수 있는 주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스스로 자신의 일생을 “목 쭈욱 빼고/몸은 장대처럼 길게 늘이고/얼굴은 늘 한 곳만 바라보고 있”는 “솟대”에 비견한다. “높이 솟아 더 잘 기다리라고/오실 그대 제일 먼저 마중하라고” 살고 있는 “솟대”(「솟대」)의 인생이 자신이라는 것이다.
일생이 이처럼 기다림의 연속이라는 것은 굳이 이성과의 사랑의 경우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 가치를 지닌 대상은 늘 간절한 기다림의 대상이다. 그래서 “네가 천천히 오고 있으니까/내가 더 빨리 가야지//너에게로 가까이/더 가까이”(「너와 나의 속도」)가는 삶을 지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소중한 것은 모두 간곡한 기다림의 대상이다. 생각해보면, 모든 인연은 소중했다. 모두 너무도 깊고 아득한 연기(緣起) 과정의 기적적 산물이었던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나를
그냥 지나쳐 갔지요
수많은 사람들 중 단 한 명
그대를 만나게 해 주려고
모두들 나를 모른 척했었군요
- 「인연」 일부
무엇이 너를 내게 데려왔을까
수천 번의 검색
수만 번의 클릭이 반복되어
마침내 만난 우리
천만년 전부터 네가 나를 불렀기에
수천만년 전부터 내가 너를 찾았기에
오늘, 이 자리
이 순간의 기적
- 「알고리즘」전문
“인연”은 원인을 도와 결과를 낳게 하는 연기(緣起)작용의 산물이다. 한 송이 꽃이라 할 때, 꽃씨를 ‘인’이라 한다면 꽃씨가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자라서 꽃을 피우기까지는 물과 햇빛과 영양분의 적절한 도움이 동반되어야 하는 데, 이를 ‘연’이라 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서로 다른 존재와 인연을 맺는 것은 신묘한 기적의 산물이다. “그대를 만나게”되기 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모른 척하는” 과정들을 거치기도 해야 한다. “알고리즘”으로 설명하면, “수천 번의 검색/수만 번의 클릭이 반복되어/마침내 만난 우리”로 풀이된다. 그래서 모든 인연은 “수천만년” 세월의 결정체로 해석된다.
이와같이, 인연의 절대적인 소중함을 재발견하고 인식하는 태도는 어느새 스스로 “빈컵”이 되는 경지를 느끼게 된다. 자신을 스스로 비움으로써 외적 대상이나 가치를 올바로 발견하고 수용하며 동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속은 텅 비어 있어요
그럼, 나는 텅 빔인가요
물을 담으면 물컵이
와인을 담으면 와인잔이 되고
꽃을 꽂으면 꽃병이 되죠
( 중 략 )
그럼, 나는 누구인가요
필요하지만 원치 않는다는 매정한 말에도
그대 위한 자리 비워두느라
테두리가 되어버린 나
그럼 나는, 텅 비어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기다림인가요
- 「빈컵의 생각」전문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서 나이 70을 종심소욕불유거(從心所欲不踰矩)라고 하여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았으되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한다. 마음이 법도에 맞다는 것은 자신의 아집에서 벗어나 대자연의 순환원리에 순응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아상(我相)에 갇힌 소아(小我)를 버리고 이타적인 대아(大我)를 내면화하는 삶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장엄한 인연의 순환 원리의 일부로서 자신을 자각하고 순응하며 실천하는 것이다.
“빈컵”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자신의 욕망과 집착을 비워내고 게워낸 상태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물을 담으면 물컵이/와인을 담으면 와인잔이 되고/꽃을 꽂으면 꽃병이” 된다. 어떤 대상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되고 있는 것이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설파한 도충이용지 혹불영(道沖而用之 或不盈) 즉, 도는 ‘비어 있어서 비어 있음으로 행위를 하는 데 아무리 해도 가득 차지 않는다’는 전언을 떠올리게 한다. 이를 시적 정황의 맥락에 맞게 해석하면, 모든 존재는 쓰임(用)으로 존재하는 바, 허(虛)는 그 가장 공통분모이다. 이를테면, 물잔이 물잔일 수 있는 것은 물을 담을 허(虛)가 있기 때문이며 책상이 책상일 수 있기 위해서는 역시 책을 올릴 수 있는 허(虛)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허(虛)를 회복하는 것이 자기 존재의 본모습을 찾는 것이다. 따라서 “그럼 나는, 텅 비어/채워지기를 기다리는 기다림인가요”는 자신의 본래의 자아로 회귀한 현재적 상황의 표백으로 해석된다. 이때에는 “필요하지만 원치 않는다는 매정한 말에도/그대 위한 자리 비워”둘 수 있는 포용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의 실현이 가능하다. 본래의 자아를 회복했을 때, 자연의 이법에 따라 외부 세계를 온전히 수용하는 이타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본래의 자아로 돌아온 모습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면 바로 “겨울나무 우리 엄마”의 모습을 띄게 된다.
코끝 찡하고
귀 얼얼한 겨울 저녁
찬바람 맞고 서 있던 겨울나무가
내게 건넨 말
( 중 략 )
잎도 지고
꽃도 지고
열매도 남은 게 없어
흔들리는 마음밖에
줄 게 없어서 미안해
아, 엄마였어요?
겨울나무 우리 엄마
- 「겨울나무 우리 엄마」 일부
“겨울나무”가 내게 말을 건넨다. “잎도 지고/꽃도 지고/열매도 남은 게 없어”. “겨울나무”는 어떤 권세도 장식도 없어서 오직 “마음”만을 줄 수 있을 따름이다. 여기에서 오직 “마음”이란 자신의 가장 본원적인 원형 심상을 가리킨다. 시적 화자는 여기에서 자신의 “엄마”의 얼굴을 만난다. “아! 엄마였어요?/겨울나무 우리 엄마”. “겨울나무”에서 가장 순정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베풀며 살았던 “엄마”의 초상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 “겨울나무” 인생에 도달한 자신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앞에서 살펴본 “이제야 모든 장식 다 떼고/온전히 나를/드러내”고 있는 “겨울나무”(「겨울나무」)의 모습과의 동질성을 고스란히 목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시적 화자가 걸어온 길은 자신의 가장 본모습으로 회귀하는 여정이었으며 동시에 어머니와 동일화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젠 그만 멈추라는/까만색 마침표”는 결코 아니다. “머리 희끗희끗해진” 나에게는 어느새 “다시 물음표”가 일어난다. 견고한 내적 수렴의 “겨울나무”는 씨앗처럼 가장 응축된 수렴의 귀결점이면서 새로운 시작의 용력(勇力)과 탄성을 향한 견인의 속성을 지닌다. 생장수장(生長水藏)하는 자연의 이법에서 장(藏)은 생(生)을 향한 출발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인연(因緣)의 영원한 순환 리듬을 살아가는 본래적 자아의 본령이다. 그래서 나는 또 다른 봄을 낳는 내적 동력이 된다. 마치 장엄한 꽃들의 잔치가 “봄마다 한 살”로 현현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다음 시편은 각별히 주목된다. 시적 화자의 본래적 자아가 도달한 내성의 깊이가 감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꽃의 나이는 한 살
봄마다 한 살
보송한 솜털
초롱한 눈매
벙긋 벌린 입의
꽃 아가들 모여 앉아
까르륵 웃어대면
세상은 꽃잔치
사방팔방 봄잔치
꽃의 나이는 한 살
올해도 한 살
- 「꽃의 나이」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