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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시적 애니메이션 감성과 상징 언어로 피어난 의식의 세계
- 신진 교수의 동화를 읽고 -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I. 로그인
I-1. 주변부 타자의 삶에 주목하는 출판사를 위한 서설
자신만의 색을 드러낼 때서야, 비로소 아름다움이 넘친다. 도서출판 물망초의 이미지를 한마디로 말하라 한다면, 나는 ‘칼러풀’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자기만의 칼러가 충분해서 넘쳐 흐른다는 칼러풀이란 단어가 왜 이 출판사와 잘 어울릴까? 도서출판이 지향하는 가치를 들어 보면 수긍이 쉽게 갈 것이다. “도서출판 물망초는 탈북자, 일본군 위안부, 유라시아 대륙의 고려인, 20세기 초반 미주이민자 등,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인고의 세월을 산‘역사의 조난자’들을 소재로 다룬 문학작품의 발간을 우선적으로 돕고 장려한다. 당연히 문학작품으로서의 완성도와 역사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중시한다.”여기서 알 수 있듯이 도서출판 물망초는 ‘지금 여기’라는 기득권 세상의 주체보다는 주변부 타자에 더 눈길을 두고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이 출판사를 이끌어 나가는 사람들은 분명 삶의 모순을 깨달은 피플일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듦은 왜일까? 이들은 주변부 타자의 삶을 그려냄으로써 당당하게 ‘나를 잊지 말아 달라’고 한다. 이 상징적 호소에 공감이 가는 것은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이들의 생각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상징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세 가지, 언어, 리듬, 색칼 중에서, 언어는 어느 것보다 강력하다. 특히 상징이 들어있는 언어는 더욱 그렇다. 신간서평은 이 출판사에 거는 기대로부터 시작한다.
이 출판사는 지난 2014년 4월에 국군포로탈북자를 소재로 한 장편동화 『할아버지에게 아빠가 생겼어요』와 탈북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장편동화 『설마 군과 진짜 양의 거짓말 같은 참말』을 동시에 선보였고, 또, 2015년에는 탈북자이면서 성소수자인 장영진 작가의 자전적 장편소설『붉은 넥타이』와 이근미 작가의 『나의 아름다운 첫 학기』를 펴내 탈북과 통일이라는 주제에 접목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생태, 자유, 평화, 인권 등은 21세기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 덕목이다. 탈북과 통일은 자유와 평화라는 가치와 밀접하게 닿아 있는 것이라 분단국가에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이런 차원에서 물망초의 선택과 집중은 지성적이라 할 수 있다. 지성은 세상을 바꾸려는 의식이 없으면 붙일 수 없다. 삶의 근거가 왜곡되고 모순되어 있다는 것을 이들이 깨닫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주변부 타자들의 삶에 주목했겠는가. 그것은 지식인이 가야 할 길이고, 이들은 출판사의 설립을 통해 앙가주망을 실천하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적 삶과 진실 속의 딜레마를 극복하는 방법의 하나로서 참여, 그 중에서도 출판사 물망초는 출판을 통해 사회적 모순을 타파하고자 한다. 필자는 박수를 보낸다. 고장난 사회를 정조준함으로써 그 모순을 바로 잡고, 지식인의 자기 분열을 극복하면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길, 이것이 싸르트르가 말하는 지식인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II. 문제의식과 목적의식
II-1. 신진의 생태적 감수성과 주인공의 바라는 삶
살아가는 데는 무언가를 달성하려는 목적의식과 목적의식을 더 뜨겁게 달구는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특히 작가에게는 이런 의식이 더 크게 요구된다. 작가정신이란 변혁을 위한 자세다. 들뢰즈의 말대로 문학은 주변부 타자들의 담론이다. 차이를 가치화하려는 저항담론을 만들고, 새로운 윤리적 임무를 지속적으로 부과하는 탈근대담론으로 문학의 장을 이끌어가야 하는 목적의식이 아마도 이 신진 시인에게 있어서 새로운 장르를 선택하도록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먼저 해본다. 낙동강 변에 살면서 생태적 감수성을 키워온 식물성적인 시인이 왜 동화라는 장르를 빌어 아동의 의식을 고양시키고 아동의 마음밭에 사회적 참여의 씨앗을 뿌리려 시도하려 했을까? 송두리째 인권을 빼앗기고 멧돼지로 살던 현실에서 탈출, 용기와 협동심 그리고 사랑의 마음을 기르며 무지개 마을로의 탈출을 감행하는 주인공 바래치의 자유를 향한 간절한 소망을 보면서, 필자는 인간은 순진무구냐 폭력이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폭력의 종류를 선택할 뿐이라고 말한 메들로 퐁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체를 가질 수 있는 한 인간은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퐁티의 말을 전제로 하면, 이 세상은 분명 고장난 것이 분명하다. 신진의 문제의식은 생태적 합리성을 고취하는 데 있다.
이 동화는 신진 시인의 문제의식과 주인공 바래치의 목적의식이 용합되어서 생성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동화의 주인공 바래치는 목적의식이 분명한 소년이다. 바래치는 이정우의 말을 빌리면, 하나의 무위인이다. 타자-되기를 통해 우리-되기를 목적하는 저항 주체다. 세상을 바꾸려는 시련과 역경에도 포기하지 않는 배경에는 불굴의 의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시인 또한 문제의식이 분명한 지성인이다. 국문학 대학 교수로서 그는 늘 불완전한 문학에 대해, 고장난 세상에 대해,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언제나 저술을 통해 작품을 통해, 비판적 견해를 술잔에 담아 담론을 쏟아내곤 했다.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색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탐구심의 발로가 시만 주로 써온 시인에게 탈장르의 길로 걸어가게 하지 않았겠나 하는 추측을 해본다. 바래치의 목적의식과 작가의 문제의식이 만나, 전자는 결과를 아름답게 만들고, 후자는 과정을 아름답게 만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상징계적 삶에는 목적도 중요하지만 목적에 이르는 과정이나 방법 또는 수단도 중요하다. 과정의 아름다움이 결과의 정당성을 가져다 줄 수 있듯이 작가의 문제의식이 치열하였기에, 바래치라는 상징의 주인공과 그 정신의 치열함을 불러오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III. 작가의 앙가주망, 주인공의 저항정신
III-1. 무지개 마을과 시인의 윤리학
자신뿐 아니라 모두의 간절한 소망인 자유와 사랑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작중 인물인 바래치는 어려움을 넘어서는 용기와 유혹에 휩쓸리지 않는 지혜를 발휘한다.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물의 창조다. 부조리한 현실을 타파하려는 의지의 주인공을 탄생시킨 배경에는 동화 장르의 특징상, 사건보다 인물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시적 애니메이션의 감성으로 동화를 처음 발표한 노 교수이자, 생태 시인 신진은, 삼십여 년 동안 강변과 산골에서 거주해오면서 생활인의 자세보다는 생태적인 합리성으로 사람 사는 세상의 모델을 작품 속에 담아왔다. 그가 꿈꾸어온 합리성의 세계, 중용의 세계가 바로 무지개 마을이 아닐까, 그는 동화를 통해서 그 동네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 꿈꾸는 사람은 언제나 심장이 뛰고 눈빛은 광채가 난다. 그래서일까? 정년을 앞둔 노 교수의 얼굴은 언제보아도 청년이다. 동안이다. 부르조아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는 태생적으로 그런 부의 권위가 싫어 넥타이를 매지 않고, 트럭을 타고 다니며, 밀짚모자를 쓰고 다니길 좋아한다. 깔끔하고 깨끗한 식당보다는 가난한 아지매가 운영하는 시장통의 허름한 식당을 즐겨 찾는 사람, 평자가 아는 신진은 적어도 서민적으로 살아가려고 애써 노력하는 순수를 머금은 사람이다.
나쁜 총독이 다스리던 나라의 멧돼지 가족이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희망을 잃지 않고, 모두가 제 빛깔로 빛나면서 함께 어우러지는 무지개 마을로 탈출해가는 이 동화를 통해 보려주려는 작가의 메시지는 분명해 보인다. ‘함께 더불어 같이 가자’는 슬로건이다. 탈근대적 성찰을 통해 새로운 삶의 윤리학을 꿈꾸는 신진 교수에게 시련과 역경은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다. 이런 특이한 삶의 방식이나 인식은 작중 인물 바래치에게 그대로 전이된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성격묘사는 물론 플롯의 암시에도 중요한 구실을 한다. 등장인물에 이름이 없다면 그 인물을 개성있는 인물로 부각시키는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등장인물의 이름을 지을 때에는 보다 신중해야 한다. 이름을 지을 때는 암시성과 상징성에도 유의해야 하지만 암시나 상징이 지나치면 인물의 성격과 행동을 제한할 우려가 있다. 그렇다고 너무 튀는 특이한 이름을 지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평범하고 기억하기 좋으면서도 부르기에 편한 이름이 바람직하다.아마도 바래치는 우리가 바라는 가치의 준말이 아닐까. 상징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신 교수의 ‘바래치’ 네이밍에는 분명 상징이 있을 것이다. ‘바래치’는 바람직한 삶의 원형이자, 그런 가치가 함축된 말일 것이다. 평등과 자유의 가치가 빛나는 정의로운 커뮤니티가 무지개 마을이며, 무지개 마을은 그 자체가 다양성이 모여 하나로 잘 융합된 민주사회의 상징이라 하겠다. 신진에 관한 한, 우리나라 최고의 전문가다. 그는 시론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차유’라는 개념을 생성, 남다른 언어의 비유로 문학의 품격과 풍격을 높이려고 하고 있는 학자다. 그가 언어로 그린 애니메이션이 바로 이 동화다. 신진 교수는 아마도 시보다는 산문 장르가 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자신이 꿈꾸어온 세상의 모델을 무지개마을로 설정하고, 바래치의 의협심과 정의로움을 지켜보면서 우리나라의 아동들도 의식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과 지상의 모든 가족들이 재미있고 진지하게 상징의 언어를 함께 풀어나가며, 동화문학이 주는 촉촉한 감동을 기대한다.
VI. 글쓴이 소개, 그리고 줄거리
글쓴이 신진은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졸업했으며(문학박사),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정년을 앞두고 있다. 월간 『시문학』에 추천완료(1976) 하여 40년간 생태사회 지향의 시 외 다수의 평론, 에세이 등을 발표해왔다. 시집으로는『멀리뛰기』(민음사), 『미련』(시산맥) 등 8권을 펴냈으며, 논저로는 『한국시의 이론』,『우리시의 상징성 연구』 등 9권을 펴냈다. 시문학상, 봉생문화상, 부산시문화상, 설송문학상, 낙동강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줄거리는 겉으로는 멧돼지들을 위한 나라라고 하지만 실상은 권력을 쥔 인간들이 획일적인 복종만을 강요하는 멧돼지 공화국. 아빠멧돼지가 잡혀가자 소년 멧돼지 바래치는 댕겅이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엄마와 함께 무지개 마을을 향해 탈출한다. 탈출은 멧돼지 공화국을 탈출한 후에도 계속된다. 돈이 인간을 다스리는 승냥이 나라를 탈출하고, 사막에서 손쉬운 유혹에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하며, 낙타가시풀을 먹으며 희망을 잃지 않고 스스로 노력하는 삶의 가치를 배우게도 된다. 무지개 마을에 이르러서도 자칫 한 눈을 팔면 기계적으로 생명을 다스리는 기계괴물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엄마와 함께 목숨을 건 사랑과 희망의 실천으로 기어이 무지개 마을에 도착한 바래치, 마침내 죽은 줄 알았던 아빠멧돼지와 동생도 만나게 되고 함께 인간으로 변신하기에 이른다. 이 동화는 심리묘사가 돋보이고 동화가 지향해야할 덕목인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어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V. 작품 분석
V-1. 폭력 앞에서의 한 줌 오만
동화에 있어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팬터지요, 다른 하나는 리얼리티다. 동화는 환상과 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는 데 있어서 여타 다른 산문과 다르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문학의 특성 때문이다. 어린이는 변화 무쌍한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며, 무한한 상상력을 촉매제로 한 이야기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동화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선 재미있어야 하지만 우화적이어도 사실적이어야 하고, 맑고, 순수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독자들이 아직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은 미성숙한 아동들이기 때문이다.
동화 창작 시에 주의할 것은 주제 설정 및 소재 선택이다. 요즈음처럼 각박해져 가는 시대를 살면서 점점 나약해지고 정의로움이 엷어져 가는 세상에 끌려 다니며 살고 있는 어린이에게 정의로움을 전해주면서 정신적으로 강인한 마음을 가지게 해야 하는 책임을 동화작가는 가져야 한다. 바로 작가정신이다. 그런 뜻에서 볼 때, 신진 교수는 어린 독자에게는 재미는 물론 무한한 꿈과 희망을 주며, 성인 독자에게는 잃었던 동심을 회복하게 하면서 잔잔한 감동을 줄 수 있는 이야기를 환상적 기법과 우화적 소재로 잘 풀어냈다고 하겠다.
동화 작가는 이야기꾼의 재질을 갖추는 것이 우선이다. 필자는 이 동화를 읽으면서 원숙한 작가일수록 독자를 자신의 작품 속으로 흡입시킬 수 있는 노하우를 쌓아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신진 교수는 지금까지 한국에 있었던 여타 다른 동화와는 다르게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착하고 아름다운 대한 어린이가 아니라 강하고 정의로운 주인공이 부조리에 저항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부모의 리모콘으로 조종되는 나약한 아이들에게 강한 정신력을 키워주고자 한다는 점이에서 이 동화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
멧돼지가 좋은 일을 통해 사람이 되는 설정은 독자를 흥미롭게 한다. 재미는 동화의 생명이다. 들어도 들어도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통쾌함이 느껴지는 것이 바로 악당을 물리치는 이야기가 아닌가. 아빠멧돼지가 자식을 위해서 죽음을 무릅쓴다는 설정 또한 이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재미를 더해준다. 그것은 어쩌면 이야기꾼 신진의 작가적 역량이다. 이야기가 팬터지의 기법으로 전개되고 있어 더욱 흥미롭고, 멧돼지라는 동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어린이의 기대심을 충족시킨 점이 돋보인다. 독자는 불의에 저항하며 못된 인간을 무찌르는 데 대해 아동의 호기심이 발동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은 우선 재미가 있고, 발상이 특이하다는 데서 관심을 끈다. 상대적으로 이 동화의 환상성과 우화적 특성은 재미면에서 독자의 발목을 붙잡고 있어 주목이 받을 수밖에 없겠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편리에 물들기 시작하면서 편안하게 죽어간다. 편리에 익숙해질수록 사람의 몸은 편암함의 늪에 빠져 살아간다. 자본주의라는 욕망기계에 자발적으로 종속되어 살아가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또 다른 삶의 영감을 줄 수 있는 동화가 바로 이런 동화가 아닐까. 문학이 세상을 바꾸는 기제로 작동할 때만이, 진정한 문학이 된다. 동화가 이렇게 힘을 가질 수 있는 근저에는 저항정신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바래치는 옳지 않은 억압과 부조리에 굴복하지 않은 소년입니다. 자신뿐 아니라가족과 이웃, 모두의 간절한 바램, 소망을 잃지 않은 소년이에요. 나쁜 욕심과술책을 들여다보는 지혜와, 그것을 극복해내는 용기는 바래치뿐 아니라 누구에게나필요한 것일 테지요." 작가의 말이다. 작가가 아동문학에 관심을 갖고 동화와 동시를 쓰고 있던 차에도서출판 물망초의 권유로 가족동화 기획에 참여하게 되면서 빛을 봤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문제제기에 해당하는 것이, “빨강기념일에는 개도, 멧돼지도 빨간 입김을 뿜어야 해요. 손뼉을 쳐도 빨간 소리가 나도록 짝짝! 맑은 눈물을 조록조록 흘렸다간 벌을 받아요. 빨간 입김, 빨간 소리를 내려면 열흘이고 한 달이고 빨간 먹이만 먹고 살아야 해요.(12쪽)”라는 대목이다. 획일이라는 전체주의는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박탈하는 악의 장막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개체는 자기만의 고유한 가치가 있다. 빨강기념일이 있는 이 동화의 공간은 복잡계의 다양성이 인정되지 않는 세계다. 남과 똑같이 해서는 남과 다른 결과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그러는 새 아빠멧돼지는 밖으로 뛰쳐나가 감독관 인간 둘과 맞닥뜨렸어요. 인간들은 총을 들었어요. 아빠멧돼지는 바래치와 치치노를 보호하기 위해 점박이와 인간들 쪽으로 자신의 몸을 던진 거예요.(27쪽)”라는 대목에서는 아빠멧돼지와 인간과의 맞대결에서부터 불공정하게 설정되어 있다. 작가는 철저히 동물 편이다. 약자에 서는 게 정의다. 게임 자체가 불공정이다. 숫자에서 동물이 밀리고, 연장에서는 더욱 불리하다. 일대 이에 총까지 들었다. 총은 살상무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는 아빠멧돼지를 통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작가는 보여주고자 한다. 위대한 사랑은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지키는 행위다. 아빠멧돼지가 자식을 지키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이 있다는 것은 지키고 싶은 대상을 지극히 사랑한다는 뜻이다.
“아빠멧돼지는 누렁이에게 잠시 혼자 있으라 하고 자리를 떠났다가 콩팥노루발 열매와 떡갈나무 이파리를 물고 왔어요. 피를 멎게 하고 상처를 치료하는 데 그만이거든요. 다시 달려가서 이삭여뀌, 구릿대, 범꼬리 등을 구해왔어요. 독을 빼고 통증을 멎게 하는 약초들이지요. 오물오물 입으로 짓찧은 약초를 누렁이의 입에 넣어 주고는 또 한 번 달려갔답니다. 이번 참에는 칡뿌리와 만삼뿌리를 한 입 가득 물어왔어요.(50쪽)”라는 대목에서 작가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하는 동물의 행위를 통해 진정한 부성을 나타내려 한다. 개인주의에 물들어 자신만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요즘 아이들에게 주는 정신훈화다. 상처 때문에 아픈 것이 아니라 상처 덕분에 아름다운 것이다. 상처가 스승이라는 정호승 시인의 말은 바로 그런 뜻일 것이다. 천영희 시인은 아름다움이란 ‘상처가 피워낸 꽃’이라 했다. 상처를 다스리려는 사람만이 아름다움을 꽃피울 수 있다. 강가에 집을 짓고, 산 속에 집을 짓고 초록 생물과 함께 한 생태적 삶이 이런 장면을 만들고, 치료제로 쓰이는 풀을 활용할 수 있었으리라.
“승냥이나라를 지나 남쪽으로 가고 또 가면 무지개마을이 나타난대. 언젠가 아빠가 주목 숲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어. 무지개마을에서는 인간과 개와 멧돼지가 서로서로 도우며 산다는구나.”(54쪽)와 같이 인간과 개와 멧돼지가 서로서로 도우며 산다는 무지개마을의 설정은 작가의 신념이기도 한 생태적 합리성의 세계관이자,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사람다울 수 있는 자세다. 무지개란 일곱 색깔은 각자 다른 개체일지라도 생명은 모두 소중하다는 생명존중의 정신의 피력이다. 이는 21세기가 에코필리아, 바이오필리아로 가야 한다는 작가의 신념이 녹아든 것이라 하겠다.
“왼쪽 길을 가리키면 왼쪽 길만 가야 했던 나라……. 오른쪽 길을 가리키면 오른쪽 길만 가야 했던 나라……. 이제 ‘안녕’입니다. 해서는 안 될 말과 불러서는 안 되는 노래가 많았던 나라……. 이제 ‘안녕’입니다. 고픈 배를 움킨 채 울음을 삼켜야 했던 나라……. 이제 ‘안녕’입니다.(62쪽)”부분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어둠을 이겨내야 얻음이 있다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어두운 과거를 체험해야 한다. ‘해서는 안 될’ 금기와 제약과 ‘불러서는 안 될 노래’가 많았던 독재와 권위가 판을 치던 나라와의 이별을 통해 희망의 새벽을 여는 구성이 안도의 힐링을 준다. 떠나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떠남은 새로운 만남인 것이다. 시인 고은은 두려워하지 말고 낯선 곳으로 떠나라고 한다. ‘단 한 번도 용서할 수 없는 습관’은 바로 언로가 차단된 세계다. 사물은 나름의 방식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 장미는 가시로, 태양은 뜨거움으로, 그러나 인간이나 동물은 표현함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드러낸다.
“에헤헤헤, 가소로운 것. 그래봤자 너희들은 우리 뜻대로 조종될 뿐이야. 우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지배하는 제왕들이라고. 아무도 우릴 거역하진 못해.”이 세상을 조종하는 건 바로 그들 괴물들이란 말이었어요. 세상은 정말 그들이 곳곳에 숨어서 먹잇감을 올려놓은 식단에 지나지 않는 걸까요?(89쪽) 푸코가 말하는 어찌면, 이곳은 원형감옥인지도 모른다. 온몸을 감싼 미시권력의 망 속에서도, 이미 존재할 이유가 없는 화석화된 관습과 도덕의 폭력 앞에서 한 줌의 오만함을 갖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는가.
“여기는 차별이 없는 세상이야. 총독도 없고, 당하기만 하는 멧돼지도 없어. 남을 죽여서라도 제 잇속만 챙기는 승냥이도 없고, 거짓말해서 남의 것 빼앗는 짐승도 없어. 세상을 제멋대로 조종하는 괴물 기계들도 없어. 밤하늘의 별들처럼 제각각 빛나면서 서로서로를 비추는 마을이지.”(96쪽) 비는 반드시 그치게 되어 있고, 모든 눈은 반드시 녹게 되어 있다. 인간답게 사는 세상은 차별이 없는 공정한 사회다. 승냥이도 짐승도 없는 세상이야말로 다양성이 존중되는 세상이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무지개마을이라는 상징에 나타나 있다. “나 자신의 삶은 다른 사람의 삶을 삶답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톨스토이의 말이다. 아름다움은 사람다움에서 비롯된다. 사람다움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사람답게 사는 것은 곧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다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밤하늘의 별처럼 제각각 빛나면서 서로서로를 비추는 마을’이 진짜 사람답게 사는 마을일 것이다.
VI. 로그아웃
이 동화 『낙타가시꽃의 탈출』은 자유가 박탈되고, 불평등이 강요되는 사회에서절대적인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낙타가시풀과도 같이,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강인한 정신력과 실천력, 희망을 함께 하는 협동, 그리고 자신만의 이익과 일시적인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사실 흥미진진하게 전개하고 있다. 고치를 통해 나오는 아픔을 견뎌낸 나비만이 무한 자유를 얻어 하늘은 날 수 있다. 시련과 역경을 혼자 견뎌내고 아름다운 저항과 투쟁 경력을 만든 사람만이 자기의 존재이유, 즉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기에, 이 동화는 문학의 목적이기도 한 교훈성에 도착하여, 감동을 준다. 누군가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나비의 고치를 대신 짖어주면 나비는 나오자마자 죽는다.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는 아픔이 없이는 성장도 생존도 없는 것이다. 불평등이 강요되는 획일 사회, 기득권의 억압이 정당화되고 당연시되는 사회에서의 안주는 곧 죽음이나 마찬가지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닐 것이다. 스스로 어둠의 알을 깨고 나오는 아픔 없이는 성장도 생존도 없는 것이다. 편리를 추구하려는 인간의 무비판주의가 결국 삶의 조건을 불리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동화는 스스로 깨뜨리지 않으면 깨진다. 깨지지 않으려면 먼저 나 자신의 타성부터 깨부숴야 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우리가 당연시여기는 자본주의 질서를 한번쯤 의심해 보는 계기가 이 동화를 읽음으로써 가능할 것 같다. 거듭되는 역전과 반전, 상징적인 언어와 애니메이션적 환상은 가족이 함께 읽는 동화의 새로운 긴장과 재미를 선물한다. 여러분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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