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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45편 13절-46편 3절.
45편 13절-17절: 왕의 딸이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 수 놓은 옷을 입은 저가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동무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저희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왕의 아들들이 왕의 열조를 계승할 것이라 왕이 저희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케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영히 찬송하리로다.
46편. 고라 자손의 시. 영장으로 알라못에 맞춘 노래.
1절-3절: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
45편 13절: ‘왕의 딸이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 왕의 딸은 왕과 왕후의 인격적 애정적 결합에서 나온 사랑스러운 열매다. 왕의 딸의 옷이 금으로 수 놓였다고 했는데 금은 변질 변색이 없는 거고, 옷이란 왕의 딸의 아름다운 활동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행동 활동 그 하나하나마다 변질과 변색이 없는 진리신앙 사상으로 영원히 가치 있는 효력성으로 되었다 그 말이다. 옷을 입은 것을 가지고 비유적으로 사람의 행동을 말을 한다 그 말이다.
왕의 딸의 고차원적인 도덕성을 가진 선행을 볼 때 ‘왕과 왕후가 딸을 잘 가르쳤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왕과 왕후의 신앙사상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했는지 짐작이 되는 거다. 이것을 교회의 교훈적인 측면으로 보면 진리의 옳은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교회적으로 보면 언행심사가 금으로 수 놓지 않은 옷을 입고 있는 딸들도 있을까? 많이 있을 수 있다. 금으로 수 놓은 옷을 입고 있지 않은 딸들은 왕의 딸들이 아닐 수도 있는 건데, 교회 안을 보면 신앙정조를 지키지 않고 구멍이 숭숭 뚫린 치마를 두르고 있는 딸들이 많이 있다.
세상을 보면 청바지를 일부러 찢어서 허벅지 살이 나오게 하고 자기의 귀한 몸을 똥개들이 쳐다보게 하는 사람이 있다. 세상이 마지막이라서 옷도 그렇다. 공주가 이런 옷을 입고 다닌다면 거지같은 공주다. 그 정신 사상이 구멍이 뚫려서 세상바람이 화통을 하더라. 그러니 세상바람이 숭숭 들어온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란다면 우리의 신행에 있어서 찢어지고 구멍 뚫린 옷을 입으면 안 된다. 옷을 들어서 품행 면을 말하는 거다. 허점이 있는 품행을 하면 안 된다. 사람이 옷을 잘못 입으면 남의 눈을 찌푸리게 하듯이 하나님의 딸들이 언행심사의 품행이 좋지 못하면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이게 그 사람의 옷이라 그 말이다.
14절: ‘수 놓은 옷을 입은 저가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동무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수 놓은 옷을 입은 자가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니까 자랑스럽게 보이고 보기가 좋다. 그리고 왕의 딸의 시녀들도 같이 데리고 들어가는데, 물론 ‘시녀들이니 따라갈 수밖에 없지’ 라고 할 수도 있으나 시녀들이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듯이 자기가 행한 것은 자기 뒤를 따라간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인인관계성적으로 생각을 해 보면 언행심사가 좋은 왕의 딸이 동무 처녀들을 사귀어 왕궁으로 들어오게 하니까 보기도 좋지만 왕의 딸이 같이 왕궁에 들어간 동무들과 얼마나 즐겁게 지내겠느냐? 그리고 동무 처녀들은 다른 사람을 사귀지 않고 왕의 딸을 사귀니 자기들도 왕궁으로 따라 들어가서 누리게 되니까 동무를 참 잘 사귄 거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는 복합적 교훈이 있다. 왕의 딸이 시녀들을 데리고 왕궁으로 들어간다고 할 때는 왕이 딸의 언행심사 대로, 즉 뿌린 대로 선행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을 하고, 왕의 딸의 동무의 입장에서 보면 왕의 딸을 잘 사귀니, 좋은 친구를 사귀니 같이 누림성으로 들어가더라. 이런 면으로 볼 때는 이런 해석이 되고, 저런 면으로 볼 때는 저런 해석이 되지만 자기에게 이룰구원에 유익이 되는 해석이라면 정확한 해석이다.
우리가 여기서 깨달을 것은 친구를 사귈 것 같으면 천국으로 같이 들어가겠금 사귀고, 같이 들어갈 자를 사겨야지 시간낭비, 물질낭비, 인생낭비를 해 가면서 사겨서 결국은 손해만 보고 자체적 심판을 받으면 안 된다.
우리가 친구를 사귈 때 그 친구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줘야지, 다시 말하면 믿는 자기가 주격이 된 상태로 사겨야지 안 믿는 상대방이 주격이 되면 내 쪽에서 아무리 예수를 믿으라고 해도 잘 안 먹혀 들어간다. 어떻게 보면 그 사람이 나를 이용해 먹는다. 그래서 예수를 믿게 하려고 시간투자 물질투자를 했는데도 계속 안 믿을 때는 끊을 수밖에 없는 거다. 예수 믿게 해서 예수님의 소원 목적성을 갖게 만들고, 예수님의 취미성을 갖게 만들고, 예수님의 추구성 지향성을 갖게 만든다면 서로의 대화가 즐겁고 대인관계 우정관계 부부관계가 즐겁고 행복해지는 거다.
‘수 놓은 옷을 입은 저가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동무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언행심사가 진리로 아름다운 자들을 친구로 삼으니 신령천국이라는 왕궁에 들어가서 같이 누린다는 거다. 그러니까 인인관계 대인관계 연관관계성을 잘 가진 거다. 우리도 내 주변의 안 믿는 사람에게 전도를 해서 이 사람이 이사를 가더라도 훗날 천국에서 만나본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우리는 인인 간에 관계성을 가지되 질이 높은 고상한 도덕성의 관계를 가져야 한다.
15절-16절: ‘저희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왕의 아들들이 왕의 열조를 계승할 것이라. 왕이 저희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왕의 딸들은 영화를 누림이고, 왕의 아들들은 상속과 통치의 실력을 얻음을 의미한다. 딸들은 즐겁게 영화를 누림을 말하고, 아들들이란 상속을 받아 그것을 통치할 수 있는 실력을 말한다. 그러니까 ‘딸과 아들들’이라 함은 통치와 누림을 복합적으로 의미하는 거다.
왕의 아들들이 만국을 다스리려면 진리로 인격화 되어야 하고, 세계 만국 사람들의 정신 사상의 방향과 소원 목적성을 파악을 할 줄 알아야 하고, 영들의 활동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할 것이고, 정평 정가 판단이 진리로 된 공정한 공의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옳은 데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실력이 없으면 백성들이 자기들의 군왕을 삼지 못한다. 영능의 실력이 있어야 군왕을 삼고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17절: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케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영히 찬송하리로다.’ 백성들로 하여금 왕의 이름을 기억케 하려면 왕에 대해 자세히 가르쳐야 한다. 인격 면에서, 능력 면에서, 권세 면에서, 지혜지식 면에서, 도덕성적인 면에서 왕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자세히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백성들은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지키고 살면서 경험해야 한다. 왕의 실력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거저 얻는 것은 자기 것이 못 된다. 이렇게 이 세상에 살면서 죽음 저 너머 세계에까지 영원히 가는 것을 받도록 하면 신령천국에서도 그 자를 기억을 하고 찬송을 하게 된다.
46편. 고라자손의 시. 영장으로 알라못에 맞춘 노래.
‘알라못’이란 ‘처녀’라는 뜻이기도 하고, 또 ‘고음의 시’라는 뜻이기도 하다. 처녀들은 노래를 부를 때 고음의 소리를 잘 낸다. 그런 것처럼 본 편의 시는 ‘높은 신앙의 시’라는 뜻이다. 즉 고결한 처녀처럼 순수하고 정결하고 높은 신앙의 시라는 뜻이다. 시편의 시는 다 높은 수준의 시이지만 이 46편의 시도 높은 경지의 신앙의 시다.
1절: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환난에는 일반환난과 특수환난이 있다. 일반환난은 일반계시, 자연계시, 자연은총에 속하는 것인데,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모두 당하는 거다. 예를 들면 전쟁이나 홍수나 질병이나 흉년이나 기근 등등 눈에 보이는 환난이다. 특수환난은 눈에 안 보이는 환난인데, 이 환난은 성도들의 구원을 위해서 창조자, 창조의 주권자, 섭리자, 보호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다. 이 환난은 악한 폭도들을 동원시켜서, 또는 전쟁을 일으켜서, 또는 자연법칙을 들어서 일으키신다. 일으키시는 이유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이룰구원을 위해서다.
사람이 일반적인 환난을 만나면 진리 신앙자는 신앙실력이 올라가지만 세상적인 신앙자는 육적인 고통을 이겨내기가 힘들고 세상으로 더 나가버린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상성적인 믿음을 가진 자의 신앙을 위해서 일반환난을 일으킬 때 이방인들도 고통을 받는다. 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죄 때문에 자연과 동식물도 같이 재난을 당한다. 한 마디로 예수 믿는 자기가 신앙 믿음을 잃어버리면 자기 하나 때문에 자기 고통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리고 만물에게까지 고통을 당하게 한다. 자기의 잘못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까지 고통이 들어간다는 것을 생각을 해 봐라.
특수환난은 진리환난이요 영적 환난인데, 이 환난은 한 마디로 교회의 환난이다. 교회란 예수 믿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까 이방세상이 교회를 박해하는데, 이때는 꼭 이방세상이 비진리적인 교회와 합세를 해서 예수 잘 믿는 진리의 교회를 박해한다. 그러니까 교회를 박해할 때는 안 믿는 사람이 박해하는 게 있고, 예수를 제대로 믿지 않는 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손을 잡고 박해하는 게 있다. 그런가 하면 교회들이 거의가 비진리적 세상 넓은 길로 가기 때문에 좁은 길로 가는 진리이치의 말씀을 찾기가 굉장히 어려운 시대, 즉 교회가 모두 세상으로 속화가 된 것도 특수환난이다.
그리고 우리가 꼭 알 것은 환난이 올 때는 일반환난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환난이 먼저 온다는 점이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영의 눈이 밝아야지 눈에 보이는 것만 의식하며 신앙하다가는 육적인 환난에까지 떨어져 버린다.
그러면 특수환난은 누가, 왜 일으키는 거냐? 교회들이 세상과 세상 것을 소원 목적하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 섭리로 마귀로 통해서 거짓 종들을 일으킨 거다. 따라서 거짓 종들이 많은 것은 특수환난이다. 이들로부터 오는 환난은 눈에 보이지 않는 환난이다. 진리를 못 받게 하는 환난이다. 그러면 눈에 보이는 일반환난과 눈에 보이지 않는 특수환난 중에 어느 환난이 더 어려운 환난이겠느냐? 어떤 환난이 보이는 환난이고, 어떤 환난이 보이지 않는 환난인지를 모르면 자기는 환난에 휩쓸린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라고 했는데, 우리가 하나님께로 피해야 할 때가 많다. 악한 자들의 모임에서 피해야 하고, 환난이 왔을 때 이 환난에 빠지지 말고 피해야 하고, 세상 누림성에 빠지지 말고 피해야 하고, 세상의 모든 탐욕에서 피해야 하고, 무지와 무능에서 피해야 하고, 악한 자들끼리 싸우는 싸움에서 하나님께로 피해야 한다.
성도가 영의 눈이 밝아서 이런 모든 것을 판단하고 분별해서 죄와 사망적인 것에 빠지지 않고 피해진 신앙상태를 ‘구원’이라고 한다. 자기가 판단 분별을 해서 환난에 빠져들지 않고, 모르는 상태에서 알아지고, 악한 자들의 모임에서 빠져나오고, 무지 무능의 상태로 있지 않고, 그런 교회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구원’이다. 이런 것이 신앙상태의 구원인데, 분별해서 빠지지 않고 피해진 상태를 ‘구원’이라고 한다. 이렇게 피하는 것은 비겁한 것이 아니라 힘 있는 피함이고 용감한 거다.
싸움에는 얻어맞아야 이기는 게 있다. 얻어맞아야 더 귀한 생명을 잃지 않는 때도 있다. 우리는 그 때 그 때마다 지혜를 잘 써야 한다. 말하자면 자기와 관련이 없는 악한 자들의 싸움을 가로막다가 어느 한 쪽 편인 줄로 오해를 받거나 개죽음을 당하는 수가 있다. 비진리적인 자들끼리 싸우는 것에 협조 동참하지 않는 것이 힘 있는 자요 용감한 자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우리 성도는 환난을 잘 분별해야 되겠고, 환난이 왜 오는지 알아야 되겠고, ‘환난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나는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을 평소에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환난 중에 제일 큰 환난이 무엇일까? 먹고 살기 힘든 것이 환난 중에 제일 큰 환난이냐, 진리를 찾기 어려운 것이 제일 큰 환난이냐? 어느 쪽이냐? 진리를 찾기 어려울 때다. 진리의 종을 찾기 어려운 게 환난이다. 또 참 성도를 찾기 어려운 게 환난이다. 이건 영적인 환난에 접어든 거다. 그 다음에 눈에 보이는 환난은 다 아는 거니까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거다. 그런데 말로는 진리를 찾기 어려울 때가 제일 큰 환난이라고 하는데 일상생활을 할 때는 진리로 살고 있느냐? 이게 문제다.
영적인 환난이 왔을 때 죽을 각오를 하고 생명의 말씀, 진리대로 살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이 그에게 큰 도움을 주실 수 있다. 참 진리의 종을 만나게 해 주시든지, 아니면 환난 속에 휘말리지 않도록 그 마음을 변치 않게 해 주시든지 한다. 사람의 마음이 변하면 환난에 휘말리는 건데, 이 때 마음이 변치 않게 해 주시면 환난을 이길 수 있는 거다. 이런 게 다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이 오는 거다. 하나님의 도움이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물질적인 환난만을 생각하고 물질적인 도움을 얻으려고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도 이런 식으로 신앙을 한다면 이건 육의 신앙차원이 되는 거다. 물질적 신앙이다. 이런 사람은 환난을 당할 때 세상정신이 진하느니 만큼 육의 고통도 진하고 심한 거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많이 깨닫고 사람이 참 사람으로 만들어졌다면 만들어진 것만큼 모든 것을 헤치고 나갈 수 있으니 이 사람은 기쁨이 넘치게 되는 거다.
2절-3절: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 누가 두려워하지 않느냐? 성도, 우리, 나다. 일반적으로도 보면 땅이 변하는데, 땅이 왜 변하는 거냐? 땅이 옥토로 될 수도 있고, 황무지로 될 수도 있는 건데 하늘로부터 오는 단비를 잘 흡수하고 부지런한 농부의 손길이 닿으면 그 땅은 기름진 옥토가 된다. 아무리 기름진 땅이라도 하늘로부터 단비가 없으면 황무지가 되기 마련이다.
신앙적으로 보면 온 세상의 교회가 신앙정신과 사상이 비진리적, 육적, 물질적으로 돌아갔다면 이는 땅이 변해진 거다. 성도의 마음 밭이 변해진 거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마음이 변하면 이 사람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돼버린다. 그런 것처럼 교회가 마음이 변해지면 하나님의 사람임에도 세상 사람처럼 되어버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과 세상의 것을 사랑하면 세상 것을 구하게 되는데, 이는 자기의 마음 밭이 나쁘게 변해진 거다. 마음 밭이 나쁘게 되면 그 밭에 뭐가 돋아나느냐? 잡초가 돋아난다. 잡초가 돋아나면 그 다음에는 뭐가 기어 다니느냐? 들쥐들이 기어 다니고 뱀이 기어 다닌다. 성도가 마음이 변하면 그 마음에 세상이 들어와서 세상 밭이 된 것이니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언행심사가 거칠어진다. 이건 예수님을 떠난 마음이고 예수님을 배신한 신앙이다. 여자가 자기 정조를 버린 것과 같은 거다. 이것은 땅이 변해버린 거다. 땅이 변해버리면 오만 잡초가 나고 곡식이 안 된다.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산은 땅에서 우뚝 솟은 거다. 땅에서 우뚝 솟은 것이 산이다. 그런데 우뚝 솟은 것들이 왜 흔들리느냐? 그 이유는 아무리 크고 우뚝 솟아 있어도 진동되고 요동되고 흔들릴 것을 깔고 앉아있으면 흔들리기 마련이다.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모든 권세나 부귀나 명예나 영광이나, 또는 땅에 조직된 모든 단체나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모든 것은 지진이 나면 다 흔들린다. 땅으로 기반이 된 것은 다 흔들리게 되어있다. 안 그런 것은 없다. 반면에 하늘로부터 된 것은 땅이 기초가 아니니까 안 흔들린다.
교회가 세상에 속화된 것은 세상이라고 하는 바다 가운데 빠진 거다.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듯이 교회가 세상이라고 하는 바다 가운데 빠진 거다. 왜냐? 교회가 어디를 기초로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땅을 소원 목적하고 땅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라고 하는 바다에 빠진 거다.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 바닷물이 흉용한다고 하는 것은 물결과 물결들이 그 무엇에 의해서 서로 부딪히면서 뾰족 뽀죡 세차게 일어나는 거다. 바닷물 속에서 지진이 일어나도 이렇게 된다. 바람이 불어서 파도가 일어나는 것은 물의 표면에 물결을 일으키지만 바닷물이 아래로부터 흔들려서 일어나는 현상은 더 무섭다. 이것은 때로는 물의 표면은 조용할지라도 바닷물 안에서는 요동을 치는 일도 있다.
세상나라는 어떤 기업이나 단체가 무너지면 자기들끼리 막 일어난다. 또 서로가 더 높이 올라가려고 여기 불쑥 저기 불쑥 일어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세상으로 빠지면 서로가 권세를 잡고 일어나려고 난리법석을 떨게 된다.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라고 하는 것은 이방세상이 미친 듯이 노는 것처럼 세상 속화된 교회도 덩달아서 미치고 날뛴다는 말이다.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교회 안이 진리사상이 넘치는 게 아니라 비진리적 세상적 인본주의 사고방식의 정신이 넘치니 신앙건설이 아닌 세상으로 사망계로 전부 소모되어 버리는 하나의 종교적 현상을 말하는 거다. 교회들이 육적 세상으로 넘어지면 세상 사람들까지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판을 치는 거다.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 인간세상이 천지개벽을 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왜 그런가 하니 예수 믿는 우리는 실상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형상세계로서 변동과 변질이 되는 세상이고, 요동되는 세상이고, 전부 불타질 세상이고, 바람 불면 파도가 일어나는 세상임을 알고 세상에 존재하는 기간 동안에 크고 작은 모든 사건을 통과하면서 이룰구원을 잘 이뤄가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는 거다.
세상만사가 없으면 우리의 구원도 없다. 물질세상을 창조해 놓으신 것은, 그리고 우리를 만물 가운데 두신 것은 자신에게 닥친 사건 환경 가운데서 자타의 이룰구원을 잘 이루라는 거다. 만일 구원을 얻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이룰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인생을 끝마친다면 인생으로 태어난 아무 가치가 없는 거다. 우리는 가치 있게 살아야 한다. 구원을 잘 이뤄야 그 인생이 가치가 있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