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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29)
말씀: 계 13:1-10. 2025년 1월 19일오전 11시
오늘 말씀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은 “짐승의 장”이란 제목을 붙일 만합니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과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있습니다. 이 짐승들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들이 있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러하듯이 성경 자체의 본문만을 가지고 그 말씀이 말하는 것만 따라갈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늘에서 네 짐승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왕좌 둘레에 있는 그룹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앞뒤에 눈이 가득했으며(계4:6) 사자, 송아지, 사람의 얼굴과, 날아다니는 독수리 같았습니다(계4:7). 그들은 저마다 여섯 날개를 가졌으며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며 주님을 찬양합니다(계4:8).
네 짐승들은 왕좌에 앉으신 분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렸습니다(계4:9). 네 짐승은 어린양이 봉인을 열 때마다 요한에게 “와서 보라”고 외쳤습니다(계6:1-8). 요한은 하늘의 왕좌 둘레에 있는 이 짐승들을 보고 그들의 모습과 그들이 하던 일을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왕좌 둘레에 있는 그룹들이었습니다.
그런데 11:7절에는 바닥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하늘에서 요한이 본 왕좌 둘레에 있던 그 짐승들, 즉 그룹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증언을 마칠 때에 바닥없는 구덩이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을 대적하여 전쟁을 일으켜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이므로](계11:7). 바닥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오는 짐승이란 점에 주목하십시오. 계시록 12장에서는 하늘에 있는 큰 붉은 용을 보았습니다. 이 둘은 같지 않습니다. 하나는 바닥없는 구덩이에서 땅 위로 올라왔고 하나는 하늘에서 쫓겨나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11장에서 우리는 이 짐승에 대해서 상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짐승은 부활한 로마 제국이나 로마 교황청(캐톨릭)이 아닙니다. 성경은 짐승의 수를 “어떤 사람의 수”(계13:18)라고 말합니다. 고로 바닥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온 짐승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짐승이 사람이란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니엘서에도 이 내용이 나옵니다. [이 네 큰 짐승은 땅에서 일어날 네 왕이니라.](단7:17). 네 짐승을 네 왕이라고 말합니다. 계시록 9장에서 바닥없는 구덩이의 천사가 나옵니다. 이는 보통 천사가 아니라 바닥없는 구덩이로부터 올라오는 괴물 메뚜기들의 왕으로 아바돈(히), 아폴리온(헬)이란 이름을 가진 자입니다.
이 자의 정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본 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앞으로 바닥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라....](계17:8). 우리는 이 짐승이 누구인지 이미 충분히 살펴보았고 확증했습니다. 계시록 17장에서 다시 또 다루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온전히 짐승에 관한 내용이므로 미리 짐승에 대해서 배경 학습을 하는 중입니다.
성경에는 멸망의 아들이라 불리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요17:12). 그는 죄의 사람이기도 합니다(살후2:3). 주님은 자신의 제자 중 하나를 “마귀니라”(요6:70)고 그의 정체를 밝혀 주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몸을 입은 마귀요, 멸망의 아들이요, 죄의 사람인데 그는 “자신의 처소”로 가려고 예수님을 배반하여 넘겨주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지옥이 아니라 “자신의 처소”입니다(행1:24,25). 그곳은 바닥없는 깊은 구덩이입니다. 주님께서 여자의 씨였듯이 가룟 유다는 뱀의 씨였습니다. 그는 “저 사악한 자”로 불립니다.
요한은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는데 이 짐승의 정체는 이미 앞에서 다루었습니다. 짐승은 지금 “바닥없는 구덩이”에 있는데 그 곳의 천사이며 왕입니다. 그는 “자기 때에” 바닥없는 구덩이에서 나와 하늘에서 내려온 사탄(큰 붉은 용)으로부터 권능과 자리를 받을 것입니다.
이 짐승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선포할 것이며 사람들을 희생 제물로 삼을 것입니다(계6). 이 짐승 앞에 두 증인이 서게 되나 그들은 죽임을 당합니다. 이 짐승은 성도들과 싸워서 이기는 권능을 부여 받고 “모든 족속들과 언어들과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습니다(13:7).
자, 다니엘서를 보겠습니다. [그 바다에서 서로 다른 큰 짐승 네 마리가 올라왔더라.](단7:3). 다니엘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 네 마리를 보았습니다.
첫째 짐승은 사자와 같으며 독수리의 날개들을 가졌고(4), 둘째 짐승은 곰과 같고(5), 셋째 짐승은 표범과 같은 것이 등에 날짐승의 날개 넷이 있었고 머리가 넷이었습니다(6). 넷째 짐승은 “....두렵고 무서우며 심히 강하고 또 큰 쇠 이빨을 가지고 있어서 삼키고 부수어 산산조각 내며 그 나머지를 자기 발로 짓밟았더라. 그 짐승은 그것 전에 있던 모든 짐승들과 다르고 또 열 뿔을 가졌더라.”(단7:7)고 합니다.
요한이 본 짐승은 열 뿔을 가진 넷째 짐승이었습니다. 넷째 짐승의 마지막은 참으로 끔찍합니다. “........그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그의 몸이 파멸되어 타오르는 불꽃에 넘겨질 때까지 바라보니라”(단7:11하). 계시록에서는 앞의 세 짐승은 없고 넷째 짐승만 다룹니다.
17절이 해석합니다. [이 네 큰 짐승은 땅에서 일어날 네 왕이니라.](단7:17). 짐승은 종교가 아닙니다. 국가나 민족이 아닙니다. 짐승은 왕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땅에서 “일어날”(shall arise) 왕이란 것입니다.
다니엘이 환상을 본 시점이 “바빌론 왕 벨사살의 제 일 년”(단7:1)이므로 앞으로 일어날 네 왕에는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은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시중의 주석서들 99%는 금신상의 해석에 맞추어 금 머리인 느부갓네살부터 시작하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이같이 이르되, 넷째 짐승은 땅 위에서 넷째 왕국이 될 터인데 이 왕국은 모든 왕국들과 달라서 온 땅을 삼키고 짓밟은 뒤 부수어 산산조각 낼 것이요,](단7:23). 했습니다.
넷째 짐승은 왕일 뿐 아니라 “왕국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왕국에서 나온 열 뿔은 또 다른 열 왕입니다. 그 뒤에 다른 왕이 일어날 것입니다(단7:24).
본문 1절입니다. [내가 바다의 모래 위에 서서 보니 바다에서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한 짐승이 일어나는데 그의 뿔들 위에는 열 개의 왕관이 있고 그의 머리들 위에는 신성모독 하는 이름이 있더라.](계13:1).
사도 요한은 하늘에서 큰 전쟁을 보았고 용과 그의 천사들이 땅으로 쫓겨난 것과 땅에서 광야로 도망가는 여자, 남은 자들과 전쟁하기 위해 나가는 용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내가 바다의 모래 위에 서서 보니...”(1)란 말은 또 다른 환상과 계시를 보는 장면입니다. 성경에서 따로 언급이 없다면 바다는 지중해입니다. “바다의 모래”란 표현은 구약에서 18번 나오는데 욥기6:3절을 제외하고는 모두 많은 사람들, 무리들을 말합니다. 계시록 20:8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수의 사람을 말할 때 “하늘의 별들같이”혹은 “바다의 모래같이”라는 말을 씁니다.
요한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지중해 바닷가의 모래 위에 서 있습니다. 거기서 다니엘이 본 환상과 동일한 환상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다른 시대에 다른 장소에서 각기 다른 사람들의 손에서 기록되었지만 내용은 동일합니다. 저자가 주님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다에서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한 짐승이 일어나는데”(1). 계시록 12:3절과 비교해 보십시오. [또 하늘에 다른 이적이 나타나니라. 보라,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큰 붉은 용이 있는데 그의 머리들 위에 일곱 개의 왕관이 있고](계12:3).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하늘에서 본 큰 붉은 용과는 뭔가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차이점을 말해 보십시오.
둘 다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습니다. 붉은 용은 일곱 머리에 왕관이 있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뿔에 왕관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짐승이고 하나는 바다에서 땅 위로 올라온 짐승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용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권세와 자리를 줍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 대해 다니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이같이 이르되, 넷째 짐승은 땅 위에서 넷째 왕국이 될 터인데 이 왕국은 모든 왕국들과 달라서 온 땅을 삼키고 짓밟은 뒤 부수어 산산조각 낼 것이요, 또 이 왕국에서 나온 열 뿔은 앞으로 일어날 열 왕이며 그들 뒤에 다른 왕이 일어날 터인데 그는 먼저 있던 자들과 다르고 또 세 왕을 정복하리라. 또 그가 지극히 높으신 분을 대적하여 엄청난 말들을 하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들을 지치게 하고 때와 법들을 바꾸려고 생각할 것이며 그들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까지 그의 손에 주어지리라.](단7:23-25).
넷째 짐승은 자신의 왕국을 세울 것인데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왕국입니다. 하늘의 왕국이 세워지기 전 짐승은 자신의 왕국을 이 땅에 먼저 세우는데 흔히 말하는 세계 단일 정부입니다. 하나의 종교, 하나의 정부입니다. 이것을 UN이다, 교황청이다 해석이 많지만 그냥 짐승의 왕국이라고 부르면 간단합니다.
넷째 왕국 즉 짐승의 왕국은 이 땅의 모든 왕국을 정복하고 지배합니다.
열 뿔은 “앞으로 일어날 열 왕”이라고 합니다. 큰 환란 때 이 땅이 열 왕국 체계로 재편될 것임을 보여 줍니다. 그들 뒤에 다른 왕이 일어나 큰 환란 중 후삼년 반에 해당하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까지” 권세를 잡습니다. 다른 왕이라 불리는 왕의 특징은 “지극히 높으신 분을 대적하려고 엄청난 말들을” 합니다. 성도들을 지치게 합니다. 또 때와 법을 바꾸려고 합니다.
[그러나 심판이 진행되매 그들이 그의 통치 권세를 빼앗아 그것을 끝까지 소멸시키고 파멸시킬 것이요, 왕국과 통치 권세와 온 하늘 아래 있는 왕국의 위대함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들의 백성에게 주어질 터인데 그분의 왕국은 영존하는 왕국이며 모든 통치 권세가 그분을 섬기고 그분께 순종하리라. 하니라. 여기까지가 그 일의 끝이니라. 나 다니엘에 대해 말하자면 나의 깊은 생각들이 나를 심히 근심하게 하였고 내 속에서 안색이 변하였으나 내가 그 일을 내 마음속에 간직하였느니라.](단7:26-28).
주님이 친히 오셔서 그들을 멸하시고 그의 통치 권세를 빼앗아 끝까지 소멸시키고 파멸시킬 것입니다. 본문에서 “여기까지가 그 일의 끝이니라.”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끝”이란 표현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큰 환란의 끝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성경에서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 바로 그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마24:13)는 말씀이나 [이는 우리가 우리의 확신의 시작을 끝까지 확고히 붙들고 있으면 우리가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라.](히3:14)는 말씀에 끝이란 말이 언제인지 성경 자체의 증언으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다시 1절입니다. [내가 바다의 모래 위에 서서 보니 바다에서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한 짐승이 일어나는데 그의 뿔들 위에는 열 개의 왕관이 있고 그의 머리들 위에는 신성모독 하는 이름이 있더라.](13:1).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하늘에서 내려온 용이 아닙니다. 용은 사탄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짐승은 적그리스도입니다. 13장 후반부에 나오는 짐승은 거짓 대언자입니다(11). 용은 짐승에게 능력과 자리와 권위를 부여해 줍니다.
거짓 대언자는 더러운 영으로서 적그리스도를 높이고 그에게 경배하도록 사람들에게 각종 표적과 이적을 보여 줍니다. 이 셋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흉내 낸 사탄의 삼위일체입니다. 사탄은 =아버지 하나님, 적그리스도는 = 예수 그리스도, 거짓 대언자는 =성령을 흉내 낸 모조품들입니다.
[또 내가 보니 개구리 같은 부정한 영 셋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대언자의 입에서 나오더라.](계16:13). “용의 입, 짐승의 입, 거짓 대언자의 입”에서 동일한 것이 나옵니다. 이는 사탄의 삼위일체로 아버지의 영,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동일한 것과 같습니다.
“그의 머리들 위에는 신성모독 하는 이름이 있더라.”(1).
[이렇게 그가 영 안에서 나를 광야로 데려가니라. 내가 보니 한 여자가 신성모독 하는 이름들로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주홍색 짐승 위에 앉아 있더라.](계17:3), [그녀의 이마에는 {신비, 큰 바빌론, 땅의 창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는 한 이름이 기록되어 있더라.](계17:5). 열 뿔을 가진 이 짐승은 사람이며 왕입니다. 그는 신비의 큰 바빌론을 세상 단일 종교로 삼습니다.
바빌론은 모든 종교를 통합했던 느부갓네살의 전례가 있습니다. 신비의 큰 바빌론은 적그리스도가 세상의 모든 종교를 통합니다. “한 여자.........어미라”는 말씀을 통해서 거룩한 어머니라 부르는 종교(로마 캐톨릭)가 이 짐승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2절입니다. [내가 본 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의 발은 곰의 발 같으며 그의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 권능과 자기 자리와 큰 권위를 그에게 주었더라.](계13:2).
요한은 자신이 본 짐승의 모습을 표범과 비슷하다고 묘사하는데 역시 전체적인 모습은 표범입니다.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발은 곰, 입은 사자의 입과 같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곰, 표범의 순서로 기록했는데 요한은 순서를 정 반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구약에서 미래를 대언하고 요한은 지금 큰 환란 끝에서 과거를 보며 기록합니다. 요한이 본 짐승은 다니엘이 본 네 짐승 중 세 짐승들의 모습, 특징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표범은 점무늬가 있는 짐승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입니다.
요한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보았지만 사실 이것은 괴물과 같은 흉측한 모습입니다. 표범이 날개를 달고 있는데 바다에서 올라와 신속하고 빠르게 약탈하고 정복합니다. 곰의 발바닥은 뭔가를 뭉개고 짓밟는데 가장 유용합니다. 사자의 입은 약탈하는 입입니다. 입은 먹어 치우는 것 외에 말을 합니다.
다시 2절입니다. “용이 자기 권능과 자기 자리와 큰 권위를 그에게 주었더라.”(2). 하늘에서 떨어진 붉은 큰 용은 여전히 이 세상의 신이요, 통치자입니다. 그는 자기 권능과 자기 자리와 큰 권위를 짐승에게 주었습니다. 용은 사탄이며 마귀입니다. 그는 한 때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시 마귀가 그분을 심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세상의 모든 왕국들과 그것들의 영광을 그분께 보여 주며 그분께 이르되, 네가 만일 엎드려 내게 경배하면 내가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하매](마4:8-9).
사탄은 예수님에게, 자기에게 경배하면 “내가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제안했으나 주님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에게 주겠다고 한 그 모든 것을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주었습니다. 짐승은 용에게 경배하고 그에게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짐승은 용에게 권능과 자리와 권세를 받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이 모든 것을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능이 내게 주어졌으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마28:18). 용이 준 것과 아버지가 준 것, 짐승이 받은 것과 어린양이 받은 것의 차이를 비교해 보십시오.
3절입니다. [또 내가 보니 그의 머리들 중 하나가 상처를 입어 죽게 된 것 같았는데 그의 치명적인 상처가 나으매 온 세상이 놀라며 그 짐승을 따르더라.](계13:3).
짐승의 머리들 중 하나가 치명상을 입어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아마 요인 암살단이 그를 죽이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짐승의 머리들 중 하나가 치명상을 입어 죽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의 구원을 위해 나가시되 구원을 위해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와 함께 나가사 그 사악한 자의 집에서 그 기초를 목까지 드러내심으로써 그 머리를 상하게 하셨나이다. 셀라.](합3:13). 그 사악한 자(저 사악한 자)는 적그리스도를 말하는데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 분은 주 하나님이십니다. 대언자 스가랴는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합니다. 우상 목자에게 칼이 그의 팔과 오른쪽 눈에 임한다고 합니다. 그의 팔이 마르고 오른쪽 눈이 완전히 어둡게 됩니다.
[양 떼를 버리는 우상 목자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칼이 그의 팔과 오른쪽 눈에 닥치리니 그의 팔이 완전히 마를 것이며 그의 오른쪽 눈이 철저히 어둡게 되리라, 하시니라.](슥11:17).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반해 짐승(적그리스도)은 칼에 그의 팔과 오른 쪽 눈이 찔려 죽게 된 것 같았습니다. 의사는 그가 죽은 것으로 판명할 정도로 치명적이었던지라 성경 본문은 “그가........죽게 된 것 같았는데......”(As it were wounded to death)(계13:3)라고 말합니다.
[...... 그의 치명적인 상처가 나으매 온 세상이 놀라며 그 짐승을 따르더라.](3). 죽은 것 같았던 짐승의 치명적인 상처가 나았고 그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셨는데 짐승은 죽은 것 같았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부활을 철저히 모방하고 있습니다.
그의 치명적인 상태는 죽음이나 다름없었던지라 그가 나았을 때 온 세상이 놀랐습니다. 짐승은 죽음을 이기고 일어난 자가 되었고 일약 불사신이요 영웅이 되었습니다. 온 세상이 놀랄 정도라면 그의 죽음과 같은 상처가 나은 일이 얼마나 큰 표적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3절에서는 “상처를 입어 죽게 된 겉” 같았다고 했습니다. 12절에는 “치명적인 상처가 나은 자”라고 합니다. 14절에는 “칼로 상처를 입었다가 살아난 그 짐승”이라고 말합니다. 죽은 자 같았다가 사탄의 힘을 받아 다시 살아났습니다. 누가 짐승의 머리에 상처를 입힌 것입니까? 우리는 그 용감한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추리할 수는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칼을 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여기에 칼 두 자루가 있나이다.”(눅22:38)라고 보고했고 주님은 “족하도다.”(눅22:38)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칼을 버리라거나 감추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칼을 들고 설친 베드로에게는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마26:52)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너무나 이상합니다. 돈주머니가 있는 자는 그것을 취하고 짐 보따리도 취하고 칼도 사라고 하십니다. 이전에 이스라엘 전역에 2명씩 복음을 선포하도록 보내실 때는 “너희 돈주머니에 금이나 은이나 놋(동전)을 준비하지 말고 여행을 위해 짐 보따리나 덧옷 두 벌이나 신이나 또 지팡이들을 준비하지 말라......”(마10:9-10)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전에 하신 말씀과는 정반대입니다.
주님의 초림 때나 재림 때(큰 환난)나 이 땅에는 왕국 복음이 전파됩니다. 초림 때 전파된 왕국복음은 오직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의 길은 물론이고 사마리아의 도시들로도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10:5,6). 그러나 재림 때에 왕국 복음은 온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합니다(마24:13,14). 그래야 끝이 옵니다. 초림 때 제자들은 이스라엘에서 표적과 권능을 행하며 왕국복음을 전하며 기뻐했습니다. 병자들을 고치고 마귀들을 제압했습니다. 그러나 재림 때의 왕국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박해를 받으며 공회에 넘겨지고 회당에서 매질을 당하고 총독들과 왕들 앞에 불려나가서 증언하게 됩니다(마10:22,24:13).
[너희가 나로 인해 총독들과 왕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이방인들을 대적하여 증언하리라.](마10:18). 적그리스도 앞에서 불려가 증언하게 될 자들 중에 칼을 가지고 있다가 그를 죽이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고 저지를 당했지만 적그리스도는 눈과 팔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죽은 자 같이 됩니다(슥11:17). 왕국 복음을 전하는 증인들은 적그리스도가 거짓임을 압니다.
자, 이들이 누구입니까? 144,000명의 유대인들입니다. 이들은 온 세상에 나가 왕국 복음을 전할 것이며 마태복음 10장처럼 맨 몸이 아니라 주머니를 차고 신발을 신고 칼을 들고 나갈 것입니다. 큰 환란 때에 적그리스도의 눈과 팔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죽이는 암살 사건은 온 세상에 어떤 파장을 미칠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마 안에 하나님의 인을 받고 특별한 보호아래(9:4) 사역하던 144,000명은 하늘로 휴거되고(14:1),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 가야합니다.
그 암살자가 다름 아닌 왕국 복음을 증언하던 유대인들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멸족을 당할 것입니다. 반 유대인 정서가 어느 때보다 팽배한 큰 환란 때에 이 일은 곧 바로 평화 조약을 깨뜨리는 결과로 이어지고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납니다. 지상에서 유대인들을 멸해 버리자는 슬로건은 그냥 구호가 아니라 전 세계의 일치된 여론이며 정책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용은 유대인 멸족(말살) 계획을 성공하지 못합니다. 다만 여자의 씨 가운데 남은 자들과 전쟁을 하려고 나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12장에서 배운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여전히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계12:17).
[...그의 치명적인 상처가 나으매 온 세상이 놀라며 그 짐승을 따르더라.](13:3).
짐승은 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 온 세상의 진정한 슈퍼스타요 신으로 추앙받습니다. 온 세상이 놀라며 그 짐승을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을 때 세상은 그분을 배척했습니다. 이에 주께서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는데 너희가 나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자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가 그를 받아들이리라.](요5:43). 하신 말씀대로 짐승이 자기 이름으로 올 때 세상은 그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4절입니다. [그들이 그 짐승에게 권능을 준 용에게 경배하고 또 그 짐승에게 경배하며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그와 전쟁을 할 수 있느냐? 하더라.](계13:4).
짐승이 살아난 것은 의학의 힘이 아니라 “붉은 용”이 그를 살린 것입니다. 큰 환란 때 사람들은 짐승을 따를 뿐 아니라 짐승에게 권능을 준 용에게 경배합니다. 짐승과 용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와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하나님 아버지를 경배합니다. 환란 때 사람들은 용에게 경배하고 또 그 짐승에게 경배합니다.
사람들은 사탄을 보지 못합니다. 대신 짐승을 보며 짐승에게 권능을 준 존재가 용이란 사실을 알고 경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지 못합니다(요일4:1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 나아가고 그분을 알고 경배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확한 형상입니다(히1:3). 짐승은 용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입니다. 사탄은 짐승을 통해 자신을 사람들에게 계시합니다.
사람들은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4)고 최고의 찬사를 보냅니다. 사람들은 짐승을 보는데 이는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가 보여준 이적, 표적, 권능을 보면서 경배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신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짐승은 사람들에게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를 높이는 법을 가르쳐 주기에 사람들이 따르고 경배합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현실이고 절망입니다. 그런데 몸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죽은 자 같은 자가 일어났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들이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짐승(적그리스도)을 경배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짐승과 같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용으로부터 권능을 받아 짐승과 같은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짐승을 따릅니다.
누군가를 따른다는 것은 따르는 존재와 동일하게 되고 싶은 욕망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것은 주님과 같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짐승을 따르는 이유는 짐승은 ‘의’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상 숭배의 핵심은 육체의 정욕을 따라 행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신들을 만들어 섬기는데 이유는 그런 신들은 결코 자신들을 구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우상)들을 만드는 자들도 그것(우상)들과 같고 그것(우상)들을 신뢰하는 모든 자도 그러하도다.](시115:8). 금이나 은이나 나무나 돌로 뭔가를 만들어 놓고 신이라고 하면서 섬기는데 이는 참으로 웃기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신들 중 대부분은 본래 신들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관여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섬기는 것들입니다.
“누가 그와 전쟁을 할 수 있느냐?”(계13:4). 적그리스도가 사람들로부터 받는 찬양입니다. 마치 성도들이 우리 주님을 찬양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용과 그 짐승을 경배하면서 그와 비길 자가 없고 그를 이길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누가 그와 전쟁을 할 수 있느냐?”(4). 강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망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를 이길 자가 없어도 하나님은 그를 멸하실 수 있습니다. 경배한다는 말은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의미는 입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위해 이스라엘 안에 칠천 명을 남겨 두었나니 곧 바알에게 절하지 아니한 모든 무릎과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모든 입이니라, 하시니라.](왕상19:18).
여기서 주님은 바알에게 절하지 아니한 무릎,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모든 입이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바알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들을 묘사할 때 ‘절하지 않는 것, 입 맞추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짐승에게 경배한다는 것은 그에게 절하고 그에게 입 맞추는 것입니다. 카톨릭 교황을 알현하는 자들을 보십시오. 엎드려 절하고 그의 발가락에 입 맞춥니다.
5절입니다. [또 용이 그에게 큰 것들을 말하며 신성모독 하는 입을 주고 또 그에게 마흔두 달 동안 지속할 권능을 주매](계13:5).
용은 자신의 그리스도(적그리스도)에게 큰 것들을 말하며 신성모독 하는 입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너희가 듣는 말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것이니라.](요14:24)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짐승이 하는 말은 용의 것입니다. 용은 짐승에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신성모독 하는 입을 주었습니다.
입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쏟아내는 출구입니다. 마음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귀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옵니다. 입은 마음의 보고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짐승은 사탄으로 충만하기에 용이 준 말을 쏟아냅니다. 그의 활동 기간은 “마흔두 달”입니다.
6절입니다. [그가 신성모독 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자기 입을 벌려 그분의 이름과 그분의 성막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모독하더라.](계13:6).
짐승은 입을 벌려 하나님을 대적하며 모독합니다. 그분의 이름과 그분의 성막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모독합니다. 그를 따르고 경배하는 무리들이 모두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분의 성막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모독하더라.”는 말씀은 큰 환란 때 모든 크리스천들이 들림 받고 하늘에 거하므로 이 땅에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큰 환란 때 신약 성도들은 땅에 거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늘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크리스천들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고전6:19). 그분의 성막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이란 말씀은 큰 환란 전 교회의 휴거를 입증해 주는 말씀입니다.
7절입니다. [또 그가 성도들과 전쟁하여 그들을 이기는 것을 허락받고 모든 족속들과 언어들과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능을 받았으므로](계13:7). 본문에서 성도들은 신약 성도들인 크리스천들이 아닙니다. 여자의 씨 중에서 남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을 가진 자들”(계12:17) 입니다. 용은 이들과 전쟁하려고 갔는데 짐승은 성도들과 전쟁하여 그들을 이깁니다.
마귀는 결코 교회를 이길 수 없습니다. 신약 성도들은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권능을 받았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가 도망갑니다(약4:7, 벧전5:8). 그러나 큰 환란 성도들은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짐승은 “모든 족속들과 언어들과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능”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통치자로서 세상을 지배합니다. 마귀가 통치하는 세상에서 통치자들은 마귀의 천사들과 마귀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짐승은 42개월 동안(후 삼년 반) 사람들의 경배를 받으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자로서 자기 뜻대로 행할 것입니다. 이 때 그가 하는 일은 다니엘 7장에 잘 나옵니다. [내가 보니 바로 그 뿔이 성도들과 전쟁하여 그들을 이겼으나](단7:21). 계시록13:7절의 본문 구절과 정확히 일치하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가 이같이 이르되, 넷째 짐승은 땅 위에서 넷째 왕국이 될 터인데 이 왕국은 모든 왕국들과 달라서 온 땅을 삼키고 짓밟은 뒤 부수어 산산조각 낼 것이요,](단7:23). 그는 권력을 잡은 후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박살을 냅니다.
마귀 들린 자들은 건설자가 아니라 파괴자들입니다. 히피들, 집시들이 성행할 때 그들은 마을이나 도시들에 불을 지를 줄은 알았지만 작은 도시 하나도 세울 줄은 몰랐습니다. 말로는 창조적 파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파괴할 줄만 알지 창조할 줄은 모릅니다.
[또 그가 지극히 높으신 분을 대적하여 엄청난 말들을 하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들을 지치게 하고 때와 법들을 바꾸려고 생각할 것이며 그들은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까지 그의 손에 주어지리라.](단7:25). 짐승이 하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는 것 뿐 아니라 “때와 법을 바꾸려”고 합니다. 일주일 체계를 바꾸든지 30일 단위의 월, 12개월 단위의 년과 같은 역력 체계를 바꾸려 할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때를 바꾸기 위함입니다. 42개월 동안 그에게 주어진 시간을 연장하려면 이런 방법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가 그 군대의 통치자에게 이르기까지 자기를 크게 높였으며 그에 의해 날마다 드리는 희생물이 제거되고 그분의 성소가 있는 곳이 허물어졌더라.](단8:11). 큰 환란 때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구약의 율법에 따라 하나님께 희생물을 드렸는데 그것이 금지되고 성소는 허물어집니다.
[육십이 이레 뒤에 메시아가 끊어질 것이나 그것은 그분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니니라. 앞으로 올 통치자의 백성이 그 도시와 그 성소를 파괴할 것이요, 그 일의 끝에는 홍수가 있을 것이며 또 그 전쟁이 끝날 때까지 황폐하게 하는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 많은 사람과 한 이레 동안 언약을 확정할 것이며 그가 그 이레의 한중간에 희생물과 봉헌물을 그치게 하고 가증한 것들로 뒤덮기 위해 심지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작정된 그것이 그 황폐한 곳에 쏟아지리라, 하니라.](단9:26-27).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이런 부분은 너무나 많이 들었기에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실제 역사에서 문자 그대로 이루어질 때 주의 말씀의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신약을 믿지 않는 히브리인들이라도 구약의 다니엘서를 가지고 이 모든 일들을 알 수 있습니다. [날마다 드리는 희생물이 제거되고 황폐하게 하는 가증한 것이 세워질 때부터 천이백구십 일이 있으리라.](단12:11). 이 일은 예언의 중요한 지표 중의 하나입니다. 날마다 드리는 희생물이 제거되고 황폐하게 하는 가증한 것이 세워지는 날이 큰 환란 중간입니다. 이 날부터 1,260일(마흔 두 달)을 세면됩니다. 1,290일은 거기다 한 달을 더 한 시간입니다.
주께서 이 땅에 천사들과 함께 오셔서 심판을 집행하시면 땅은 피로 더럽혀집니다. 큰 환란 동안 짐승이 황폐하게 해 둔 세상을 정결하게 하는데 걸리는 시각, 민족들을 심판하는 시각, 왕국을 세우고 정비하는 일을 다 하게 되면 1,335일까지 됩니다(단12:12).
8절입니다. [땅에 거하는 모든 자들 곧 세상의 창건 때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그에게 경배하리라.](13:8).
하늘에 거하는 자들은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 중에 페트라로 도망간 사람, 산이나 광야로 숨어버린 사람들도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도망가지 않고 남아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들은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땅에 거하는 자들은 “세상의 창건 때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입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는 짐승에게 경배하고 그 짐승을 보고 놀랍니다(계17:8). 큰 환란 때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려면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계3:5). 신약의 크리스천은 주님을 믿는 순간 그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누구나 그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은 주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가 죄를 범할 때 지워졌다면(출32:33) 어린양의 생명책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의 생명이 다시 태어날 때 기록됩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들의 이름을 호적에 먼저 올릴 수는 없습니다. 아들로 태어났을 때 그 태어난 아이의 이름이 지어지고 기록됩니다. 이로써 장로교단의 구원 예정론이 얼마나 잘못된 오류인지 알아야합니다. 모태신앙이란 말은 성경에 없는 말로 사람들이 지어낸 말입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믿고 하나님께 태어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그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들이 너희에게 굴복하는 이 일로 기뻐하지 말고 오히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으므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10:20). 제자들의 이름이 처음부터 기록 되었던 것이 아니라 믿는 순간 하늘에 기록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는 복음을 믿는 순간 다시 태어난 자로서 이름이 기록됩니다(빌4:3). 신약 성도의 경우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은 어떤 경우에도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려면 주를 믿으면 됩니다. 큰 환란 때는 이기는 자가 되면 됩니다. “세상의 창건 때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8)이란 말씀은 수식 관계를 정확히 알아 두어야 합니다.
본문을 그냥 읽으면 예수님께서 세상의 창건 이후로 죽임을 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창세전에 죽으셨다고 외칩니다. 설교단에서 “창세전에 죽임을 당한 어린양”,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란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래야 했다면 그분께서 세상의 창건 이래로 반드시 자주 고난당하셨어야 할 것이라. 그러나 그분께서는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시려고 이제 세상 끝에 한 번 나타나셨느니라.](히9:26).
예수님은 세상 끝에 단 한 번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나사 죽으셨습니다. 성경은 그분께서 세상의 창건 이래로 자주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이나 짐승에게 경배하는 자들은 세상의 창건 이후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입니다. 계시록 17:8을 보면 이는 정확한 말씀입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세상의 창건 이후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계17:8)이라고 말씀합니다.
9절입니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계13:9). 이 표현은 우리 주님께서 즐겨 사용하신 말씀으로 “누구든지” 들으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누군가를 미리 예정하거나 선택해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옵니다.
10절입니다. [포로로 끌고 가는 자는 포로로 잡혀갈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반드시 칼로 죽임을 당하리니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있느니라.](계13:10).
짐승이 통치하는 42개월 동안 성도들이 받는 고난입니다. 성도들은 포로로 끌려가고 칼로 죽임을 당합니다. 칼을 들고 무장하여 저항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은밀하게 성전을 선포하며 저항을 하는 그런 이들이 있겠지만 그들은 다 포로로 끌려가고 칼로 죽임을 당합니다. 짐승은 성도들과 전쟁하여 이기는 권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7). 저항하는 것보다 원수 갚는 일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 낫습니다.
[만일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죽을 자는 죽음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며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라.] (렘15:2). 이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큰 환란 때는 잡아가면 잡혀 가고 죽이면 죽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은 “이제부터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14:13) 하셨습니다.
환란 성도들에게 주어진 명령인데 참으로 가혹해 보입니다. [그가 오면 이집트 땅을 쳐서 죽일 자는 죽음에 넘기고 포로 삼을 자는 포로로 넘기며 칼로 칠 자는 칼에 넘기리라.](렘43:11). 짐승은 이렇게 할 것입니다. 여기에 환란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있습니다.
오늘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인 ‘적그리스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에 대해 공부합니다. 용, 적그리스도 다음은 ‘거짓 대언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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