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족[纏足]이 언제 생겼는지는중국의 사학자들도 판단을 확실히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근근히 문학작품에서 그 물증을 찾을 뿐이다.
이들의 판단에 따르면중국 송나라 때 이 후로여성의 발을 일컬러[삼촌금련(三寸金蓮, 즉 금으로 다듬은 세치 길이의 연꽃과 비슷하다고여성들의 발이 작음을 찬미하는 말)]이라고 했고,
[삼촌금련]이라는 말은미인의 대명사가 되었다.아무리 이쁜 여인이라도 발이 크면 미인의 반열에 올라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송 이전에는발이 작음을 찬미하는 말이 없다는 것이다.
남송의 말대 황제인 이후주의 시에 발이 작음을 찬미한 말이 등장하게 되는데,그 전의 당송 명가들의 시에는 전혀발이 작음을 찬미한 글귀가 없다는 것이다.
송나라 때의 소동파나 육유의 시들에는작은 발을 찬미한 글들이 등장했다.
[수호전]에 등장하는 서문경과 반금련의 이야기를 다룬[금병매]에는 발이 작음을 자랑해 죽은 여인이 있다.
서문경은 자기의 몸종인 송혜연을 간통하고나서 송혜연의 발이 작아 귀엽다고 했다.
이에 자부감을 느꼈던지,송혜연은 반금련의 신에 자기 신이 들어간다고 했다.이에 앙심을 먹은 방금련은 기회를 보아 송혜연 부부를 죽여버렸다.
발이 작아 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남의 발이 크다고 웃어 죽은 사람도 있다.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소물이꾼으로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가 황제가 된 사람이다.
주원장의 부인 마황후는가난한 농부의 가정에서 태어나 전족을 하지 못했던 관계로[가난한 집 여인들은 일을 해야 하기에 전족을 하지 않는다]발이 컸다.
그런데 주원장이 황제로 된 다음 어느해 정월 대보름에 남경의 한 사람이 발이 큰 여인이 수박을 안고 있는 그림을 그려 남경성이 들썩했다.마침 보름 놀이를 갔던 주원장은 이를 보고그 뜻을 단번에 알아냈다.
전족신모양으로 만든 바느실쌈지그림의 뜻은[회서의 여인들은 발도 크다]는 뜻으로마황후를 빗대고 하는 말이었다.누가 그런 그림을 그렸는 지 알 수 없었던 주원장은 그 거리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도록 명령했다.
청나라 건륭황제는전족을 하는 습관이 만주족들에게도 퍼지게 될까 염려하여 전족을 폐지했으나 중국의 여인들은 전족을 고집스레도 했다.
후에 서태후가 다시 전족금지령을 내려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신해혁명 후에 부녀해방운동이 일어 나면서 남녀평등을 주장한 여성들의 힘으로전족은 차츰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으며 중화인민 공화국이 성립된 뒤에는 전족이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왜 전족을 하게 되었는지는지금까지 누구도 확답을 내지 못했다.그러나 중국인들은 발에 특별한 취미를 보이고 있는 듯 하다 민간에는 여자가 남자의 발을 밟거나 남자가 여성의 발을 건드리면상대에게 반했음을 말한다는 습속이 있으며 여성들은 쉽게 남자들이 보는데서 발을 내놓지 않는다.
전족에 대해 민간에서는옛날 남자들이 장가를 들기 어려웠던 관계로 아내가 도망갈까 염려하여,또는 부자집 가문에서 딸이 가출을 하여 집안 망신을 시킬까 염려하여여자들이 빨리 걷거나 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전족을 하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그런 전족이 생활형편이 괜찮은 집의여성들 가운데서 더 유행되어 전족을 하지 않은 여인들은 질시를 받은 것으로 보아 전족은 꼭 남자들이 여자를 점유하기 위해서라고 보기도어려운 상황이다.
3∼6세에 가로 10cm, 세로 2∼2.5m의 헝겊을 발에 동여매고 엄지발가락 이외의 발가락을 발바닥 방향으로 접어넣듯 묶어 조그만 신에 고정시킨다. 발뒤꿈치에서 발끝까지 약 10cm가 이상적이라고 하며, 모양에 따라 춘순(春), 금련(金蓮)이라고도 한다. 음력 8월 24일(小脚姑娘의 탄생일)에 시작하는데 지방에 따라 다르다.발은 자라지 못하고 고통도 심하여 바로서기·걷기 등이 모두 불안정하며, 발끝으로 서서 걷는 모양이 되고, 자세도 허리 부분이 튀어나와 팔자걸음을 걷는다. 전족의 풍습이 생긴 이유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당나라 때 서방(西方) 오랑캐 여인의 발끝으로 추는 춤이 유행했는데 이것이 중국 전체에 내재화된 것이라고도 한다.전통적인 남존여비, 남성의 여성 독점욕, 가는 허리와 더불어 전족을 미인의 특질로 한 점 등 여러 가지 논의가 있으나, 남성의 변태적 기호의 대상인 것은 확실하다.
송말(宋末) 장방기(張邦基)의 저서 《묵장만록(墨莊漫錄)》에 전족은 근세에 생겼다고 하지만, 5대(五代)나 북송 무렵에 이미 있었던 것 같다. 주로 허베이[華北]의 한민족(漢民族)의 풍습으로, 특히 산시[山西] 지방의 다퉁[大同] 부근에서 가장 성행했는데, 남쪽 지방에서는 그다지 심한 편은 아니었으나 만주기인(滿洲旗人)도 도조(刀條)라는 일종의 전족을 하였다.
명대(明代)에 특히 성행했으며, 청대에는 만주인에게도 유행할 조짐이 보여 1664년 금지령을 내렸으나 효과는 없었다. 그후 태평천국(太平天國)에서도 금지하였고, 1894년에는 서태후(西太后)가 금지령을 내려 쇠퇴하였으나 '소각(小脚:전족을 한 발)'에 비해 '대각(大脚:전족을 하지 않은 발)'은 천시되었다. 민국(民國)시대에는 여성운동에 의해 전족 해방이 제창되어 현재는 거의 소멸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