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로마서 8:9-16
제목: 그리스도의 사람(롬8:9)에게 나타나는 열매들
● 기독교는 구원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 주님의 풍성한 은혜 안에서 누구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는 줄로 믿는 신앙입니다.
| 엡2: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공동: 사람의 공로)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
우리가 은혜에 의하여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귀한 구원을 결코 싼값으로 엄벙덤벙 그냥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성도들이 스스로 자신의 믿음과 인생을 철저히 점검하여 명확한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롬8:16, 공동: 우리의 마음속에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 고후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현: 시험에 불합격한 사람)니라 |
구원의 확신은 이단들만이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단과 반대편에 서있는 성경과 웨민 등 개혁주의 신앙고백이 더욱 강조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4장(구원 신앙) 3항.》 이 믿음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어서 약한 경우도 있고, 강한 경우도 있으며, 자주 그리고 여러 모양으로 공격을 당하여 약해질 수 있으나(히5:13,14; 롬4:19,20; 말6:30; 8:10) 결국 승리를 얻는다(but gets the victory, 눅22:31,32; 엡6:16; 요일5:4,5). 그리고 여러 모양으로 자라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한 확신(a full assurance)에 이르게 되는데(히6:11,12; 10:22; 골2:2),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한 온전케 하시는 분(finisher of our faith)이시기 때문이다(히12:2). |
특정인이 구원받은 사실은 오직 하나님과 본인만 알 수 있고, 제3자는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지역의 유형적 교회는 특정인의 주관적 신앙고백이 진실한 것인지 하나님만큼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러므로 고후13:5의 말씀처럼, 각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구원과 믿음을 정직하게 점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만약 영혼에 티끌만큼의 의심이나 두려움이 남아있다면, 이제라도 제대로 된 참 믿음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 개인의 구원자로 온전히 영접하고 회심(회개+믿음)하여 확고한 확신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여러 모양으로 자라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한 확신에 이릅니다.
● 이처럼 정상적인 믿음을 가진 참된 신자들에게서는 다음과 같은 구원 신앙의 열매들이 대강 나타나게 됩니다. 첫째로, 구원받은 자의 심령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행복이 있습니다(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의 복).
| 롬4:7.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
세상에서 극악무도한 범죄를 자행하고 사형 판결을 받고 날마다 무거운 처형의 공포에 떨던 죄수가 어느 날 국가로부터 조건 없는 사면을 받는다면, 그의 심령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기쁨과 감격이 밀려올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자의 심령에는 지금 자신이 처한 외적인 상황과 환경의 좋고 나쁨을 막론하고, 그 처한 현실과 무관하게 솟아나는 궁극적인 행복이 깊이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삶의 어떠한 순간에도 교만과 좌절을 모두 능히 극복해내는 거룩한 용기가 삶 속에 나타나게 됩니다. 둘째로,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NASB: justified by faith)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현대인의성경: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
‘이신칭의’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림으로 나타납니다.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과 온전히 화목하게 되고 의롭다 하심의 최종적 법정 선언을 받은 자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 죽음이 전혀 두렵지 않게 됩니다. 현재 자신이 땅 위에서 행하던 일이나 과업에 대한 인간적인 미련이 조금은 남아있을 수는 있어도, 죽는 것 그 자체에 대한 영혼의 공포나 두려움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형식적인 종교인이 구원받은 참 신자의 신실한 외형을 흉내 내며 겉으로 거룩한 척을 하고 입술로 찬송가를 뜨겁게 불러도, 자기 내면의 양심까지는 결코 속일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 스스로에게 자문하고 인생을 엄격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당장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당당히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온전히 즐거워합니다.
| 롬5: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새:하나님을 자랑합니다) |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난 육신의 부모 중에는 간혹 성격파탄자나 자식을 모질게 학대하는 비정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나, 하나님은 참 좋으신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의 친자식은 아버지를 공포스럽게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아버지의 품 안에서 즐거워하는 자입니다.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무섭게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아들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바’(아빠)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즐거워합니다.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현대: 성령님을 통해)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갈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현대인의성경: 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
기독교 영화 ‘쿼바디스’는 이 거룩하고 위대한 즐거움을 모진 순교를 당하는 성도들의 죽은 후 모습, 곧 기쁘고 한없이 평안해 보이는 얼굴 표정으로 아주 깊이 있게 묘사한 것 같습니다. 원래 소설이었고 영화화를 했기 때문에 문학적∙낭만적 표현을 한 측면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사랑과 분리되지 않는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극악의 공포인 사망도 그 사랑을 끊지 못합니다.
| 롬8: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
넷째로, 구원을 받은 자는 회심 이전 과거의 죄악 된 삶을 진심으로 부끄러워하고, 칭의의 결과와 열매인 성화를 삶으로 보여주고 살아 나아갑니다.
| 롬6:20.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21.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그러한 생활의 마지막은 죽음)임이라 |
명목상의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의에 대하려 자유로운 것은 여전히 죄의 종 된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주 예수님의 백성이 아닌 것입니다.
|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NASB: His people)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
하나님의 은혜로 진정으로 거듭난 자는 구원받기 이전의 옛 삶, 과거에 하던 일, 자주 다니던 곳 중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죄악된 것들 일체를 매우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삶 속에서 온전히 끊어버리고자 눈물과 회개로 분투합니다. 교인들 앞에서 그럴싸한 신앙 간증을 늘어놓았으면서도 이전의 죄악 된 생활이나 방탕한 행동들을 마치 대단한 무용담처럼 자랑하듯 늘어놓는 것은 진정으로 거듭난 자의 언행이 결코 아닐 겁니다.
● 결론적으로, 진정한 구원의 확신은 남이나 교회가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며, 오직 본인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스스로를 정직하게 시험하고 날마다 점검하여 삶으로 확증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구원을 받은 자다운 성화의 모습과 열매들이 우리들의 심령과 삶 속에 늘 풍성하게 나타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미진함과 껄끄러운 부족함이 느껴지시면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성령의 인도하심(롬8:26)을 받으면 됩니다.
첫댓글 의미 있는 호국 보훈의 달 주말, 기쁜 주일 되세요!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이 포스팅의 묵상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아래의 댓글과 주석은 시간이 많은 분들께 다양한 이해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믿음으로 차 있을 때에만 우리의 입이 열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시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해 주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바로 기도할 수 없으며 그와 같은 믿음은 헛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
<호크마 주석: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 성도는 누구나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다(고전 3:16;고후 6:16). 여기서 바울은 그동안(4-8절) 육신의 영을 대립시킨 목적을 밝히고 있다.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자는 육신에 속하지 않는 자라고 바울은 선언하고 있다. 즉 성도가 비록 선을 행하기를 원할지라도 그것이 뜻대로 되지는 않지만, 성도로서의 신분을 자신있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육신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심으로써 '영에 속한 자'의 신분을 얻게 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본절에는 성령에 대한 바울의 견해가 매우 잘 나타나 있다. 즉 '성령='하나님의 영'='그리스도의 영'과 같은 등식이 보여 주듯이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이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Teh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는 '성령은 영원히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신다'(the Holy Ghost eter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성령은 성도 가운데 거하시면서 성도의 영과 더불어 활동하신다(16절). 한편 성도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에 의해서 뿐이다. 성령께서 오심으로써 성도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믿게 하시며 또한 그는 성도안에 계시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쳐 주신다. 따라서 성령이 거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이기에 그리스도께서 거하는 자이고(10a절)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8:10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
예수께서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고 말씀하시고 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 17:3)고 가르치심으로써 사람이 믿음으로 '영생'을 이 땅에서부터 소유하게 됨을 가르치셨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울도 이신 칭의(以信 稱義)를 근거로 성도의 영이 살아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5:18;6:11). 그러므로 성도는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자다. 몸은 죄의 도구가 된 육신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으나 영은 이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로 인해 살았다. 여기서 '살아 있다'는 의미는 1절의 '정죄함이 없나니'란 말씀과 2절의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 즉 성도가 여전히 정죄받는 신분이라면 아직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지 않았으므로 살았다는 신분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정좌함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 사람인 '영'은 죄의 포로가 된 육신과 심각한 갈등 관계에 있을지라도,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주신 의로 인해
살아 있는 존재이다.
=====8:11
예수를 죽은 자...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본절은 10절의 선포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이다. 그 설명을 요약하면 성령이 내주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성령에 의해 예수를 사망 권세로부터 살리심같이 다시 일으킴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바울은 단순히 영이 살아나는 것만을 진술하지 않고 성도의 '죽을 몸'이 다시 산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10절에서 바울은 '몸은 죄를 인하여 죽은 것이나'라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절에서는 죽을 몸이 산다고 진술하고 있다. 형식상으로 볼 때 그 두 진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나 내용면에서 그 두 진술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즉 몸은 죄로 인해 죽는다. 그렇지만 영은 의로 인해 살았다. 이와 같이 죽을 몸도 영이 성령에 의해 살게 된 것처럼 다시 살게 된다.
=====8:12
그러므로 - 이 접속사는 1절에서 11절까지의 진술을 다시 실제의 삶에 적용하는 주제로 전환시키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 혹자는 성도가 성령께 빚진 자라고 해석하고 있다(Calvin). 또 다른 학자는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도록 이미 받았고 받고 있으며
장차 받게 될 모든 축복과 비교할 때 성도가 빚진 자라고 설명한다(Hendriksen). 이처럼 '빚진 대상'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이 나오게 된 것은 그 대상을 바울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그런데 본절의 '빚진 자'를 '성령'께 빚진 자로 해석하게 되면 그 의미가 매우 축소된다. 오히려 성도는 구원의 전 과정에 있어서 성삼위 하나님께 빚진 자다. 특히 1:14에서 바울은 자신을 복음에 대하여 빚진 자라고 하였는데 이는 성삼위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의 은혜에 대하여 빚진 자라는 의미를 강하게 시사한 것이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 본 구절은 '빚진 자'로서의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한 제안이다. 그리고 이 제안은 13절과 14절에 의해 더 보충되고 있다. 본 구절만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바울의 이 제안은 다시 7장과 같은 갈등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왜냐하면 7:24의 절규는 성도가 육신대로 살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7:24과 같은 비참한 경험 후에 성도가 자포 자기하여 영적인 것을 추구하기를 그만두는 것과 관련된다.
성도는 현실 삶에서 죄와의 투쟁 가운데 절망을 겪지만 이미 그리스도께서 그 절망을 극복하셨으므로 그에 의해서 극복된 축복을 소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성도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보장된 승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고 그토록 심각한 좌절감이 찾아올 때에 예수 믿기를 포기하면, 이것은 곧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사는 삶이 되는 것이다.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9절). 그러나 아직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면서 사는 존재이다(23절). 이 사실을 모르고 절망 가운데서 고민하다가 육신에게 져서 성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하여 믿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은 영원히 사망의 종노릇을 하겠다는 것이다. 지금 바울은 구원을 성도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로 성취하려는 것을 경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원리를 가르칠 준비를 하고 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 최후 승리는 성도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얻게 해주시는 것이다.
엡 6:10-19에서 바울은 성도가 대적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나열했는데, 그 중에 인간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것뿐이다. 만일 이러한 바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본절을 인간의 노력과 연관지어 이해하면 쉽게 새로운 율법주의로 빠지게 된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뿐 아니라 교회사 전체에 있어서도 성령의 역사는 성도의 어떤 노력이나 의지 여하에 따라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에 따라 나타났다. 그러므로 본절은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 때에 당연히 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란 말씀을 인간의 노력과 행위의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7:24과 같은 비참한 상태에 빠져 몸부림치게 될 것이다.
=====8:14
하나님의 영으로...하나님의 아들이라 -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이기에 당연히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사랑'(9절)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께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가르치셨다
성도는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 '무서워하는 종의 영'과 비슷한 의미로 딤후 1:7에서는 '두려워하는 마음'(* , 프뉴마 데일리아스)이 언급되고 있다. 성도를 두렵게 하며 속박하는 것은 율법이다. 성도는 율법에서 해방됨과 동시에 율법이 주는 두려움과 속박(bondage)에서 벗어났다. 결국 성도는 율법을 통해서 성도를 정죄하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신분이므로 결코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는 것이다.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보다 왕과 백성의 관계로 더 많이 이해되었다. 비록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언급되었을지라도 신약 시대처럼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지는 않는다(J. Jeremias). 양자(養子)의 원리는 바울 신학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그 근원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발견된다(마 6:9;막 14:36). 그리고 바울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라고 가르친다. 성령께서 성도 가운데 거하심으로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증으로 인쳐 주시는 것이다.
아바 아버지 - 예레미아스(J. Jeremias)는 '아멘 아멘...'의 형식과 함께 '아바 아버지'란 용어가 '예수의 고유한 언어 구사 방법'(ipsissima vox Jesu)이라고 주장한다(요 20:11-29 주제 강해 '예수의 언어 사용에 나타난 자기 계시' 참조). 오직 예수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바 아버지'란 용어를 즐겨 사용했는데, 이는 (1)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철저한 복종과 긴밀한 관계, (2) 아들로서의 권위를 나타낸다. 예수는 이와 같은 용어를 제자들에게도 가르치셨는데(마 6:9), 이 용어는 신약 시대의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잘 대변해 준다. '아바'는 어린아이의 언어에서 유래되었다. 탈무드(Talmud)에 언급된 "어린이가 젖을 떼면서 밀맛을 볼 때에 '아바'(* )와 '임마'(* ) 곧 '아빠'와 '엄마'란 말을 배우게 된다"란 구절이 그 사실을 잘 암시한다. 그리고 탈굼역(The Targum)도 사 8:4을 "어린이가 '아바'와 '임마'라고 부르기를 배우기 전에"로 번역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아바'는 매우 친밀한 언어로 하나님을 경외할 분으로만 알았던 유대인들은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바'로 부를 수 없었으며 기도 형식의 문헌에조차 결코 사용된 적이 없다(J. Jeremias). 그러나 신약의 성도는 양자의 영에 의해서 하나님과 부자(父子)관계 속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아바'란 말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8:16
성령이 친히...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 본절은 성도가 '양자의 영'을 받은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분을 증명해 주고 있다. 즉 성도는 양자의 영을 받았을 뿐 아니라 양자의 영이신 성령으로부터 친히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증거받는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 "우리의 마음이 믿음으로 차 있을 때에만 우리의 입이 열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시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해 주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바로 기도할 수 없으며 그와 같은 믿음은 헛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풍성한 설명에 공감합니다.
<호크마 주석: 에베소서>
=======2:8
개역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본절이 앞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하신 은혜를 다시 한번 강조함을 시사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 본절은 5절에서 언급한 것을 반복한 것이지만 5절과 두 가지 차이점을 갖는다. (1) 5절의 은혜에는 관사가 없으나 본절에서는 관사 '테'(* )가 있다. 이것은 앞절에서(7절) 언급한 '은혜'와 동일한 것임을 시사한다(Lincoln). (2) 5절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가 없으나 본절에서는 나타난다. '믿음'은 스스로 자신을 의롭게 하려는 행위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대하는 것으로 구원이 인간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다(Wood, Bruce, Foulkes, Lincoln).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구속의 은총(恩寵)을 받아들이고 응답함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이것'이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이것이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Bengel,Beza, Hodge, Chird, Westcott). (2) 혹자는 구원의 과정 전체라고 주장한다(Lincoln,Wood, Abbott, Gnilka, Schlier, Mitton).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이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토'(* )는 중성으로 믿음의 성(性)인 여성과 맞지 않으며, 문맥상 본절의 내용이 믿음에 대한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Bruce,Foulkes).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크 엑스 에르곤'(* )에서 '엑스'는 기원이나 원인 혹은 근거를 나타내는 것으로 구원이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롬 3:20, 28;4:1-5; 갈 2:16; 딛 3:5). 바울은 이 행위를 율법과 관련시켜서 언급하지 않는다. 본절의 행위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행하는 인간의 윤리적인 노력을 의미한다(Wood, Lincoln).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인간은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자랑할 수 없다(롬3:27;4:2).
아멘!
<박윤선 주석: 고리도후서>
너희가 구원받았음을 확신하라(13:5~7)
고린도 살마들은 바울을 시험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그들이 반성해야 할 때였다. 헬라의 철학자 소크레테스는 “반성하지 않은 인생은 살 가치가 없는 인생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경험은 시험을 견디어 낼 것이다. 바울은 “너희가 참으로 믿음에 거하는가?” “너희는 진실로 구원을 받았는가?”라고 묻는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 확증해야 하며, 아무도 다른 살마에 대해 “너는 거듭낫다”리고 말해 줄 수가 없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그리tm도를 소유하고 있다. “버리운다”는 뜻은 가짜 그리스도인이란 뜻이며, 문자 그대로는 “시험을 통과하지 않은”이란 뜻이다. 바울의 원수들은 그가 버리운 자(가짜 사도)라고 고발을 하였는데, 6절에서 바울은 이를 부정하고 있다. 그는 악한 생활과 악한 말에서 돌아서라고 간청하는데, 이는 자신이 참된 사도임을 입증하려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회개한다면 징계의 방법으로 그들을 찾아가 그의 사도권을 입증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이 특권을 기꺼이 제쳐 두려고 했을 것이다. 바울은 그들을 죄 중에서 행하게 하여 사도의 권한을 행사할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것보다는 명성을 잃더라도 그들이 영적으로 도움을 얻게 되는 것을 보는 편을 택하였다.
베드로는 목회자들에게 교회에 대하여 주인 행세를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데 (벧전 5:1이하), 바울도 여기서 똑같은 정신을 표명하고 있다. 징계를 하는 목적은 결코 목회자를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법법자를 회개하는 자리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다.
오늘날과 같이 가짜가 많은 시대에 신앙을 고백한 신자들은 그들이 구워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일이 중요하다. 마태복음 7장 15~29절에 나오는 경고들과, 고린도후서 11장 13~15절의 놀랄 만한 진리들을 기억하라.
<호크마 주석: 로마서>
=====4:7
그 불법...복이 있고 - '불법'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하이 아노미아이'( )이다. 이 말은 '율법'( , 노모스)이란 말에 부정 접두어 '아' ( )가 첨가되어 이루어진 파생어이다. 포괄적으로는 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나 보다 정확하게는 '율법을 어긴 행위'를 가리킨다. 그리고 '율법을 어긴 행위'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죄로 규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에서 '불법'과 '죄'는 동의어의 반복으로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하심을 받고'( , 아페데산)라는 동사와 '가리우심을 받고'( , 에페칼뤼프데산)라는 동사 역시도 동의어의 반복이다. 일반적으로 히브리 시문학에서는 평행 대구법(parallelism)을 사용하여 앞절과 뒷절이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뜻을 강조하고 그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구체화시키곤 하였다(시 6:1). 한편 '아페데산'과 '에페갈뤼프데산'은 둘다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사역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축복의 상태를 나타낸다.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거나 가리움 받는 것은 이미 과거에 성취되었으므로 그에게 남은 것을 성취된 구원 속에서
누려야 할 축복 외에 아무것도 없다.
=====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 - 본절은 7절의 중복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사유(私有)하시는 은혜를 보다 강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앞절에서는 '불법이 사함을 받는 것', '죄가 가리움을 받는 것' 정도로 언급했으나,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규정되는 '죄'조차 없는 것으로 인정한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바울이 이신 칭의에 대해 설명할 때에 본 구절은 결정적인 논리의 뒷받침이 되고 있다.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그 사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할 때 논리상 믿음이 의로 여겨지는 중간 과정이 생략되었다. 그 논리의 틈을 본절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이 의로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실제로 그 사람이 행한 죄악이 어떻게 여겨지게 되는 가에 대해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7절과 본절의 인용 구절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호크마 주석: 로마서>
5:1
그러므로 - 이는 1장에서부터 4장, 특히 3:21부터 4:25까지의 내용에 대한 결론이요 그 적용이 새롭게 전개되기 시작함을 시사한다.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또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구속된 자에게도 그 칭의의 혜택이 전가됨을 말하였다. 이제 5장에 들어가면서 '그러므로'( , 운)라고 말하는 것은 이신 칭의에 대한 결론뿐만 아니라 그 적용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됨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칭의의 열매들을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여기서 우리는 칭의의 결과에 대한 바울의 진술에 대하여 살펴보기에 앞서 '믿음' 자체에 대한 성격 규정이 필요하다. '믿음'에 대한 견해에 따라서 본서의 나머지 부분이 어떻게 해석되는지가 판가름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선물이므로 칭의의 조건이 될 수 없고 다만 율법과 대치되는 개념으로만 생각되는 경향이 있다(Deissmann, Michaelis). 이는 믿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의 행위가 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취해진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믿음이 순종과 동일시되며(히 3:18, 19), 본절에서처럼 '믿음으로'( , 에크 피스테오스)라는 말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디카이오덴테스)이라는 동사의 조건이 되는 구절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다(3:22, 30;갈 2:16;3:14;빌 3:9). 이와 관련하여 불트만(R. Bultmann)은 "공적에 대한 철저한 포기로서,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구원의 길에 공손하게 굴복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믿음'( , 피스티스)은 옛 '자아' 대신 새로운 '자아'가 형성되는 순종의 자유로운 행위"라고 역설하였다(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여기서 불트만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결단에 의해서 즉 '아래서 위로' 행하는 행위임을 설파하였다. 이러한 불트만의 주장에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보수주의의 견해(Machen)를 부정하면서 '믿음'이라는 단어가 바울에게서 애매하게 사용된 것을 수정해 보려고 하는 시도가 엿보인다. 그렇지만 '믿음' 자체가 우리의 의지로 가능한 것인가 ?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믿는 그 '믿음'이
우리의 의지로 가능한 것인가 ?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믿는 그 '믿음'이 우리의 의지로 가능하다면, 합리적인 인간은 무엇을 근거로 불가능한 것을 믿는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는가 ? 불트만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믿음'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순종'이 '믿음'과 동일시되는 것은 '믿음'이라는 심적(心的) 요소가 외부적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이라는 것으로 구체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은 심적 요소로서 이 역시 하나님의 은사(恩賜)가 아니고는 믿음을 지니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응답할 수 있게끔 인간의 심성으로 하여금 '믿음'을 향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이 없이는 인간은 '믿음'을 갖을 수가 없다. 따라서 '믿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된 인간과 의로우신 하나님 간에 평화의 관계를 맺게 해주는 주체이시다. 여기서 바울이 '화평'( , 에이레네)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죄인 된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으나(1:18;2: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노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또한 이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칭의를 얻게 된 결과를 설명하기 위하여 채택되었다. 그런데 혹자는 본절의 '화평'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흐르는 평안 상태를 가리킨다고 본다(Shedd). 그러나 본절의 문맥을 고려할 때 그리고 기타 바울 서신에 나타난 '화평'이란 단어의 사용을 감안할 때 그와 같은 주장은 지지를 얻지 못한다. 즉 본절의 '화평' 앞에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라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한 언급이 나오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한 언급이 나오므로,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사랑하는 호의적 관계로 진전되었다는 맥락에서 화평이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골 1:20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는 사실이 강조되었고 엡 2:14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의 화평이 되신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으므로, '화평'이란 단어는 진노 아래 있던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다는 견지에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화평'은 인간 내부의 인격적 변화를 말하기보다는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이 회복의 관계로 진전된 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과의 우호적 관계라는 사실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샘물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하나님의 평화를 내적으로 누리게 된다.
<호크마 주석: 로마서>
5:11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화목을 얻게 하신'이란 표현은 지금까지 바울 자신이 설명했던 '칭의', '진노하심에서의 구원', 그리고 '구원'을 포함하는 의미로 해석해도 별 무리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 여기서의 '즐거워하다'( , 카우코메노이)란 말은 2, 3절에서 언급된 동사인 '카우코메다'( )의 분사형에 대한 해석이다. 본절에서도 이 동사는 '자랑하면서 즐거워하다'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exalt, MB). 그러면 본절에서 의미하는 '즐거움'은 구체적으로 어떤 즐거움인가 ? 이에 대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구속(救贖)의 은혜를 입은 자들의 즐거움이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으며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로, 영원한 소망을 바라는 즐거움이다. 바울은 2절에서 이 즐거움을 언급했으며 본서의 다른 구절과
고린도후서에서도 수차례 언급하고 있다. 8:18에서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하였고 8:24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하였으며, 고후 5;1에서는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하였다. 셋째는, 참된 즐거움이다. 현재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은 일시적이요 가변적이며 또한 거짓되고 기만적이나 그 근원과 이유를 하나님께 둔 즐거움은 영원한 즐거움이요 보증이 있는 즐거움이기에 참되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요 축복 그 자체이시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라고 하였다.
<호크마 주석: 갈라디아서>
=====4:6
아들의 영 -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들의 영'이 증거하기 때문이다. '아들의 영'은 '하나님의 영'(롬 8:14) 또는 '그리스도의 영'(롬 8:9)으로서 '성령'을 가리킨다. 성령은 약속대로 오순절 다락방에 강림하신 이후에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양자됨'을 증거한다.
아바 아버지 -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으며,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출 4:22; 사 63:16; 렘 3:19). 그러나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 중에 실제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우리 아버지'라고 불렀을때 불경하다고 말한 것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성령의 내주(內主)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졌고 그 새로워진 관계를 '아바'라고 표현했다(Longenecker). '아바'는 아람어로서 '아버지'를 뜻하며 탈무드에서는 아기가 태어나서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Jeremias). 이는 어린아이가 '아빠'라고 하는 것처럼 아버지를 더욱 친근하게
부르는 표현이다. 바울은 이말을 사용하여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주 가까운 것임을 증거한다.
<호크마 주석: 로마서>
=====8:38
바울은 본절과 39절 상반절에서 어떤 피조물도 그리고 어떠한 상황과 여건도 성도의 압도적인 승리를 방해할 수 없음을 진술하고 있다.
권세자들(* , 아르카이) - 이는 본래 바울 신학에서 천사의 한 부류에 속하지만(엡 1:21) 주로 사단의 세력하에서 활동하는 악한 영들을 지칭한다(엡 2:2;6:12). 그리고 특히 바울은 본절에서 '사망'과 '생명', '현재 일'과 '장래 일'과 같이 서로 대조되는 어법을 구사하고 있으므로 본절의 '권세자들'은 하나님의 부리시는 영인 천사와 대조되는 영, 곧 사단에 의해 조종되는 악한 영들을 의미한다.
능력(* , 뒤나메이스) - 이 단어에 대해 혹자는 '폭풍, 천둥과 번개, 그리고 지진과 같은 자연의 힘'으로 해석한다(Lenski). 혹자는 '능력'이 '천사들'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Calvin). 아무튼 본절에서 '능력'이 '천사'를 지칭하든지 '악의 세력'을 지칭하든지 '신적(神的)인 세력'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8:39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 앞에 언급된 아홉 가지 모두 '피조물'이라는 표현 속에 포함된다.
피조물 중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 구별할 것 없이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된 모든 피조물을 언급하기 위해 바울은 아홉 가지의 단어를 나열했던 것이다.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 본 구절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35a절)라는 질문에 대한 결론적인 대답이다. 그리고 이 대답은 37절의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진술에 따라 나오게 되는 필연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사랑은 성도의 견인(堅忍)뿐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근원이다. 성도는 7:24과 같은 비참한 상황에 처했을 때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신을 해방시켰다는 사실과(2절) 함께 성도를 향하신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호크마 주석: 로마서>
=====6: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 이 표현은 19절의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는 사람이 인간적인 선행을 행할 때도 있으나 그 사람이 인간적인 선행을 행할 때도 있으나 그 사람의 신분은 '죄의 종'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聯合)하여 자기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사람은 '죄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그 의를 행해야 할 의무도 책임도 없었다. 비록 자연인은 본성이 율법의 행위를 할 수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2:14, 15). 그래서 칼빈(Calvin)은 "육체의 자유는 단지 하나님을 순종하는 데서 우리를 자유케 하여 마귀에게 얽매이게 할 뿐이다"라고 진술했던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 6:24)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교훈과도 일맥 상통한다.
첫번째 문단에 대하여: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아닌, 오직 주님의 풍성한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받는 값없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고백하며 그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값없이 주신 고귀한 구원의 은혜를 결코 값싸게 여기지 않고,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하신 말씀처럼 날마다 나의 믿음과 심령을 정직하게 돌아보며 말씀 앞에 바로 서기를 원합니다.
구원의 확신은 이단의 전유물이 아니라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강조하는 개혁주의 신앙의 핵심임을 기억하며,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의 뿌리를 내리기를 소망합니다.
때로 우리의 믿음이 여러 공격을 받아 약해질지라도, 믿음의 창시자요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결국 승리를 얻고 온전한 확신에 이르게 하실 주님의 신실하심을 온전히 신뢰합니다.
내 영혼의 작은 의심과 두려움까지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온전히 영접하고 회심함으로써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확고한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복된 삶이 되기를 결단합니다.
두번째 문단에 대하여:
죄악의 공포에서 조건 없이 사면받아 환경과 상황을 초월하는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삶의 어떠한 순간에도 교만과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거룩한 용기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신칭의' 은혜로 하나님과 온전한 화평을 누리게 되었기에, 죽음의 공포마저 완전히 사라진 참된 평안을 소유하게 하심을 찬양합니다.
나의 내면과 양심을 속이지 않고 날마다 주님 앞에 바로 서며, "지금 당장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확신으로 답할 수 있는 깨어 있는 신앙이 되기를 원합니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 아닌 양자의 영을 받았기에, 참 좋으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친근히 부르며 그 품 안에서 온전히 즐거워하고 자랑하는 친자녀의 특권을 누리게 하소서.
사망이나 생명,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다는 선언이 오늘을 살아가는 최고의 위로와 힘이 됩니다.
죄의 종 노릇 하던 과거의 옛 삶과 방탕함을 무용담처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던 모든 것들을 진심으로 부끄러워하며 끊어내는 정직한 회개가 삶에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값없는 은혜로 구원받은 주님의 백성답게 말로만 거룩을 흉내 내지 않고,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거듭난 자의 증거인 성화의 아름다운 열매를 온전히 맺어 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진정한 구원의 확신은 타인이나 교회가 대신할 수 없기에,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 앞에 나 자신을 정직하게 비추어 보며 삶의 풍성한 성화의 열매로 내 믿음을 증명해 나아가기를 결단합니다.
혹여나 내면의 연약함과 영적인 부족함이 느껴질 때마다 낙심하지 않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여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 신실한 주의 백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강조하고 있는 곳이 성경(롬 8:16, 고후 13:5)이고 웨민, 개혁주의 신앙고백이라는 설명이 잘 와닿습니다. 구원파에서는 성경의 강조점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왜곡 변형시켜서 전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게 된 거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구원의 확신을 당연히 가지고 있고, 만약에 없다면 있는 것처럼 해서 적당히 넘어갈 게 아니라 철저히 자신을 성경에 비추어 시험하고 검증해봐야 한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구원 받은 자의 네 가지 열매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는데요. 첫째, 죄가 가리어진 자의 행복, 기쁨이 있다. 둘째, 하나님과 진정한 화평을 누린다. 셋째, 하나님을 온전히 즐거워한다. 넷째, 회심 이전의 죄악된 삶을 부끄러워하고 성화된 삶을 살아간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들이라도 다시 한 번 각자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가짜가 많아지고 신실한 자들이 귀해지는 요즘에 분별을 주는 유익한 말씀입니다. 감사합니다.
와! 핵심 포인트의 정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