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길을 걷는다. 손에 닿는 돌의 질감이 갯바위의 조가비처럼 우돌우돌 살아 움직인다. 작은 키로 발돋움하면 소롯한 안채의 마루가 보이고 옥수수며 수수를 묶어둔 정겨운 풍경들이 가지런하다. 짚풀들을 엮어 가마니를 짜고 있는 노인의 집을 넘겨다본다. 마른 짚풀의 냄새가 친근하게 다가오니 마음은 벌써 어린 날의 골목길을 내닫는다.
유년의 골목길은 아이의 모습을 닮았다. 막자란 풀이며 질서도 없이 삐죽이 심어진 꽃들이 각자의 천성대로 피었다. 길바닥 넓적 돌 틈을 비집고 오른 질경이 풀이 꽃을 피우고 감나무 잎들은 파란 하늘 아래 보석처럼 빛났다. 담장 위로 애호박 한 덩이가 아직 푸른 기를 발할 때면 풋콩 같은 아이들의 웃음이 골목 안을 떼구루 굴렀다.
낙안읍성을 돌며 마을의 담 들을 보며 골목길에 대해 생각해 본다. 성이란 것은 지역방어의 테두리요 담장은 한 가정의 테두리다. 한집 한 집의 소유를 나타내는 담이 연결되어 골목을 이룬다. 골목길은 담의 연결인 것이다. 살짝 여민 담은 사생활을 보호해 주지만 살풋 발돋움을 하면 안채 마당이 설핏 보인다. 이렇듯 닫혀 있으면서 열려있고, 열려있으면서 닫혀 있는 무심한 듯 보이는 담은 오래된 친구를 닮았다.
큰길은 교통의 소통이나 물자의 수송을 위하여 마련하지만, 골목길은 내 땅을 알리는 경계로부터 출발하므로 반듯하지 않고 구불구불하다. 조금 더 나올 수도 있고 들어갈 수도 있으며 막다른 곳에, 위치할 수도 있다. 소유의 경계를 알리는 담장은 또는 안도감을 때로는 고립감을 함께 나타낸다.
골목길은 주인이 따로 없는 땅이다. 경계의 여분인 골목길은 그래서 늘 열려있다. 가난한 자에게도 가진 자에게도 평등한 길이다. 마음이 추운 사람도 몸이 더운 사람도 골목 어귀에 서 있는 나무 아래서 쉬어간다. 아이들이 팔랑개비를 돌리며 뛰노는 곳도 골목길이다. 무엇보다 오가는 사람들이 있어 심심하지 않다. 골목 어귀 나무 그늘 밑에는 외로운 노인들이 나와 앉아 나물을 다듬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 본다. 상인들은 잠시 물건들을 쌓아두는 임시 창고로 쓰기도 한다. 골목 초입은 누구나가 다니며 누구라도 눈에 띄는 길이기에 너저분할 수도 있지만 질박한 얘기들이 끊이지 않는다.
내가 일하는 사무실 앞에도 골목이 보여 무심결에 눈길을 주게 된다. 도심의 골목 두 번째 주택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장성한 아들과 그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의 초등학교 고학년쯤 된 남자아이가 산다. 여자가 보인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어려운 환경을 견디지 못해 어디에 갔다가 온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사무실을 연 첫 계절은 겨울이었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옥상에 오르더니 옷들을 거두어들였다. 며칠 후에는 빨래를 널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익숙한 듯 느릿한 행동이 눈이 보이지가 않는 모양이다. 구부정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골목길에 자전거를 세우고 무얼 가득 싣고 나갈 때도 있고 대야에 옥수수빵을 쪄 가기도 한다. 아마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것 같다. 어느 날 덩치 큰 사내가 병원차에서 내리더니 안 가겠다고 우기는 장성한 아들을 골목으로 끌고 나와 싣고 갔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하루종일 남자가 외쳤던 소리가 들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계절이 바뀌고 여름이 올 때쯤 살이 쪽 빠져버린 남자가 돌아왔다. 그 후 아내로 보이는 젊은 여자도 나타났다. 그 뒤 골목길에는 병원을 가는지 남자를 여자가 부축하고 가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 또 가끔은 어린 아들의 팔을 잡고 바람을 쐬러 나오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야구 모자를 눌러 쓰고 지팡이를 짚고 한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혼자 걷기도 한다. 그는 골목길 끝까지 손길을 떼지 않는다. 홀로서기를 하려는 건지, 어디를 가던 집 담장의 시멘트벽의, 촉감을 잊지 않았다가 반드시 찾아오리라는 다짐이라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느 날에는 또 다른 칠십은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폐지를 줍기 위해 골목을 힘겹게 걷는다. 수레에 쌓인 종이박스가 할머니의 삶처럼 심란하다. 좀 있으니 쉰 살은 되어 보이는 여자가 ‘엄마’ 하고 슈퍼에서 달려 나온다. 얼핏 보기에도 좀은 부족해 보이는 생김새다.
“엄마, 아저씨가 엄마가 날 버리고 도망갔다고 해서 울 뻔했다.”
“슈퍼 아저씨가 그라더냐. 우리 엄마는 도망 안 가요 하지.”
갑자기 가슴에 통증이 인다. 할머니의 삶은 어떤 길이기에 그 연세에 부족한 자식 건사하기가 바쁜지. 자식을 힘닿는 날까지 거둘 수 있어 그래도 행복한지. 온갖 물음이 생긴다. 경기가 어려워 폐지수집도 경쟁이다. 밖에 모아둔 신문 다발이 없어진 후에 오신 할머니는 우리 사무실에서 허탕을 치셨다. 손수레를 무겁게 끌고 막다른 골목길을 느릿느릿 가는 일이 삶의 막다른 모습인가 싶어 눈물겹다.
골목길은 순환하는 인생길을 닮았다. 오밀조밀한 길, 반듯반듯한 길, 구불렁 굽은 길, 왁자지껄 흥청 질펀한 길, 숨이 턱에 차는 오르막길, 끝없이 추락하는 나락의 길, 가슴 쿵 무너지는 막다른 길은 우리네의 삶과 흡사하다. 시련이 있으면 기쁨이 충만한 날도 있는 것처럼 굽어진 골목을 돌지 않고는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목적지가 아닌 길에 들어선 순간에는 가쁜 숨을 내쉬며 잠시 쉬었다 돌아 나올 배짱도 있어야 한다.
창밖에 해무리가 말려든다. 희망처럼 매달리던 아이들의 웃음도 골목길에서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텅 비어버린 골목에는 동그마니 혼자 사는 노인의 뒷모습 같은 적막이 깔린다. 그러고 보니 골목도 나이를, 먹는가보다. 석양 증후군 환자처럼 갑자기 마음이 바쁘다. 곧 어둠이 제자리인 양 골목길을 점령할 텐테 더 늦기 전 난 어디로 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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