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찾아가는 길
조지훈
사슴이랑 이리 함께 산길을 가며
바위 틈에 어리우는 물을 마시면
살아있는 즐거움의 저 언덕에서
아련히 풀피리도 들려오누나.
해바라기 닮아 가는 내 눈동자는
자운 피어나는 청동의 향로
동해 동녘 바다에 해 떠 오는 아침에
북받치는 설움을 하소하리라.
돌뿌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이
아물어 꽃잎에 스치는 날은
푸나무에 열리는 과일을 따며
춤과 노래도 가꾸어 보자.
빛을 찾아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
슬픈 구름 걷어 가는 바람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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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
조지훈
사랑을 위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 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아마곱스런 눈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잊어 달라지만
남자에게 있어 여자란 기쁨이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 그어
혼자라도 외롭지 않은 밤에 울어 보리라
울다가 지쳐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 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그리고 한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마지막 한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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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방(山房)
조지훈
닫힌 사립에
꽃잎이 떨리노니
구름에 싸인 집이
물소리도 스미노라
단비 맞고 난초잎은
새삼 차운데
볕받은 미닫이를
꿀벌이 스쳐간다
바위는 제자리에
움직 않노니
푸른 이끼 입음이
자랑스러라
아스림 흔들리는
소소리 바람
고사리 새순이
도르르 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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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山上)의 노래
조지훈
높으디 높은 산마루
낡은 고목에 못박힌 듯 기대여
내 홀로 긴 밤을
무엇을 간구하며 울어왔는가.
아아 이 아침
시들은 핏줄의 구비구비로
싸늘한 가슴의 한복판까지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이제 눈감아도 오히려
꽃다운 하늘이거니
내 영혼의 촛불로
어둠 속에 나래 떨던 샛별아 숨으라
환히 트이는 이마 우
떠오르는 햇살은
시월 상달의 꿈과 같고나
메마른 입술에 피가 돌아
오래 잊었던 피리의
가락을 더듬노니
새들 즐거이 구름 끝에 노래 부르고
사슴과 토끼는
한 포기 향기로운 싸릿순을 사양하라.
여기 높으디 높은 산마루
맑은 바람 속에 옷자락을 날리며
내 홀로 서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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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문답 山中文答
조지훈
(새벽닭 울 때 들에 나가 일하고
달 비친 개울에 호미 씻고 돌아오는
그 맛을 자네 아능가)
(마당 가 멍석자리 쌉살개오 같이 앉아
저녁을 먹네
아무데나 누워서 드렁드렁 코를 골다가
심심하면 퉁소나 한 가락 부는
그런 멋을 자네가 아능가)
(구름 속에 들어가 아내랑 밭을 매면
늙은 아내도 이뻐 뵈네
비온 뒤 앞개울 고기
아이들 데리고 난는 맛을
자네 태고太古적 살림이라꼬 웃을라능가)
(큰일 한다고 고장 버리고 떠나간 사람
잘 되어 오는 놈 하나 없네
소원이 뭐가 있능고
해매다 해마다 시절이나 틀림없으라고
비는 것뿐이제)
(마음 편케 살 수 있도록
그 사람들 나라일이나 잘 하라꼬 하게
내사 다른 소원 아무것도 없네
자네 이 마음을 아능가)
노인은 눈을 감고 환하게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따뤄 주신다.
(예 이맛을 알 만합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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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중문답이 가슴으로 들어와 앉습니다...
아! 저 막걸리 한 잔 산도 담고, 바람과 구름도 담고, 햇살도 담았네... 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