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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태: 29. 에스더 2. 에4:10-17
"(에 4:10) 에스더가 하닥에게 이르되 너는 모르드개에게 고하기를 (에 4:11) 왕의 신복과 왕의 각 도 백성이 다 알거니와 무론 남녀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아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홀을 내어 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아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일이라 하라 (에 4:12) 그가 에스더의 말로 모르드개에게 고하매 (에 4:13)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에 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에 4:15) 에스더가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회답하되 (에 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 4:17)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의 명한 대로 다 행하니라" (에4:10-17)
성서 속의 여인들(29) - 에스더 2
사람들이 흔히 여자들을 일컬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위대한 사람은 남자이다. 그러나 세계를 움직이는 위대한 남자를 움직이는 더 위대한 사람은 여자라" 고 말입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요 정말 그런 것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를 제패하고 호령하고 통치하는 것은 대부분 남자들이 감당합니다. 그러나 남자들의 정책 결정에 중요한 부분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여자들이 있어서 남자들을 움직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쫓도록 종용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아내 사라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합이라는 왕이 그토록 하나님을 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그 뒤에는 그의 아내인 이세벨이라는 강력한 여인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어떻게 죽었는지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헤롯이 자기 생일날 조카딸이 춤을 추었는데 너무나도 기뻐서 그의 소원을 물으니 뜻밖에도 세례요한의 목을 선물로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감옥에 갇혀있는 세례요한의 목을 선물로 주는데 그 뒤에는 헤로디아라는 여인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여인은 자기의 동생 헤롯빌립의 아내였습니다. 이 세례요한이 헤롯과 헤로디아의 결혼이 잘못된 것이라 지적하니 헤롯이 그를 감옥에 넣었던 것이고 결국 그 여인 헤로디아로 말미암아 세례요한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살펴보면 아하수에로 임금의 정책 결정을 결정적으로 뒤집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에스더라는 여인입니다. 물론 마음을 감동시키고 용기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만 거기에는 에스더라는 여인이 사용되었음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믿음의 사람들 29번째로 에스더라는 여인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지금까지 수요일 저녁에 믿음의 사람들에 대하여 28번을 설교하였지만 성경 속에 나타나는 여인이 설교의 대상이 되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신년 첫 설교에서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할 대상으로 성경 속의 여인을 정해 주신 것은 올해 우리교회에도 에스더처럼 헌신된 믿음의 여인들이 많고 그러므로 여전도회 회원들의 더 뜨거운 정성의 봉사가 필요하기에 주신 기회가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이 에스더의 부모가 누구인지 성경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의 후견인으로 등장하는 사람은 모르드개라는 사람인데 이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사촌오빠임을 발견 할 수가 있습니다. 에2:15절에 보면 모르드개의 삼촌의 이름이 아비하일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아비하일은 바로 에스더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니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사촌형제간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연유인지 모르드개가 사촌동생인 이 에스더를 자가 딸 같이 양육을 하였다고 하니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그런 형제지간인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B.C586년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라는 사람에게 멸망을 당하는데 그때 많은 사람들이 세 차례 정도 나누어져서 포로로 잡혀갔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 번째 포로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비롯하여 많은 귀족들이 잡혀갔고 두 번째는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비롯한 에스겔 등 많은 백성들이 잡혀갔고 그 세 번째가 마지막 임금인 시드기야 임금과 나머지 백성들이 잡혀갔다고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 에스더는 바로 두 번째로 포로로 잡혀간 사람 중에 있었는데 아마도 그가 포로로 잡혀 갈 때 그의 부모는 동행치 않고 아마 사촌오빠인 모르드개가 데리고 떠난 것 같습니다.
에스더라는 이름의 뜻은 히브리식으로는 "아름다운 나무"라는 뜻이고 페르시야식으로는 그 뜻이 별(Star)이라는 뜻입니다. 이 에스더서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바사 즉 페르시야라는 나라에게 다시 멸망을 당합니다. 이때 바사의 왕인 고레스는 포로로 잡혀 온 모든 이방민족들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합니다. 그래서 스룹바벨과 에스라, 학개, 느헤미야 등 많은 지도자들이 대략 한 5만명 정도의 사람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되돌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이곳 저곳으로 흩어지게 된 백성들이 있는데 그 백성들을 우리는 "디아스포라" 즉 "흩어진 백성들이라" 고 부른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억이 나시죠? 그 가운데 일부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도 않고 다른 곳으로 흩어지지도 아니하고 그냥 그곳에서 살아왔는데 그렇게 해서 그곳 바벨론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에스더와 모르드개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그렇게 그곳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때의 임금이 아하수에로 임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새벽기도회 때마다 느헤미야 서를 묵상하고 있습니다만 그 느헤미야를 이스라엘로 되돌려보내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도록 기회를 준 임금이 아닥사스다 임금이라고 합니다. 자료에 의하면 이 아닥사스다 임금은 에스더의 남편인 아하수에로 임금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물론 느헤미야도 스룹바벨이라는 총독이 이스라엘로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한 뒤 80년 뒤에 조국으로 돌아간 사람이니 그 당시에 조국 이스라엘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바벨론 지역에 머물러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더 1장에 보시면 아하수엘로 임금에게는 와스디라는 아름다운 왕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왕비가 임금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기에 왕비의 자리에서 내어 쫓겼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데 성경은 와스디 왕비가 아름다움과 여인으로서 품위를 가진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아하수에로 임금은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즉위 3년째 되던 해에 잔치를 열었는데 무려 180일 동안을 잔치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가 거처하는 수상 궁의 모든 백성들을 위하여 다시 7일간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 와중에 술에 취한 임금이 자신의 왕비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기 위해서 왕비의 면류관을 쓰고서 그 잔치 자리에 나와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름다움을 자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술에 취한 임금은 페르시아의 일반적인 법에 술잔치가 벌어지는 곳에서는 여자가 나타나 흥을 돋울 수가 없다는 법을 무시하고 왕비를 청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와스디라는 왕비는 현숙한 여인으로서 그 왕의 잘못된 요청을 거절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분노를 가진 임금이 왕의 명령 불복종이라는 죄목으로 와스디를 왕후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후에 다시금 왕후를 세우기 위해서 간택을 하는데 그때 이 에스더가 와스디를 대신하여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현숙한 여인인 왕비를 폐위시키시고 이 에스더를 왕비로 세우셨을까? 참으로 궁금한 부분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때에 모든 신하들 보다 으뜸인 자리에 앉은 사람이 아각사람 하만이라고 하였습니다. "아각" 많이 들어 본 이름이 아닙니까? 삼상15:8절에 보시면 이 아각이 아말렉의 왕이라고 기록합니다. 사울왕이 아말렉을 쳐서 진멸 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신이 보기에 좋은 것을 남겨 두었습니다. 사울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찾아간 사무엘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사울왕이 자신이 보기에 좋은 것은 다 남겨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사무엘이 칼을 가지고 아말렉 왕 아각을 찍어 쪼갰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하만이라는 사람이 바로 그 아각의 자손인데 그래서 사람들은 그 후손을 아각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도 웃대 어른 중에 누가 판서나 높은 벼슬을 하면 그 집을 부르길 판서 댁, 또는 대감 댁이라고 불렀지 않습니까? 이 하만도 그렇게 해서 아각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아마도 조상 적부터 그런 골 깊은 감정이 있어서 인지 그가 특별히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서 계획을 꾸미게 된 것입니다. 그 계획이라는 것이 바로 에스더3:8절에 보시면 "한 민족이 왕의 나라 각 도 백성 중에 흩어져 거하는데 그 법률이 만민보다 달라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하오니 용납하는 것이 왕에게 무익하나이다" 라고 거짓으로 왕에게 고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말하기를 내가 금일만 달란트를 왕의 창고에 넣어드리겠습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이 일만 달란트라는 돈은 유다 백성들이 내어야 할 세금의 합계라는 것입니다. 많은 유다인들을 죽임으로 혹시 세금에 착오가 있으면 내가 그 돈을 낼테니까? 백성들을 죽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 임금은 더 이상 무엇을 살펴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인장반지를 뽑아주며 네 마음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임금이 그 하만의 말에 현혹이 되어 네가 나에게 주겠다는 돈도 내가 그냥 너에게 줄 터이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만은 전국 127도에 공문을 보내서 아달월 13일 즉 12월13일에 모두 사형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모르드개가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릎 쓰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통곡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곧 에스더에게 전달이 되었고 사람을 통하여 그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전달하기를 누구든지 왕의 명령을 받지 않은 채 왕 앞에 나가면 나라의 법이 그를 살려 주지 않는데 내가 비록 왕비라고는 하나 어떻게 왕에게 나아갈 수가 있겠는가?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에게 불림을 받은 지가 벌써 한 달이 넘는데도 부르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이런 법은 많은 대적들로 왕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하고 또 왕을 신성시하려는 의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르드개에게서 또 다시 연락이 오길 우리가 다 죽을 그때에 그러면 너는 죽지 않을 줄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말하기를 네가 왕비가 된 것은 바로 "이 때를 위함인지 누가 알겠느냐?" 라고 말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 말에 에스더가 용기를 갖게 됩니다. "이 때를 위함이라" 즉시 에스더는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고 본인도 시녀들과 더불어 사흘을 금식한 후에 왕에게 나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유명한 말이 이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오늘 본문은 참으로 숨가쁘고 내일을 알 수 없는 그런 절박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임금 앞에 나아갔는데 임금이 홀 즉 임금이 가진 그 지팡이를 내밀어 주지 않으면 그는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 그런 위험이 있지만 에스더는 민족을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와 결단을 가지고 임금에게 나아가서 유다 민족이 당한 억울함을 하소연하게 되고 그것으로 유다의 모든 민족이 하만의 계획으로부터 건짐을 받고 살림을 받게 되었는데 이 절기를 부림절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오늘 본문의 배경이며 에스더가 왕비가 된 배경의 내용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에스더서에 나타난 에스더의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교훈을 찾아본다면
첫째: 어려운 문제 앞에서는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어렵고 큰 문제 앞에서는 기도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창32장에서는 야곱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는 얍복 강가에서 밤이 맞도록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그는 간절히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하는 중에 갑자가 나타난 사람과 씨름을 하는데 그것이 결국 하나님의 사람과 그가 씨름을 하게 된 것인데 날이 밝아오자 그 하나님의 사람이 야곱의 환도 뼈를 내리쳐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항복을 하도록 하였으나 그가 결사 적으로 은혜를 구하고 축복을 구하니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붙여 주셨고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하였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출14장에 나오는 모세의 간절한 기도가 홍해 앞에서 난감하던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을 살렸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그냥 주절거리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마음이요, 소원이요, 간절한 바램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에스더의 모습, 그는 기도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있음을 봅니다. 임금이 그를 부르지 않았지만 그는 민족을 살리고 자신이 살기위해서 금식하며 기도로 준비를 하였는데 결국 그가 임금 앞에 이르렀는데 임금이 홀을 내밀어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않고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해서 민족 전체가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함을 받게 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기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나의 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다음 첫 주부터 기도의 시간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정말 어렵고 힘든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승리하고 주님의 은혜에 붙잡혀 살아갈 수가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도밖에 없음을 잘 알고 계실 줄 믿습니다. 에스더 처럼 담대히 기도하는 좋은 믿음의 여인들이 우리제단에 많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르드개 처럼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큰 일 앞에서 재를 뒤집어쓰고 대성통곡할 수 있는 좋은 믿음의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주님의 일을 위해서는 일하다가 "죽으면 죽겠다"는 헌신과 각오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에스더는 왕비의 몸이지만 내 동포와 민족을 위해서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가 아하수에로 임금으로 부터 은혜를 입게 되고 왕의 마음이 바뀌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롬16장에 기록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라는 바울의 동역자들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장막을 깁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울을 만나서 정말 최선을 다하여 복음 사역에 동참하는 것을 봅니다. 이들 부부가 얼마나 열심이 있었는지 바울의 전도사역을 위하여 자신들의 목을 내어놓을 만큼 열심 있고 헌신된 사람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작은 헌신이 작은 봉사가 사심이 없는 온전한 봉사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든지 크게 사용될 수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주님을 위하여 이런 헌신하고자 하는 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셋째: 형제의 고통과 아픔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공동체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불러내신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구속함을 입은 사람들 즉, 교회의 구성원 모두는 서로가 형제요 자매가 되는 것 입니다. 어느 한 연약한 지체가 있어 힘이 들고 어려우면 다른 지체가 어떻게 편하겠습니까?. 다른 한 지체가 기쁘고 즐거우면 어찌 우리도 기쁘고 즐겁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공동체입니다.
오늘 에스더에게 모르드개가 하는 말이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그때에 너는 편한 것 같으냐? 너는 살아날 것 같으냐? 우리는 같은 민족이요 같은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 말에 에스더는 용기를 가지고 민족적인 위기 앞에 분연히 용기를 가지고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바로 이런 마음 믿음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사랑의 나눔의 장소입니다. 초대교회는 서로 나누고 섬기고 부족함은 서로가 격려하고 협력하였습니다. 우리의 교회도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따뜻한 사랑의 공동체, 섬김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시드니 영락교회도 에스더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많이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바로 이때 세움을 입은 사람들처럼 귀한 섬김과 봉사가 있어서 그들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살아나는 귀한 일이 있기를 원합니다. 아멘!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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