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교육부서 말씀일기 본문은 시편 69편 22-29절인데
지난번에 시편 69편은 통째로 올려서
오늘은 교회전체 말씀일기 본문 중 욥기 1장 1-5절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2 그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태어나니라.
3 그의 소유물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4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5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들은 욥에 대하여 한 두 번의 설교를 들어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욥이 엄청난 환난을 당하였지만,
원망을 하지 않고,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며 취하신이도 하나님이라’고 하는 불굴의 믿음으로,
결국 나중에 배나 복을 받았다”는 것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를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배나 복을 받는다고 하여도,
그 사랑하는 자녀가 한꺼번에 다 죽는 고통을 당한 후에,
배나 많은 재산을 받는다 해도,
그것이 욥에게 유익이 있겠습니까?
환난을 당하기 전에도 이미 욥은 대단한 부자였습니다.
이런 욥은 신앙도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런 환난을 주시지 않아야, 더 복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날도 대부분의 설교가
‘하나님을 잘 섬기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복을 받는다’고 말을 합니다.
노골적으로 하든지 좀 더 세련되게 하든지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하나님을 잘 섬기면 복을 받고, 하나님을 잘 못 섬기면 복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神(신)도 내 하기 나름이라’는 식의 생각들이
우리 안에 이미 장착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태로 성경을 보기에,
성경을 통하여 나의 뜻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성경에 투사시켜,
성경마저도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도구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관점들을 산산이 부수는 내용이 ‘욥기’입니다.
시편 73편 1~2절.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 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편 기자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욥도 그 마음이 정결한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복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욥도 욥의 친구들도 ‘욥에게 갑자기 들이닥친 재앙’에 대하여 모두가 의아해하는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도 그러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악인의 형통함’과 ‘의인의 고난’ 때문이었습니다.
악인의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다면,
의인으로 살기 위하여,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손을 씻어 깨끗하게 하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시편기자는 항의입니다.
오히려 의롭게 살려고 할수록 재난과 징벌을 받는다는 것에 대하여 심한 고통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성소에서 해결이 됩니다.
하나님의 성소에서 해결이 되었다는 것은
성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해결이 될 수도 있고,
기도 중에 그 뜻을 알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깨닫고 나서는 자신이 참으로 무지한 짐승과 같았음을 알고,
하늘과 땅에서 주님만 사모할 분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을 보고서
주님이 없다고 하면서, 주님을 멀리하는 자는 망할 것이지만,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가까이함’이 복임을 선포합니다.
인생이 땅의 티끌임을 언제 알 수 있습니까?
고난 가운데서 알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여, 자신이 땅의 티끌임을 알고,
주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처소가 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주의 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땅의 티끌이며,
우리의 일생이 천년이 된다고 할지라도
주의 목전에는 밤의 한 순간 같은 것입니다.
인생은 잠깐 자는 것 같고, 아침에 돋는 풀처럼 자라다가 저녁에서는 시드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본 욥과 같이 형통하면,
결코 자신이 땅의 티끌임을 알지 못합니다.
욥기 3장부터 욥은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자신의 생일을 저주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고난의 이유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위로하려고 찾아온 친구들은 오히려 온갖 因果應報(인과응보)적인 논리로 욥을 공격합니다.
이런 공격에 욥은 끝까지 굴복하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因果律(인과율)적인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욥은 이런 因果律(인과율)적인 공격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것이
‘욥의 인내’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결국 욥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은혜로 믿게 되는데,
이런 자들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처럼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분을 믿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욥의 고난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십자가 안에서만, 인간의 모든 因果律(인과율)이 다 무너져 내립니다.
그러므로 택함을 입은 성도라면 고난은 필수 코스입니다.
고난이 없다는 분도 간혹 있습니다만,
그들도 다 늙고, 병들고, 죽어갑니다.
이러한 것들에 직면할 때에,
더 살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땅의 티끌임을 알고, 티끌과 재 가운데 회개하는 자가 주의 백성입니다.
이런 자들의 동일한 고백은 우리의 영원한 처소를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 자신의 일하심으로,
주님 자신이 우리의 영원한 처소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닥쳐오는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당신의 처소’로 만들어 가시는
주님의 열심을 기억하며
인내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미 ‘까닭없는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