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전문개발구역 설치와 변화하는 북간도 및 용정(1885년–1905년)
청조는 한족(漢族)의 동북 이주에 실패를 한 후에 월간 조선인들에게 눈을 돌린다.
조선인들을 이용하여 황무지를 개간하여 정부의 수입을 올리고 서진해오는 러시아인들도 막자는 것이었다. 이로서 조선인들은 공식으로 중국인으로 귀화하고 토지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치발하고 역복해야 한다는 조건과 황무지를 개척하여 3년 후부터 세금을 내야하는 조건이 있었다. 전자의 치발역복은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는 조선의 효의 개념으로 말미암아 효자로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미는 것이 어려워 많은 조선인들이 돌아가거나 호주인을 세워서 토지를 구입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만들었고 후자는 개간 3년 후에 세금을 내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조선인들이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빚을 지게 되어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중국인들에게 개간지를 빼앗겼기 때문에 빛 좋은 개살구였다.
1885년, 청나라는 두만강 이북 해란강 이남의 길이 700 리, 너비 50 리 되는 지역을 조선인 전문 개간구로 정하고 월간국에서 관장하였다. 그리하여 해란강 유역 도처에 조선인 마을들이 세워져 도합 5,590여 호에 이르렀다. 청은 조선 개간민을 관리하기 위하여 조선인들을 4보, 39사, 129갑, 415패에 소속시켰고 용정은 용지사에 속하였다.
1886년, 정준이 밭을 갈다가 돌담 아래 묻혀 있는 옛날 선주민, 여진사람들이 썼던 우물을 발견하였다. 우물을 깨끗이 청소하고 용두레를 설치하였다. 봉금이 풀려 이주의 자유가 허용되어 개간지를 찾아 오가는 조선인들과 한족들이 우물가에서 목을 축이고 쉬며 인근에 정주하며 그 지역을 “용두레촌”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1세대 정착주민들이 용두레의 용(龍)자와 우물의 정(井)자를 합하여 용정촌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용정촌은 조선인은 물론이고 청나라 관리들마저도 인정하여 공식 지명이었던 육도구를 대체하게 되었다.
1889년, 정광제가 천보산 은광을 개발 보고서를 청 조정에 올렸다.
많은 조선인들이 은광에 취업하기 위하여 천보산에 구름떼처럼 밀려왔다.
1890년, 청나라가 민족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들에게 만주족처럼 머리를 깎고 만주족의 옷을 입는 치발변복과 청나라 국적으로 국적을 바꾸도록 입국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최고의 예와 효로 여기는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토지집조와 경작권을 포기하고 러시아 연해주와 북만주와 남만주로 떠나갔다. 도문강 북안의 종성위자에서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천보산은광이 동북 최고의 은광이 되었다. 1890년에서 1898년 사이에 500여 명의 광부들이 백은 300여 만 냥을 생산하여 동북 최고의 은광으로 알려져 취업을 원하는 조선인들이 계속 밀려 들었다.
1891년, 훈춘초간총국이 무간국으로 고쳐지고 1892년에 사무실을 남강(연길)으로 이전했다.
1893년, 천보산 은광이 관청과 상인이 경영하는 ❰훈춘천보산광무국❱으로 승격되었다.
용지사(용정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 개간민은 34호였고 개척지 면적은 243, 71정보였다. 이에 청 정부는 새로운 조선 개간민들을 유치하기 위하여 처음 개간한 황무지는 3년 동안 지세를 내지 않고 3년 후부터는 정보당 1전 8푼의 세금을 내고 경작권을 가지게 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새로운 개간민들이 유입되고 그들의 열정으로 1900년경에 용정부근의 대교동에서 연변에서 최초로 관개 수로를 이용한 벼농사에 성공을 하였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연변 일대에 새로운 논밭이 개간되어 용정은 물론이고 연변 일대는 벼농사의 성공으로 비로소 먹고 살 만한 세상이 되어 경제적인 안정을 이루었다.
연변 특히 용정의 수전 재배의 성공은 경제적인 풍요와 함께 독립 운동을 꿈꾸는 망명 지사들과 청년투사들을 불러 들였다. 그리하여 용정은 “토지”의 서희와 길상이가 독립운동을 위해서 찾아가는 곳이요, “미스터 션샤인”의 고애신이 의병활동을 위해 찾아가는 곳이 되었다. 그러나 용정은 독립군을 토벌하는 일본 경찰과 일본군도 함께 들어오는 곳이었다.
당시 북간도 이주민들의 80% ~ 90%가 일제와 지주의 수탈과 착취, 양반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천민들이었다. 그럼에도 조선 간민들은 마을에 서당을 세우고 ❰삼강오륜❱을 비롯한 충효를 강조하는 유교사상과 윤리도덕을 주입하는 보수적인 봉건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서당을 중심으로 하는 유림들이❰농무계❱를 만들어 조선인들의 신식 교육과 간민회의 활동을 치열하게 저지하였다. 1914년 연길시 한 지역에서만도 서당이 116개나 있었으며 이 중에는 근대식으로 바꾸어진 개량 서당이 34개가 있었다.
1899년 4월, 천보산은광 노동자 박선은 장옥명, 이계신, 김용성, 유순우 등과 함께 한족과 조선족 광부 200여 명을 동원하여 대파업을 일으켰다. 그들은 광산주의 대리인 양한과 광산주 정광제의 주택에 방화를 하고 은 제련 용광로를 훼손하고 광산창고도 불태웠다. 지방 관청에서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하였으나 광부들은 이미 취체를 피해 광산에서 떠났다.
1900년, 용정 이동 해란강반의 서전벌과 지신 대교동 부근에서 벼를 시험 재배하였다.
의화단 난이 일어나 부청멸양(扶淸滅洋)을 구호로 내걸고 반외세, 반기독교운동을 벌였다.
7월에 러시아군이 훈춘현 소재지를 공략하고 연변지역에 침입하였다.
1902년, 연길청을 설치하고 길강군 5개 영을 주둔시켰다.
1902년, 성진 선교스테이션에서 활동하던 캐나다장로교의 그리어슨(구례선) 선교사가 시베리아와 만주 등지에 흩어져 있는 조선인들에게 전도할 목적으로 홍순국 조사와 함께 연해주 포시에트 등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용정에 들렸다. 그 후 용정에서 비신자들과 이주해 온 장로교회 신자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1903년, 청나라는 ❰주정학당장정❱을 발표하여 신학(新學)교육운동을 제창하였는데 조선 간민들의 교육 또한 청나라의 신학교 교육영향을 받게 되었고 당시 조선을 휩쓸고 있던 애국문화계몽운동의 영향이 들어와 조선인 마을에 신식교육 바람이 불었다. 그리하여 구(舊)서당이 신식서당으로 개편되기도 하였다. 신식서당(개량식 서당)과 신식학교는 조선어와 조선 역사, 조선 지리와 산수를 가르쳤다. 신식교육을 받은 교사들과 민족주의자들이 서당과 학교와 교회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고 항일의식을 심어주었다. 이런 일련의 변화 속에서 신식학교가 조선 간민사회에 대두하였다.
1903년, 청나라와 러시아에 의해 건설된 동청철도가 개통되어 연변일대의 조선인들이 철도연선을 따라 북만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1904년, 4월 훈춘현의 옥천동에서 기독교장로교인 김창학 집사와 최 씨가 최초의 조선인 학교인 ❰동광학교❱를 설립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 후 일본과 러시아가 맺은❰포츠머스조약❱으로 장춘 이남의 동북영토가 일본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이에 ❰영일동맹❱으로 일본을 지원하였던 영국은 용정의 땅의 일부를 조차하여 조계지❰영국더기❱로 만들었다. 훗날 이❰영국더기❱에 세워진 캐나다장로회 용정선교부는 치외법권으로 독립투사들의 든든한 배후가 되었고 1919년의 3.13만세 시위를 비롯하여 1920년대 조선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세상에 알리는 등 위대한 기여를 하였다.
일본과 청이 간도협약을 맺어 일본이 간도영유권 포기하는 대신에, 상부지(商敷地)와 잡거지역의 조선인 관리, 길장철도 회령 연장건 등의 이권을 챙겼다.
1905년, 용정시 지신진 광동촌에 ❰동신학교❱와 용정시 지신진에 ❰덕흥학교❱가 세워졌다.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아간 을사보호조약은 조선인들의 만주 이동을 촉진시켰다.
조선 멸망과 일본, 청의 멸망과 신해혁명 그리고 만몽조약 (1906년~1915년)
3부로 계속
2025년 2월 25일 수요일
우담초라하니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