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샘과 평화의 강물이 흐르다.”
걷기 묵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천천히 숨을 고르면서 한 발짝씩 걸으면서 성경말씀을 묵상하거나 말씀에 비추어 지금 내 삶을 조명해보는 것입니다. 아름답게 단장된 이 가을에는 더할 나위 없이 걷기 묵상이 제격입니다. 저는 마음에 어둠이 밀려오거나 생각이 엉킨 실 뭉치처럼 복잡해지면 복음이나 다른 성경 한 구절을 외우고 뒷산이나 개천 길을 걷습니다. 특별한 지향이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목적지가 정해져서 서둘러 얼마만큼 걸어야 할 심리적 부담감이나 강박도 없습니다. 30분도 좋고 1시간도 좋습니다. 주변 환경을 눈여겨보면서 생각을 단순하게 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며 무뎌진 감성을 예민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비온 뒤 천천히 가고 있는 달팽이를 보면서, 개천의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면서, 한적하게 헤엄을 치는 잉어 떼를 보면서, 풀잎들의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있음과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산에서는 울긋불긋 물든 낙엽과 그 사이에서 폼 잡고 있는 녹색의 잎들의 흔들림을 보면서, 산과 맑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이 어울려 펼쳐진 하모니를 느끼면서, 아낙네들의 수다를 들으면서 하느님의 창조와 사랑을 체험합니다.
그렇게 이런저런 것들을 체험하다보면 평소에 좋아하는 성가 한 절이 자연스럽게 부르게 됩니다.
<언제나 주님과 함께 산다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되리. 사랑의 주 예수 홀로 모시고 영원히 여기서 살고 지고.
헛되이 지나는 이 세상 영화 주님을 위하여 다 버리리. 참 평화 누리는 나의 영혼은 다른 것 욕심낼 여지없네.
사랑의 사도인 성 요한 같이 주님의 품 안에 안기어서. 참사랑 배우는 오롯한 마음 고요히 공손히 드리오리.
그리스도의 평화를 함께 전하며 천상의 기쁨을 노래하네. 덧없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진실한 행복을 찾으리라.>
오늘 독서로 들은 이사야 예언서(66,10-14)는 바빌론 유배로 인해 모든 것을 상실한 슬픔 속에서 황폐해진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하느님께서 당신이 몸소 다시 위로와 사랑과 평화의 상태로 회복시켜주시리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 있을 때, 곧 하느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대로 순명하여 실천할 때 어린 아이가 따뜻하고 평온한 어머니 품에서 젖을 빨 듯, 하느님의 백성은 기쁨과 즐거움, 평화와 위로를 충만히 받아 생기(生氣)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악담과 의미 없는 소음, 그리고 도를 넘어선 탐욕에 의해 불만족이라는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며, 자기 존중감과 가치관의 상실이라는 지독한 유배를 겪고 있습니다. 참 기쁨이 아닌 쾌락의 지배를 받고, 생명의 말씀대신 욕설과 비난과 거짓을 입에 담고 있으며, 평화가 아닌 분노와 미움이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면서 그 어느 때보다 영적 정신적 황폐함을 겪고 있습니다. 하느님 품을 떠난 이들에게 기쁨과 만족함 없이 슬픔과 불안과 목마름만 남습니다.
그러나 참된 하느님의 백성이며 신앙의 모범이신 성모님은 언제나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여 양식과 길로 삼으셨고, 그분 섭리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다른 것 욕심 낼 것 없이 완전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셨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 곧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모심으로써 그 모든 것을 누리셨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섭리를 인간의 이해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믿음으로 받아들이심으로써 주님을 모신 기쁨에 가득 차 계셨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힘겨움)을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루카 1, 46-48)”
그러니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매일 매순간 ‘해로운 것은 모두 물리쳐 주시고, 이로운 것은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길 청하고(본기도)’, 더 나아가 “주님께 청하는 것이 하나 있어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고 그분 궁전을 눈여겨보는 것이라네.(시편 27,4)”는 말씀대로, 이미 시작된, 그러나 마지막 날에 이루어지게 될 하느님의 집에서 그분 품에서 영원히 사는 행복을 청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