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사건, 범행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닌데, 여론에서 관심을 갖는 바람에. 명문대 의대생에 집단 성추행이라니 얼마나 사람들 관심이 쏠려?”
피고인을 변호하는 한 변호인이 공판과정에서 쉬는 시간에 이런 내용으로 자신의 불편한 속마음을 비추었다고 한다. 그 아무 것도 아닌 사건이 바로 이른바 '고대 의대생 집단 성추행 사건'이다.
별거 아닌 사건인데 하필…
6년간 같은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고 동아리활동을 해왔던 의대생 동기 4명의 남녀가 ‘공기 좋고 술마시기 좋은 곳’으로 MT를 갔다. 술에 취해 잠든 피해자에게 3명의 가해자가 집단 성추행을 하고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했다. 심신 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하여 집단적으로 성추행하였다 하여 ‘특수준강제추행’으로 공소된 이들 피고인들에 대하여 지난 9월 30일 1심 재판부의 선고가 있었다.
모두 실형이 내려졌다. 기소된 의대생 3명 가운데 한 명은 징역 2년6월, 두 명에게는 징역 1년6월을 각각 선고됐다. 3년간 이들의 신상이 공개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검사의 구형보다 높은 형이다.
범행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닌데, 하필 명문 의대생들이 벌인 일이었고, 더구나 최근 영화 <도가니>의 흥행으로 당시 집행유예를 선고한 판사까지 여론에 뭇매를 맞고 있는 판국이니 재수가 없어도 오지게 없다고 여길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니 2심이나 적어도 3심에서까지 이 재수없는 상황이 이어지겠냐, 점점 관심에서 멀어질 쯤 상급심에서는 다른 결과가 나오리라 기대해마지 않을 것이다. 피고인들은 선고 당일 즉각 항소했다.
공판 과정을 내내 취재했던 한 기자의 취재일기를 보면, 선고당일 검사구형보다 높은 선고에 재판장이 술렁였고, 복도에서는 “여자애가 술 취해 자면 안 건드릴 남자가 어디 있느냐”는 어느 중년 여성의 볼멘소리도 들렸다고 한다. 공판과정에서는 피고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귀농부부’가 피고인들에 대한 걱정과 언론에 대한 울분으로 보러 왔다며 법정에서 “어디 세상에 가스나가 술 먹고... 남자 앞길을 망치는... 금쪽같은....”이라며 한숨섞인 목소리로 웅얼거리더니, 공판이 끝난 뒤 “여자가 남자들과 한 방에 든 것이 잘못이고, 술 마시고 장난으로 만질 수도 있는 건데, 여자가 남자들 앞길을 망치고 있다. 여자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모든 것을 감싸야 한다”고 했단다.
이 사건의 한 변호인은 팬션 방이 얼마나 좁은지 현장검증하자고 목소리를 높였고, 피고인의 평소 수면습관을 증언할 증인을 세우는가 하면, 평소 피해자가 ‘문란’하다 하더니 급기야 “배○○는 이 사건에는 피고인이지만, 피해자와 둘만의 관계에서는 진짜 피해자”라는 주장까지 하였다. 이들 피고인들이 거물급 변호인단을 구성하였다는 기사를 보긴 했지만 과연 거물은 거물인 듯하다.
재수가 없어서 범죄가 성립하는 경우는 없다
선고에 앞서 9월 초에는 학교가 이들 가해자들에 대하여 결국 ‘출교’ 결정을 내렸는데, 그에 앞서 학교가 얼마나 이 사안에 대하여 미온적 태도를 보였으며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얼마나 스스럼없이 행하였는지 언론에도 수차례 보도됐다. 특히 의대 한 교수는 “가해 학생들이 곧 돌아올테니 잘해줘라”라고 했다고 하니 학교가 이 사건에 대해 기본적으로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술 한 잔 마시고 운전했다가 재수가 없어 단속에 걸려 면허정지가 된 사람이나, 자신도 기자들과 모텔에 간 적 있다고 고백까지 하면서 성매매란 재수가 없어서 걸리는 것이라고 발언한 한 경찰청장이나, 잠깐 누구를 만나려고 차를 정차했다가 재수가 없어 딱지를 떼인 거라 불평하는 사람이나 과거 친일 행적 자료가 유실되어 살아남은 사람도 있는데 자료가 남은 사람만 재수없게 걸리는 건 문제가 아니냐는 한 보수정당의 국회의원이나 공통점이 있다.
범죄란 재수가 없어서 성립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하지만 용케도 재수가 좋아 범죄구성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한들 법과 규정, 규칙을 위반한 '사실'이 존재하며, 가해자가 있다면 피해자가 있다는 것이다. 지들이 재수 좋아 법에 걸리지 않았다고 피해자의 피해사실까지 재수 좋아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피해자가 운 좋게 성격 좋고, 넉넉한 어머니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어서 가해 사실도 피해 사실도 모두 존재할 수 없는 마법같은 일이란 없는 것 아닌가.
재수없어 걸렸다는 인식이 확산시키는 2차 가해
이러한 인식은 그 자체로도 미성숙한 인간형이 보이는 특징이기도 하지만 그런 수준의 인간에 대한 안타까움은 차치하고, 이러한 인식이 확산시키는 2차 가해의 정도는 심각하다. 고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에도 대학 당국에 자신의 행위에 대해 소명하기 위해 배○○는 ‘피해자는 평소 이기적이다, 아니다’, ‘피해자는 평소 사생활이 문란했다, 아니다’, ‘피해자는 싸이코패스다, 아니다’라는 문항이 기재된 설문지를 돌리기까지 했단다.
피고인들에게 소송 당할 것이 두려워 ‘출교’가 아닌 ‘퇴학(퇴학의 경우에는 한 달만 지나면 재입학 가능)’으로 징계수위의 가닥을 잡던 대학, 피해자의 이름이 버젓이 기재되어 있는 채로 카카오톡 대화를 법정에서 공개하고 피해자에 대하여 사생활 문란운운하며 배○○를 열정적으로 변호하던 변호사라는 사람, 피해자를 찾아와 ‘이런 게 알려지면 너도 끝장’이라며 협박했다는 피고인의 부모, ‘여자가 남자랑 술을 마셔서 벌어진 일’이라고 한탄하던 귀농부부, ‘예쁘긴 예쁘네’라며 피해자 신상털기에 나선 인터넷 과학수사 네티즌, 사내하청업체 사장과 관리자에게 성희롱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해고를 당한 피해자에게 ‘남자가 좋아했었나보지, 강간한 것도 아닌 것 가지고’라는 시선으로 피해자의 투쟁에 찬물을 끼얹는 남성 노동자, 투쟁하는 그녀의 농성장을 강제로 철거하는 여성가족부, 성희롱ㆍ성폭행 사건이 벌어졌다하면 우선 그 행위의 정도에 관심을 쏟는 수많은 제3자들. ‘에개, 별 것도 아닌데 유난스럽네. 페미니스트야?’라며 성폭력에 대하여 유난스러운 피해자들의 성격과 성향 탓으로 돌리는 무수한 사람들. 이 모두가 2차 ‘가해자’다.
이 2차 가해자들의 머릿속에는 성범죄란 재수가 없어서 성립된 죄라는 인식이 숨어 있다. 이는 비단 성폭력 범죄가 친고죄이기 때문만은 아닐 터. 형법상 죄인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 인간으로 태어난 자기 자신에게 물어봐라. ‘죄’의 구성요건에 ‘재수’의 있고 없음이 있는지 말이다.
박윤진 / ‘노무법인 삶’ 대표 공인노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