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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551. [역경의 열매] 김영걸 (1-16) 우리가족 믿음의 뿌리 할머니, 신앙의 자유 찾아 월남
해방 후 북한 땅에 공산정권 들어서며
신앙의 제약 받자 온 가족 월남 결심
강원도 삼척시 도계에 정착한 할머니
도계감리교회서 전도사로 교회 섬겨
경북 영양군 영양읍교회 성도들이 1963년 교회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앞줄 어린아이가 김영걸 목사, 김 목사 오른쪽과 왼쪽이 할머니 안 초순 전도사와 아버지 김충효 목사.
내가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서부리다. 정확히 말하면 영양읍교회 전도사 사택에서 태어났다. 영양은 지금도 군 자립도가 가장 낮은 곳 중 하나이니 1950~60년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산골 중의 산골이라 할 수 있었다. 당시 할머니는 영양읍교회 전도사였고, 아버지는 신학생이었다. 아버지가 사택에서 살고 계실 때 내가 태어났다.
그래서 우리 가족을 설명하려면 할머니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 가족은 증조할아버지가 한의사였고, 할아버지는 목재 사업을 하시면서 함경북도에선 부유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예수를 믿었지만, 실제적인 믿음의 뿌리는 할머니로부터 시작됐다. 할머니 안초순 전도사는 함경북도 신포에서 전도사로 교회를 섬겼다. 학창 시절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집사로 교회를 섬겼다. 처음에는 문호리교회를 섬기다가 후에 신포읍교회로 옮기셨다. 할머니는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하셨다. 말씀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고, 기도를 신령하게 잘하시는 분이셨다.
그러다 45년 해방 후 북한 땅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신앙의 제약을 받게 됐고, 온 가족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했다. 남쪽으로 먼저 내려갈 결심을 한 분은 사업을 하던 둘째 작은할아버지였다. 작은할아버지는 배를 타고 월남하기 전 형수인 할머니를 찾았다고 한다. “형수님, 기도하시는 전도사님이 함께 가 주세요. 불안해서 갈 수가 없습니다”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할머니는 작은할아버지 가족과 동행해 남쪽으로 오게 됐다. 가족을 이북에 두고, 먼저 배를 타고 월남하신 때가 46년이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고향인 북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다.
월남한 할머니는 강원도 삼척시 도계로 가셨다. 그 당시 도계는 일자리도 많고, 사람도 많은 큰 도시였다. 할머니는 도계감리교회 전도사로 계셨다. 할머니는 기도와 전도를 잘하는 분이셨고, 교회도 부흥했다고 한다. 당시에 도계에는 감리교회뿐이었는데 함흥에서 내려온 장로교인들이 중심이 돼 장로교회도 세워졌다. 이때 할머니가 예배를 인도하셨다. 그 교회는 지금의 도계장로교회(길지훈 목사)로 이어지고 있다.
아버지는 북에서 할머니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홀로 남쪽으로 오셨다. 이때 아버지 나이가 18세였다. 기차를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남으로 내려오셨다고 한다. 지금의 양주 근처에서 임진강을 헤엄쳐 건너기도 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월남하면서 있었던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늘 한 편의 드라마처럼 들으면서 자랐다. 이렇게 우리 가족은 마치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왔듯이 고향을 떠나 남쪽에서 나그네 삶을 살게 됐다.
약력=충남대 지질학과, 평택대(구 피어선신학교) 신학과, 장신대 신대원(교역학 석사), 숭실대 통일정책대학원(정치학 석사), 장신대 목회신학대학원 목회신학박사 수료,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부서기, 포항시 기독교연합회장, 성시화운동본부 대표본부장, 현 포항동부교회 위임목사, 한국기독교연합회관 이사장.
* [역경의 열매] 김영걸 (1) 우리가족 믿음의 뿌리 할머니, 신앙의 자유 찾아 월남
* [역경의 열매] 김영걸 (2) 월남 후 3년 만에 기적적으로 만난 아버지와 할머니
* [역경의 열매] 김영걸 (3) 쓰러진 손자 안고 눈물로 기도 "하나님 고쳐주세요"
* [역경의 열매] 김영걸 (4) 가나안농군학교 섬기며 하나님 안에서 가족들 다시 모여
* [역경의 열매] 김영걸 (5) 나는 교회의 아들… 교회는 내 인생 출발점이자 바탕
* [역경의 열매] 김영걸 (6) 아버지 사역 따라 서울 전학… 성적 떨어지고 친구들 놀림감
* [역경의 열매] 김영걸 (7) 청소년기 방황 거듭하며 '목사의 꿈' 버리기로 결심
* [역경의 열매] 김영걸 (8) "하나님 저는 어떤 길로 걸어가야 합니까"
* [역경의 열매] 김영걸 (9) 세상과 단절한 채 장신대 신대원 목표로 입시 준비
* [역경의 열매] 김영걸 (10) 교육전도사로 휘경교회 섬기며 '마음만은 담임목사'
* [역경의 열매] 김영걸 (11) 목회 인생 출발지 휘경교회… 10년 섬긴 마음 속 고향
* [역경의 열매] 김영걸 (12) 숨 넘어갈 것 같은 아이 붙들고 "하나님 살려만 주세요"
* [역경의 열매] 김영걸 (13) 소망하던 담임목사로 부임… 할머니와 아버지의 길 이어
* [역경의 열매] 김영걸 (14) 포항동부교회 부임… 성전 건축의 길 열어주신 하나님
* [역경의 열매] 김영걸 (15) 하나님 은혜와 성도들 기도로 세워진 포항동부교회
* [역경의 열매] 김영걸 (16·끝) 위기 겪고 있는 한국교회, 정도·정직 목회로 이겨내야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영걸 (2) 월남 후 3년 만에 기적적으로 만난 아버지와 할머니
무작정 가족 찾아 돌아다니던 아버지
도계역서 노방전도 하던 할머니 상봉
외할머니의 선교사 섬김으로 시작된
경북 예천 용궁교회서 어머니와 인연
김영걸 목사의 할머니 안초순 전도사(두 번째 줄 오른쪽 다섯 번째)가 1950년 강원도 도계장로교회에서 성도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따로 남한에 내려온 할머니 안초순 전도사와 내 아버지가 만난 건 하나님의 은혜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할머니는 월남 후 강원도 도계장로교회에 계시면서 장날이면 노방전도를 하셨다고 한다. 특히 도계역 앞에 선 채 기차에서 내리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혼자 월남한 아버지는 서울로 가셨다. 곳곳을 돌아다니며 함경도에서 온 사람들을 찾아 이런저런 소식을 물어보다가 강원도 도계에도 함경도 출신들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됐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무턱대고 강원도 도계를 찾아가셨다.
기차를 타고 도계역에 내린 아버지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막막하셨다고 한다. 그러던 중 역 앞에서 아주 익숙한 사람을 보게 된다. 전도하다가 잠시 쉬고 있는 할머니였다. 함경도 신포에서 각자 월남한 어머니와 아들이 이렇게 강원도 도계역에서 기적적으로 만난 것이다. 두 분이 헤어진 지 3년 만이었다.
할머니는 아버지를 만나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올 줄 알았다.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네가 올 거라고 알려주시더라.” 교회 성도들은 할머니가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해서 하나님이 아들도 만나게 해주셨다며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고 한다.
그 후 할머니와 아버지가 경북 예천 용궁교회(현 풍성한교회)로 가셨을 때 아버지는 그곳에서 내 어머니를 만나셨다. 외가 쪽은 용궁교회의 뿌리가 되는 집안이었다. 외할머니 이귀조 권사는 선교사가 이 지역에 찾아왔을 때 그를 대접하고 잠자리를 내어주셨다고 한다. 이런 외할머니의 섬김으로 용궁교회가 시작됐다.
외할머니는 슬하에 5남 4녀를 두었는데 우리 어머니는 전체로는 셋째였고, 여자로는 둘째 딸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용궁교회에서 만났고 이후 할머니가 영양읍교회로 옮기셨을 때 결혼했다. 그래서 온 가족이 영양읍교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됐다. 함경도에 살던 아버지는 이제 경상도를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게 되신 것이다.
외할머니는 처음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을 반대하셨다고 한다. 약혼식 때는 참석하지도 않으셨다. 귀하게 키운 딸이 가난한 여전도사 아들과 결혼한다고 하니 부모 입장에서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을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결국 마음이 열리셔서 부모님은 양가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어릴 때 나는 용궁교회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바닷속에 있는 교회인 줄 알았다. 8명이나 되는 외가 쪽 어른들의 이름과 숫자를 외우는 데도 애를 먹었다. 외가 친척들은 사람도 많고, 행사도 많아서 모이면 늘 시끌시끌한 분위기였다. 반면 친가는 사람이 적어 외롭고 쓸쓸한 분위기였다.
그런데도 나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설렌다. 할머니가 교회 바닥에 엎드려 눈물로 기도하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고, 그 울음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우리 가족과 많은 성도를 위한 기도였을 것이다.
할머니는 1960년 초에 경기도 광주 가나안농군학교로 가셨다. 가나안농군학교를 설립한 김용기 장로님의 부탁으로 농군학교 내에 있는 가나안교회 전도사로 섬기셨고, 돌아가실 때까지 가나안교회에서 일생을 보내셨다.
***[역경의 열매] 김영걸 (3) 쓰러진 손자 안고 눈물로 기도 “하나님 고쳐주세요”
2살 무렵 당시 유행하던 소아마비 걸려
침도 약도 소용없자 주님께 매달려 기도
김영걸 목사의 할머니 안초순 전도사(앞줄 오른쪽 세 번째)가 1977년 경기도 광주 가나안농군학교 안에 있는 가나안교회 장로 장립 예배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안 전도사 왼쪽은 가나안농군학교 대표 김용기 장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영양읍교회 사택에서 할머니와 함께 신혼 생활을 시작하셨다. 아버지는 두 달 정도 영양읍교회에 계시다가 근처 추파교회에 이어 진보교회 담임 전도사로 사역하셨다. 그리고 1960년 성서공회 직원으로 채용돼 서울로 가게 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같이 서울에 올라가지 않으시고 나보다 두 살 많은 누나와 함께 영양읍교회에서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내가 태어났다.
내가 2살 때 일이다.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 일어났다. 잘 걸어 다니던 내가 어느 날 쓰러지더니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침을 맞아도 안 되고,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당시 유행하던 소아마비에 걸린 것이다.
할머니는 어린 나를 끌어안고 “하나님 고쳐주세요. 첫 손자인데, 하나님께 바친다고 서원한 손자이니 하나님이 고쳐주셔야 합니다”라고 교회 바닥에서 눈물로 기도하셨다고 한다. 전도사 가정에 무슨 돈이 있었겠는가. 하나님 도움밖에는 의지할 게 없었던 것이다.
할머니가 소아마비로 쓰러진 손자를 안고, 예배당에서 눈물로 기도한다는 소문이 교회에 다 퍼졌다. 그러자 교회 여전도회 회원들이 돈을 모아 할머니에게 주면서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어머니는 나와 누나를 데리고 근처 안동이나 대구도 아닌 서울까지 가셨다. 어머니 나이 27세 때의 일이었다. 한 손엔 누나 손을 잡고, 등 뒤에는 나를 업고 그렇게 서울로 가셨다.
어떻게 그 어린 새댁이 서울까지 가게 됐는지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어머니는 서울에 와서 어느 권사님의 도움을 받아 나를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시켰다. 돈도 없고, 능력도 없이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던 전도사의 손자가 서울에서 제일이라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소아마비 치료를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별다른 후유증 없이 잘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보조기구를 다리에 차고 다녔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다리가 휘거나 구부러지지 않았다. 영양읍교회 여전도회 회원들과 권사님들의 사랑이 오늘의 내가 있도록 해준 것이다.
지금도 여전도회에 가서 말씀을 전할 때면 종종 이 간증을 한다. “여러분의 사랑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꿨습니다.” 생생한 간증에 많은 이들이 은혜를 받는 것을 보게 된다.
어릴 때는 하나님이 어떻게 내 다리를 고쳐주셨을까 궁금해하기도 했다. 나중에 이 기적이 할머니와 부모님의 신앙고백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할머니와 부모님은 늘 나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었다. “네 다리는 하나님이 고쳐주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내 다리를 고쳐주셨다고 굳게 믿으며 성장했다.
할머니와 잠을 자면 할머니는 늘 내 약한 다리를 주물러 주셨다. 피가 잘 통해야 한다면서 다리를 주물러 주며 기도해주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하나님과 할머니, 부모님의 사랑을 충만히 느꼈다. 지금도 내 다리를 주물러주면서 기도해주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역경의 열매] 김영걸 (4) 가나안농군학교 섬기며 하나님 안에서 가족들 다시 모여
가나안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신 할머니
새벽기도와 심방 다니며 성도들에 헌신
아버지는 가나안고아원 원목으로 사역
경기도 광주 가나안교회에서 사역한 김영걸 목사의 할머니 안초순 전도사(왼쪽)가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운 김용기 장로의 아내(오른쪽)와 함께 있는 모습.
할머니는 1962년 경기도 광주 가나안농군학교 안에 있는 가나안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그 후 아버지도 가나안고아원 원목으로 사역하게 되면서 우리 가족들은 다시 함께 모여 살게 됐다.
할머니는 새벽기도가 생활이셨고 낮에는 심방을 다니셨다. 할머니가 새벽에 기도하러 나가면 나도 같이 깰 때가 있었다. “할머니, 무서워. 오늘은 가지 마”라며 조르는 나를 데리고 할머니는 새벽기도를 가셨다.
새벽예배 때 나는 할머니 옆에 누워 잠결에 성도들의 기도 소리를 들었다. 기도 소리는 예배당이란 공간에서 증폭돼 천사의 소리처럼 내 귓가에 들어왔다. 모두 가난하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만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성도들은 모두 예배당 바닥을 눈물로 적시며 교회를 위한 기도, 나라를 위한 기도를 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런 전통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새벽기도가 끝나면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운 김용기 장로님이 농군학교 학생들과 함께 달렸다. 이때 외쳤던 구호가 ‘개척정신’이다. 그 당시 우리 민족이 얼마나 힘들고 가난하게 살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우리는 열심히 달려왔다. 그때 어린 내 가슴에 새겨진 단어가 ‘개척정신’이다.
김 장로님에 대해 기억나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김 장로님은 가을이면 첫 과일을 잘 거둬서 할머니께 가져왔다. 그리고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며 “전도사님이 기도해 주셔서 올해도 풍년이 들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면 할머니는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드렸다. 비록 여전도사였지만 목회자에 대한 장로님의 존경과 사랑의 표현이었던 듯싶다.
김 장로님이 가시고 나면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장로님의 사랑 때문에 산다”고 했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지만, 지금은 이해가 된다. 목회자와 장로 사이에 사랑과 존경이 있는 아름다운 관계가 그리워진다.
아버지가 사역하신 가나안고아원은 가나안농군학교 인근에 있었다. 어린 시절 고아원 아이들과 함께 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성탄절은 가장 신나는 날이었다. 미군 부대가 선물을 가지고 와 마당에 내려놓으면 나를 비롯한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선물을 주웠다. 고아원에 있었어도 나는 미제 공과 학용품을 쓰고 미제 사탕을 먹으며 자랐다.
1960년대 초기는 모두가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다. 전쟁고아도 많았고 굶어 죽는 사람도 있었다. 가나안농군학교가 있던 경기도 광주엔 벽돌공장이 많았다. 그곳의 흙이 점토질이었기 때문에 그 흙을 캐다가 벽돌로 구워냈다. 당시 가나안농군학교 주변은 개발되지 않은 야산인 데다 황무지였는데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가나안농군학교와 가나안교회, 가나안고아원 모두 기독교인들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믿음으로 헌신한 발자취다. 그리고 내가 어릴 적 성장한 환경이요, 내가 본 풍경이다. 나는 믿음으로 헌신하는 사람들, 찬송하고 기도하는 사람들, 사랑으로 서로 돌보는 사람들, 희생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역경의 열매] 김영걸 (5) 나는 교회의 아들… 교회는 내 인생 출발점이자 바탕
마을 주민 모두가 성도인 덕수리 교회
처음 만난 공동체이자 세상이고 사회
교회학교와 여러 행사들 통해 꿈 키워
김영걸(왼쪽 세 번째) 목사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경기도 양평 덕수리교회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가 6살 때 우리 가족은 경기도 광주를 떠나게 됐다. 가나안고아원 원목이던 아버지가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덕수리에 있는 덕수리교회에서 사역하게 되면서다. 할머니는 가나안교회에 남기로 했다.
덕수리로 이사하던 날이 생각난다. 당시 가나안고아원엔 지프차가 있었고 그 뒤에는 화물칸을 연결할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 화물칸에 우리 가족의 짐을 모두 싣고 출발했다. 손수레보다 고작 2~3배 큰 화물칸에 모든 짐을 다 실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단출한 전도사 가정의 살림이었는지 모른다.
우리 가족은 덕수리에 도착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살았다. 덕수리는 내 유년 시절 추억이 가장 많이 남은 곳이다.
덕수리는 단월면과 부안리 사이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입구에 있는 큰 느티나무는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그리고 그 옆에 덕수리교회가 있었다. 덕수리의 특징은 모든 마을 사람들이 교회에 나왔다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곧 교회 성도들이었다. 어릴 적에는 이런 상황이 당연한 줄 알았다. 동네 아무 집에 들어가도 집사님 댁이었다. 놀다가 배고프면 근처 집에 들어가 밥을 얻어먹을 정도였다.
마을 옆에는 하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무척 맑았다. 피라미처럼 1급수에서 살 수 있는 물고기를 쉽게 볼 수 있었다. 한여름에도 그 하천에 들어가면 너무 차가워 얼마 견디지 못했다. 그 맑은 덕수리 하천에서 여름에 옷을 벗고 친구들과 수영하며 놀던 시절이 생각난다.
덕수리에는 초등학교가 없어서 나는 마을에서 3㎞ 정도 떨어진 부안초등학교에 다녔다. 덕수리에 살던 친구들 모두 아침에 걸어서 학교에 갔다. 동네 아이들과 학교에서도 만나고 교회에서도 만났다. 그 친구들과 얼마나 정이 들었는지 지금도 당시 친구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태석이 종순이 상애 옥분이 모두 집사와 권사가 되고 또 장로의 부인이 돼 교회를 잘 섬기고 있다.
덕수리교회 여름성경학교와 성탄절은 아이들에게 가장 큰 행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골교회에서 대단한 행사를 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름성경학교에 참가해 ‘흰 구름 뭉개 뭉개 피는 하늘에’라는 찬양을 얼마나 힘차게 불렀는지 모른다. 그 시절 여름성경학교를 할 때마다 하늘에 진짜 흰 구름이 뭉개 뭉개 폈다. 가끔 서울 교회 성도들이 이곳으로 봉사하러 올 때도 있었다. 그럴 땐 더 신이 났다. 나는 어릴 적부터 교회학교와 여름성경학교를 통해 꿈을 키워왔던 것이다.
성탄절 역시 손꼽아 기다리던 교회 행사였다. 그중에서도 새벽송이 가장 즐거웠다. 어른들과 눈길을 헤치고 집집마다 방문해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부르곤 했다.
교회는 내 인생에서 처음 만난 공동체이자 세상이고 사회였다. 나는 교회에서 사랑과 섬김을 배웠다. 교회가 세상 전부인 줄 알았고, 세상 모든 사람이 교회 성도들처럼 선하게 살아가는 줄 알았다.
교회를 빼놓고는 내 인생과 삶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교회는 나에게 부모와도 같은 곳이었고 나는 교회의 아들이었다. 교회는 내 인생의 출발점이자 바탕이 됐다.
***[역경의 열매] 김영걸 (6) 아버지 사역 따라 서울 전학… 성적 떨어지고 친구들 놀림감
소아마비 치료 잘 받았지만 후유증으로
다리 약해 잘 넘어져 ‘고무다리’라 놀려
고교 시절엔 신앙부장 맡아 찬송 인도
김영걸 목사는 학창시절 방황할 때도 부모님의 기도 덕에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 김충효(왼쪽 세 번째) 목사가 집에서도 정장을 갖춰 입고 가정예배를 인도하는 모습. 왼쪽 두 번째가 김영걸 목사.
나는 1970년 서울로 전학을 갔다. 아버지가 서울 피어선성경학교 교무처장으로 근무하게 됐기 때문이다. 교회와 부모의 품 안에만 있던 나는 이때부터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당시 아버지가 사역하던 덕수리교회 사임 절차가 늦어지면서 부모님은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 초 나와 누나를 서울 이모 집에 보냈다. 이모 집에서 4학년 1학기를 다니게 된 나를 이모와 사촌 형제들이 참 잘 대해줬다. 지금도 고마운 마음이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이모부는 의사셨는데 중풍으로 쓰러지신 후 이모가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이모 집에도 자녀가 6명이나 있었다. 거기에 누나와 나, 두 명이 얹혀살게 된 것이다. 그러니 공부할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았다. 나는 덕수리에서 늘 전교 1~2등을 다퉜는데 서울에 와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가 2살 때 앓았던 소아마비 후유증은 서울 친구들의 놀림감이 됐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다시피 당시 나는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잘 받아 다리가 휘지 않았고 목발을 짚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다리가 너무 약해서 제대로 달릴 수 없었고 아이들과 놀다가도 쉽게 넘어졌다. 걸어 다닐 때도 약간씩 절뚝였다.
얼마나 많이 넘어졌는지 무릎이 성한 날이 없어서 늘 ‘빨간 약’을 무릎에 바르고 다녔다. 친구들과 뛰어놀다가 넘어지면 이유를 잘 모르는 아이들이 ‘고무다리’라고 놀리기 일쑤였다. 달리기를 못 하니 나를 놀리고 도망가는 아이를 잡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체육 시간이 가장 싫었다. 체력장에서 달리기를 하면 항상 꼴찌였고 자연스럽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내성적인 성격을 갖게 됐다. 당시엔 소극적이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아버지는 피어선학교를 사임하고 경북 안동 경안성서신학교 교무처장으로 가게 됐다. 부모님이 안동으로 가면서 나는 이번엔 외삼촌인 조기흥 장로님 댁에 맡겨졌다. 부모님은 온 가족이 안동에서 생활하기엔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하셨다. 또 내가 학창 시절을 서울에서 보내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외삼촌 댁에서 고등학교 3년을 보냈다. 외삼촌은 배울 점이 많은 분이셨다. 피어선재단 사무국장으로 계시면서 후에 피어선신학교를 평택으로 이전시키고 지금의 평택대를 설립하셨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신앙부장을 맡았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앞에 나가서 찬송을 인도한 뒤 성경을 읽고 기도했다. 목사처럼 아침 경건회를 인도한 것이다. 이때 같은 반 친구가 정훈 여수여천교회 목사(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서기)다. 지금도 정 목사는 나에게 “김 목사는 그때부터 목사 같았어”라고 말하곤 한다.
겉으론 제법 목회자 같았지만, 부모의 품을 떠나 서울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면서 나는 많은 방황을 했다. 붙잡아줄 부모가 옆에 없으니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남모르게 눈물도 많이 흘렸다.
***[역경의 열매] 김영걸 (7) 청소년기 방황 거듭하며 ‘목사의 꿈’ 버리기로 결심
어릴 때 꿈은 늘 목사 되는 것이었지만
소아마비로 친구들 놀림과 생활고에서
못 벗어나는 가정형편 보며 진로 변경
김영걸(왼쪽 두 번째) 목사가 1994년 가족들과 함께 할머니 안초순 전도사가 사역하던 경기도 광주 가나안교회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할머니는 김 목사가 목회자의 길을 가도록 늘 기도하셨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목사가 되라는 할머니 말씀을 듣고 자랐다. 그래서 가정예배를 드리거나 식사 전 기도할 때면 “하나님, 훌륭한 목사가 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했다. 이렇게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할머니는 그때마다 다시 기도하도록 했다. 목사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가 입에 배는 바람에 교회에서 대표 기도할 때도 “훌륭한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뻔한 적도 있었다.
상황이 이러니 저절로 내 어린 시절 꿈은 커서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교회에서 설교하는 목사님을 볼 때마다 ‘나도 커서 저 강단에서 설교하겠지’라고 생각하거나 ‘나는 어떻게 설교를 할까’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러다 청소년기 방황을 거듭하면서 마음속으로 목사가 되지 말아야겠다고 결단했다. 소아마비로 놀림을 당하면서 점점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목사 되겠다고 결심한 나를 소아마비에 걸리게 하셨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결국 하나님 뜻대로 살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됐다.
목사가 되기 싫은 이유는 또 있었다. 할머니는 전도사, 아버지는 목사인 가정에서 성장하다 보니 목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아버지는 늘 이런저런 일들로 마음고생 하셨고 어머니는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래서 나는 “사람 눈치 보면서 살지 말아야지. 돈을 많이 벌어서 부모님을 편하게 해 드려야겠다”라거나 “이렇게 가난하고 이사를 많이 다녀야 하는 목사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여러 차례 생각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문과가 아닌 이과를 선택했다. 어릴 적부터 목사를 목표로 기도해 왔던지라 혹시라도 마음이 약해질 수 있으니 철저하게 목사가 되지 않는 길을 가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마음속으로는 방황을 했어도 교회 생활은 늘 충실하게 했다. 신앙이 바닥을 쳐도 겉으로는 교회에 열심히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저 습관적이었다. 어릴 적부터 철저한 신앙훈련을 받았기에 주일에 교회를 가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당시 나를 품어준 교회와 목사님, 교회학교 선생님 덕에 학창 시절 방황하던 나는 크게 엇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임지를 여러 번 옮기셨기에 나는 이사를 하면서 정말 많은 교회를 거쳤다. 서울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금호교회에 출석했다. 당시 초등부 담임선생님이 집으로 심방을 온 기억도 난다.
중학교 시절 다닌 교회는 광석교회다. 당시 담임목사님이 김영수 목사님이었고 중·고등부를 지도한 목사님이 안기학 목사님이다. 그리고 같은 반 친구가 이상길 장로다. 이 장로는 지금도 광석교회를 섬기고 있다. 광석교회에서 중·고등부 시절 참여했던 여러 행사도 기억이 나고 목사님의 믿음직한 인도와 선생님들의 열정적인 사역도 눈앞에 선하다.
경북 안동에 계시던 아버지는 이후 충남 아산 온양제일교회에 부임하셨다. 나는 방학 때면 아산에 내려가 온양제일교회를 섬기다가 개학하면 다시 서울로 오곤 했다. 누나는 온양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지금의 매형을 만났다. 그 후 누나 가족은 천안에 정착했다. 매형은 김갑길 천안중앙교회 은퇴 장로고 누나는 김성애 권사다.
***[역경의 열매] 김영걸 (8) “하나님 저는 어떤 길로 걸어가야 합니까”
목사 되기 싫어 지질과학 전공 했지만
4학년 되자 인생의 진로 깊이 고민하다
성경 안에서 주의 종으로 부르심 깨달아
김영걸 목사가 199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 서울동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눈물을 닦고 있다. 목사 되기를 거부하던 김 목사는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 소명을 받았다.
아버지가 온양제일교회에서 사역하실 때 할머니는 가나안교회를 사임하시고 온양으로 오셨다. 당시 할머니는 위암 투병 중이셨다. 몸이 약해지셨는데도 늘 가정예배를 인도하시고 기도에 정진했다. 성도들은 할머니의 기도를 받으러 사택에 드나들었다.
할머니는 1978년 2월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다. 너무 슬펐고 할머니가 기도하신 대로 살지 못한 내가 너무 미웠다. 그때 나는 영적으로 방황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손자가 목사로 사역하기를 바라며 평생 기도해 오셨다. 그런데 내가 목사가 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자 희망을 잃고 돌아가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내 신앙의 방황은 계속됐다. 절대로 목사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학창 시절 부모의 품을 떠나 홀로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공부에 큰 뜻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곧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재수를 하게 됐다. 재수할 때도 목사가 되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면서 교회 생활은 열심히 했다. 봉사하고 섬기는 것에 보람을 느꼈다. 교회에 잘 나온다고 신앙이 다 좋은 건 아니라는 걸 나는 청소년 시기에 일찍이 알았다.
나는 81년 충남대 이과대학 지질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에는 전공과목을 열심히 공부해서 관련 업계에 취직할 생각도 했다. 덕분에 대학에 가서는 열심히 공부했다. 대학 시절 공부하면서 과학자가 학문에 임하는 진지한 모습을 배웠고 과학이라는 학문의 엄청난 크기와 깊이를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
대학교 4학년이 되자 내 인생의 진로를 결정해야 할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부터 내 깊은 마음속에서 “하나님 저는 어떤 길로 걸어가야 합니까”라는 기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어떨 때는 “저는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라는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과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려는 마음이 싸웠다. 인생의 답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몰랐다. 그때 내가 선택한 방법이 성경이었다.
사실 나는 성경을 제법 열심히 읽어왔다. 중학생 시절에도 가방 속에 성경을 넣고 다니면서 읽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학교에서 신앙부장을 하면서 성경을 자주 읽었다. 대학 때도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저 성경을 열심히 읽기만 했다. 그러다 성경에 다른 마음가짐을 갖게 된 건 인생의 갈림길인 4학년이 돼서다.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깊이 있게 묵상하며 읽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때 내 선택은 하나님의 은혜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
성경을 읽으면서 나는 새롭게 거듭났다. 막다른 인생의 골목에서 진로를 앞에 두고 읽어 내려갔던 성경은 내게 답을 줬다. 어릴 적부터 목사가 되겠다는 기도가 쌓여있던 내 마음속에 다시 하나님이 찾아오셨다.
성경을 읽으면서 나를 주의 종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을 경험하게 됐다.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동안 내 생각을 앞세워 달려왔던 인생을 다 내려놓기로 했다. 하나님 앞에 완전히 굴복하고 순종하기로 눈물로 다짐한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영걸 (9) 세상과 단절한 채 장신대 신대원 목표로 입시 준비
졸업 후 바로 시험 치려다 원서 마감 돼
1년간 TV·신문 끊고 독서실서 성경공부
하나님과 교제하며 주의 종 되겠다 맹세
김영걸(원 안) 목사가 장신대 신대원 시절 경기도 남양주 천마산 기도원에서 열린 사경회에 참석해 기도하고 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 신학대학원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미 대학교 4학년 때 졸업학점을 다 이수해 ‘서양철학사’나 ‘사회계층과 계급론’ 등 전공이 아닌 과목을 수강 신청해서 들었다. 신학의 기초가 되는 학문을 듣고 싶어서였다.
철학과나 사회학과 학생들이 수업에 들어오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훗날 여성가족부 장관을 맡게 되는 장하진 사회학과 교수님께서 “이과대학 학생이 왜 사회학과 수업을 듣느냐”고 물었을 때 “신학을 하려고 하는데 사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서 공부하고 있다”고 대답했던 기억도 난다.
대학 졸업 후 장신대 신대원 시험을 보려고 했는데 이미 원서 접수가 마감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에는 신대원에 대한 정보를 목사님이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알기 힘든 시절이었다. 어쩔 수 없이 1년을 기다려야 했다.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광야 훈련’ 시키셨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간을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며 보냈기 때문이다.
그 1년간 나는 친구도 만나지 않았고 신문이나 TV 등 모든 세상의 소식을 끊었다. 오전 5시에 일어나면 바로 독서실로 달려갔고 저녁 9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독서실에서 나는 성경을 다 내 영혼 속에 집어넣을 기세로 읽었다. 신대원 입시 조건에 맞춰 영어와 상식도 준비했다. 기도도 빼놓지 않았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때가 내 인생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 대학 졸업 후 늦은 나이에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내가 패배자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 그 1년은 가장 기쁜 시간이었다. 매일 성경 보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했고 신대원에 진학해서 주의 종이 되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에 분명한 목표를 세우니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었다.
세상과 단절한 채 1년을 보내니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는 듯했다. 영적으로 충만한 시절이었다.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이 나를 보고 웃고 계셨다. 인생에 두려울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며 준비해서 다음 해 다시 장신대 신대원에 응시했다. 준비를 많이 했지만, 고사장에 들어가니 떨리고 긴장됐다. 그해 시험은 어려웠고 주변의 응시생들은 모두 나보다 실력이 뛰어나 보였다. 시험이 끝나고 고사장을 나오면서 한편으론 낙심이 됐지만 다른 한편으론 “불합격이 된다 해도 다시 잘 준비해서 입학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당시에는 합격자 발표를 보려면 학교로 직접 가야 했다. 합격자 발표 날 신대원을 찾아가 내 이름이 합격자 명단에 있는 걸 확인했다. “드디어 신대원에 입학하는구나, 내가 목사의 길로 접어들었구나”하는 기쁨과 동시에 나를 위해 평생 기도해주시던 할머니 생각이 났다. 할머니가 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눈물이 흘렀다.
합격을 확인한 그 날 밤 집에서 가족 예배를 드렸다. 아버지는 목이 멘 채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셨다.
1987년 신대원에 입학하고 보니 훌륭한 동기와 선후배들이 참 많았다. 그들과 함께 보낸 신대원 3년은 내 인생 중 가장 흥분되는 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영걸 (10) 교육전도사로 휘경교회 섬기며 ‘마음만은 담임목사’
성경학교에 흥미 잃은 고학년들 보며
교회 최초로 캠프 형식 성경학교 진행
준비는 힘들었지만 주님 큰 은혜 받아
김영걸 목사가 휘경교회 교육전도사 시절 서울 동대문구 교회에서 초등부 아이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다.
나는 신학대학원 입학이 확정된 후 서울 동대문구 위생병원 옆에 있는 휘경교회를 교육전도사로 섬기게 됐다. 초등학생 4~6학년을 맡았는데 당시 출석하는 아이들은 100여명 정도 됐다. 2년 동안 아이들을 열심히 섬기다 보니 나중에는 아이들이 150명 가까이 모였다.
교육전도사 1년 차일 때는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모든 것이 서툴렀다. 2년 차가 되자 뭔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2년 차 때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면서 기도해 보니 초등학교 5~6학년에게는 여름성경학교의 영향력이 잘 통하지 않았다. 이미 그 아이들은 비슷한 여름성경학교를 대여섯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교회가 아닌 야외에서 캠프 형식으로 여름성경학교를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초등부 교사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선생님, 비슷한 프로그램으로 진행하는 여름성경학교는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에게는 흥미가 떨어집니다. 새로운 내용으로 아이들을 인도해야 합니다”라며 교사들을 설득했다.
교회로서도 안전이나 예산 등 여러 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끈질긴 설득 끝에 초등부 부장 선생님 및 교사들과 함께 서울 근교를 돌아다니며 좋은 장소를 찾아냈다. 그리고 휘경교회 교회학교 최초로 캠프 형식의 여름성경학교를 진행하게 됐다.
처음 하는 캠프라 신경 쓸 일은 한 둘이 아니었다. 봉사팀도 꾸려야 했고 교사들에게 사명도 불어넣어야 했다.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나는 한 달 동안 교회에 매일 출근했다. 비록 교육전도사였지만 마음만큼은 담임목회자 못지않았다.
2박 3일 동안 캠프는 마치 톱니바퀴 돌아가듯이 진행됐다. 캠프 마지막 날 예배 시간이었다. 설교가 끝난 후 부장 선생님이 사회를 보러 강단에 올라와야 하는데 올라오지 않았다. 부장 선생님을 찾아보니 얼굴을 숙이고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도 울고 함께 수고한 선생님들도 울고 말았다.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려고 심혈을 기울인 캠프였기에 준비한 모두가 눈물이 났던 것 같다.
신대원 수업을 들으러 갈 때는 걸음마다 기도하며 걸었다. 교문에 들어설 때마다 울컥하며 눈물이 나왔다. 이 교문을 들어선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 마음도 나와 같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교회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내가 신대원에 입학한 1987년 6월 민주화 대행진이 일어났다. 학교는 이미 4월부터 어수선했다. 학교 광장에서는 호헌철폐 직선개헌을 외치는 광장 기도회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수업은 계속됐다.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신대원에서는 학문만 잘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어떤 신학적 입장과 교회론을 가져야 할지 신학적 고민이 심해졌다. ‘나는 어떤 목회자의 길을 걸어야 할까’라는 생각이 깊어졌다. 그동안 내가 한 갈등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신대원 3년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는 목회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영걸 (11) 목회 인생 출발지 휘경교회… 10년 섬긴 마음 속 고향
신대원 졸업 앞두고 진로 결정할 시기
다른 교회서 새로운 도전하려 했지만
담임 목사 권면에 전임으로 사역 시작
김영걸(왼쪽) 목사가 휘경교회 부목사 시절 임은미(오른쪽) 사모, 아들 윤찬이와 함께 서울 동대문구 신혼집 앞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신학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결정해야 할 때가 됐다. 처음에 나는 가난한 자의 이웃이 되셨던 예수님처럼 작고 어려운 교회를 섬겨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 방향성을 기초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의 삶을 어떻게 바쳐야 할지’ 고민을 거듭했다.
당시 젊은 신학도의 눈에 비친 한국교회는 교권주의와 물량주의에 깊이 빠져 회생할 수 없어 보였다. 한국교회와 내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었다. 3학년이 되면서 나는 매일 밤 11시 집 앞에 있는 교회를 찾아가 1시간씩 통성으로 기도했다. 그때는 통성으로 기도해도 힘들지 않았고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면 기도하다가도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3학년이 절반쯤 지났을 때 나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은 그동안 내가 기존 정통교회에서 사랑받고 성장한 만큼 정통교회를 잘 섬기고 더 올바르게 만들라고 하셨다.
그러던 중 교육전도사로 있던 휘경교회 한정원 목사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김 전도사, 다른 곳에 갈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계속 있어. 나와 전임으로 함께 일하자”고 하셨다. 사실 나는 다른 교회에서 새로운 도전도 하고 싶었는데 목사님이 그동안의 내 사역을 인정해주신 것 같아 기쁘기도 했다. 그래서 목사님 권면에 순종해 휘경교회에서 전임전도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나는 휘경교회에서 목사 안수도 받고 선임 부목사까지 하면서 10년 동안 이곳을 섬겼다. 휘경교회 시절 결혼도 했고 아들과 딸도 낳았다. 내 목회 인생의 출발지가 휘경교회였던 것이다. 지금도 휘경교회는 마음속 고향과 같다.
전임전도사 생활을 시작했을 때 담임목사님은 구역 가정들의 숟가락 숫자까지 다 알고 있으라고 하셨다. 숟가락 숫자까진 아니더라도 남편 아내 자녀 등 구역 가족들의 이름은 다 외웠다. 새벽기도 때 눈을 감고 기도하면 구역장뿐 아니라 구역원들의 이름도 입에서 줄줄 나왔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월요일 저녁 교회에서 창밖을 내다보는데 한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니 내가 맡은 구역에서 불이 난 것이었다. 얼른 뛰어나가 살펴보니 한 집사님 댁이었다. 소방차는 아직 오지 않았고 불이 집안을 삼키고 있었다. 내가 맡은 성도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마음속에서 올라오면서 정신없이 물동이를 날라 불을 껐다. 당시 내 눈에는 불이 성도의 가정을 삼키는 마귀처럼 보였다. 결국 집은 전소됐고 그 집사님 가족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셨지만, 후에도 계속 그분들을 신경 써서 살폈던 기억이 난다.
어릴 적부터 꿈꾸던 목사의 길을 돌고 돌아 찾아왔지만, 교회를 섬기는 건 기쁘고 행복했다. 교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사명감으로 헌신했고 교인들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했다. 한 번은 여덟 가정을 심방하고 파김치가 돼 저녁 9시가 넘어 돌아온 적도 있었다. 혼자 심방 가방을 들고 밤늦게 터벅터벅 돌아오는 발걸음이었지만 마음은 행복했다. 나는 교회를 섬기라고 이 세상에 온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내가 가는 목사의 길이 보람되고 감사하다.
***[역경의 열매] 김영걸 (12) 숨 넘어갈 것 같은 아이 붙들고 “하나님 살려만 주세요”
깜박 조는 동안 2층 창문서 아이 추락
머리 금 갔지만 기적적으로 출혈 없어
40도 열 혼수상태 견디고 무사히 퇴원
김영걸(오른쪽) 목사가 휘경교회 부교역자 시절인 1989년 서울 중구 남대문교회에서 임은미 사모와 결혼식을 올리고 있다.
나는 20대 중반부터 30대 중반까지 10여년간 휘경교회에서 보냈다. 전통적인 교회였고 신실하고 좋은 분들이 모인 교회였다. 한정원 담임목사님은 자상하고 세심하게 교회 일을 돌보시던 분이었다. 그러면서 부교역자들과도 격의 없이 함께 어울리셨다. 목회 초년병인 나에게 목회의 기본을 가르쳐주신 한 목사님을 지금도 목회 스승으로 존경하고 있다.
휘경교회 부교역자로 섬길 때 교회가 부흥하면서 주일에 두 번 드리던 예배가 세 번으로 늘어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교회가 부흥해 한 번의 예배를 더 드리게 됐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예배를 늘려도 공간이 모자라 간이의자를 통로에 설치하는 게 일이었다. 교회가 부흥한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훗날 한 목사님은 “김영걸 목사가 부목사로 있을 때 교회가 가장 부흥했다. 그때가 좋았다”는 말씀을 하셨다.
어느 날 심방을 끝내고 집에서 점심을 먹는데 아내가 설거지하는 동안 아이를 봐 달라고 했다. 두 아이와 놀다가 식곤증 때문에 깜박 잠이 들었다. 떠들썩한 소리에 눈을 떠보니 첫째 아이가 창틀에 위험하게 올라가 있었다. 창 앞에 놓인 책상과 의자를 발판삼아 올라간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 급히 일어나 첫째를 낚아채고 나니 둘째가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라 창밖을 내려다보니 둘째가 창밖으로 떨어져 시멘트 바닥에 누워있었다. 그때 우리 집은 2층이었고 높이로는 2.5층 정도였다.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급히 아래로 내려가 쓰러진 둘째를 살펴보니 아이는 축 늘어져 있었고 입에서는 거품을 내고 있었다. 이때 둘째는 17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가까운 병원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는 내내 다리가 후들거렸다. 의사가 아이의 상태를 보더니 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다시 근방에 있는 경희의료원으로 차를 몰고 달려갔다. 아이가 차 안에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차 안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살려만 주세요. 불구가 돼도 좋습니다. 살려만 주시면 잘 키우겠습니다.” 경희의료원에 입원을 시키고 밤새 아이의 상태를 지켜봤다. 아이는 열이 40도까지 오르며 혼수상태에 빠졌다. 아내는 울면서 열이 내리도록 아이의 몸을 밤새 닦았다. 새벽이 되니 아이는 조금씩 안정되고 열이 내리기 시작했다.
엑스레이를 보니 아이의 머리에 금이 가 있었다. 머리가 깨진 것이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내부 출혈이 없었다. 그 후로 아이는 병원에서 치료를 잘 받고 건강하게 퇴원했다. 음악에 재능이 있어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고 지금은 미국에서 아이도 낳고 잘살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휘경교회에서 사역을 마치고 나는 담임목사를 빨리하고 싶었다. 그런데 한 목사님이 부르시더니 “김 목사는 다른 교회 담임으로 가는 것보다 큰 교회에서 부교역자 훈련을 한 번 더 받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한 교회에서만 교역자 생활을 하다가 담임으로 나가면 여러 가지로 부족했을 것 같다. 1996년 한 목사님 말씀에 순종해 두 번째 부교역자 사역을 하게 된 곳은 서울 종로구 연동교회였다.
***[역경의 열매] 김영걸 (13) 소망하던 담임목사로 부임… 할머니와 아버지의 길 이어
연동교회의 이성희 목사님 목회 도우며
부교역자로 인생의 소중한 경험 쌓은 후
대구중앙교회 부임, 사랑으로 성도 목양
김영걸(왼쪽 세 번째) 목사가 2000년 연동교회를 떠나면서 서울 종로구 교회에서 이성희(왼쪽 두 번째) 목사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나는 연동교회에서 내 인생의 귀한 스승을 만났다. 바로 이성희 목사님이다. 당시 이성희 목사님은 ‘미래목회 미래사회’ ‘미래목회 대예언’이라는 책으로 한국교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연동교회는 역사가 오래된 교회이긴 하나 도심 공동화 현상으로 교회 인근에서 예배에 출석하는 분들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생존전략을 새롭게 연구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하면 세상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끼치며 미래를 열어가는 교회가 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이 목사님의 모습을 옆에서 보고 많이 배웠다.
연동교회는 논의가 이뤄지는 과정이 성숙한 교회였고 훗날 내 목회 방향을 설정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후에 이 목사님이 교단 총회장이 됐을 때는 함께 임원으로 섬기면서 한국교회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도 키울 수 있었다. 연동교회 부교역자로 이 목사님을 도운 건 내 인생에 소중한 경험이 됐다.
부목사로 교회를 섬기면서 기도해 온 것이 있었다. “하나님 늦어도 40세가 되는 해, 2000년에는 담임목사로 나가고 싶습니다. 더 늦으면 안 됩니다”라는 기도를 드렸다. 이유는 단순했다. 2000년은 아버지가 70세가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은퇴하실 때 담임목사가 돼 효도하고 싶었다. 이 기도를 3년 정도 열심히 하다가 긴급한 기도 제목이 아닌지라 자연스럽게 잊고 있었는데 2000년 3월 대구중앙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됐다. ‘하나님은 내가 잊고 있었을지라도 나의 기도를 기억하고 계시는구나’하고 놀랐다.
대구중앙교회는 예장통합과 합동이 나눠질 때인 1960년부터 40년 동안 교단 소속 없이 초교파로 이어져 오던 교회였다. 과거에는 대구제일교회와 함께 대구에서 가장 큰 교회 중 하나였다. 대구행 기차에 온 가족이 올랐을 때 아버지는 서울역 기차 안까지 들어오셔서 담임목사를 시작하는 아들을 배웅해 주셨다. 가는 내내 “나도 할머니와 아버지 길을 따라 담임 목회자의 길을 시작하는구나. 할머니와 부모님 기도에 응답받는 좋은 목회자가 돼야겠다”는 결심을 수없이 마음에 되새겼다.
대구중앙교회는 역사도 깊고 좋은 성도들이 많이 있는 훌륭한 교회였다. 작은 연동교회라 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내가 부임한 후 교회가 예장통합에 가입하기도 했다. 처음 담임목사로 섬기게 된 교회였기에 첫사랑을 주듯 마음을 흠뻑 주면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랑으로 성도들을 목양했다.
그러던 중 2003년 포항동부교회에서 청빙 요청이 왔다. 담임목사가 교회를 옮긴다는 건 보통 어려운 결단이 아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교회가 어느 교회인지, 내가 가진 은사와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교회가 어디일지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도 끝에 나는 포항동부교회의 청빙 요청을 받아들여 임지를 옮기기로 했다. 이사하던 날 대구중앙교회 성도들이 버스를 타고 포항까지 따라왔다. 담임 목사가 정든 교회를 떠나는 것이 이렇게 힘든지 미처 몰랐다. 그래서 포항동부교회에 부임하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담임목사로서 성도들을 마음껏 사랑하고 섬겨야겠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교회를 끝까지 섬기며 달려가자.”
***[역경의 열매] 김영걸 (14) 포항동부교회 부임… 성전 건축의 길 열어주신 하나님
성도 늘어나 교회 부지 급하게 매입하고
공동의회 통해 성전 이전 가능해졌지만
돌아선 성도들 마음 달래며 기다리던 중
김영걸 목사 부임 초기 포항동부교회 성도들이 경북 포항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모든 성도를 수용하기 힘들 정도로 예배당이 좁아 김 목사는 교회 이전을 준비하게 됐다.
2003년 포항동부교회에 부임했던 때가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포항동부교회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고 전임 목사님은 교회의 바탕을 잘 세운 뒤 은퇴하셨다. 이것만 해도 나는 참 복 있는 목회자라는 생각이 든다.
성도들은 젊은 목사가 왔다고 좋아하고 들떠 있었다. 성도 가정을 심방하면서 성도들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대각성 전도 운동도 열심히 진행해 많은 새 신자가 교회로 몰려들었다. 전교인 새벽기도 운동을 전개해 기도를 목회 동력으로 삼았고 찬양단을 창단해 예배를 역동적으로 이끌어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안에서 예배당 리모델링 이야기가 나오다가 신축, 나아가 교회 부지 이전으로까지 논의가 확대되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큰 과제들이었다. 교회가 포항 전체를 품기 위해 좀 더 좋은 위치로 가는 게 발전적이라는 생각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교회를 이전하기에 알맞은 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당회 논의를 거쳐 교회 부지를 급하게 매입했다. 이제 공동의회를 통해 교인 전체의 결의를 거치는 일만 남아 있었다.
공동의회를 열던 날 성도들이 자리를 가득 채우고 앉아 있었다. 평소에는 공동의회에 소수의 성도만 참석했다. 그런데 예배당 1층과 2층에 교인들이 가득 차 있었다. 공동의회를 시작하자 교회 이전에 대한 반대 의견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2시간 넘게 토의를 진행하고 투표를 한 끝에 불과 20표 차이로 성전 이전이 통과됐다. 법적으로는 이전이 가능해졌지만 성도들의 갈라진 마음을 확인하게 됐다.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가는 게 급선무였다. 집집마다 심방하면서 성도들을 만났지만 이미 이전을 추진할 힘은 상실하고 말았다. 그 이후 나는 이전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고 기도하면서 기다렸다. 마음속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겠구나’하는 생각까지 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선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기도하며 1년쯤 지났을 때 어떤 분이 교회를 찾아왔다. 교회가 사 놓은 땅 인근에서 아파트 공사를 시작하는데 우리 부지가 중간에 끼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파트 시행사 측에서 그 땅을 교회가 구입한 가격의 2배로 사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우리는 그 자리에 교회를 건축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팔 생각이 없었다. 다급해진 시행사는 다른 곳에 5만㎡(약 1만5000평) 땅을 구입해 교회가 사놓은 땅과 바꾸자고 했다. 우리 능력으로는 사기 힘든 더 좋은 부지였다. 생각하지도 않은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장로님도 성도들도 기뻐하며 부지를 바꾸기로 했다.
나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직장 생활을 하거나 월급을 받아본 적도 없다. 성실하게 교회를 섬기면서 건강한 교회를 세워나가는 게 평범한 꿈이었기에 목회만 할 줄 알았지 땅을 어떻게 사고파는지, 계약서는 어떻게 쓰는 것인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평생 꿈도 꾸지 않았던 성전 건축의 길을 열어주셨다. 건축 문제를 비롯해 내가 목회하는 중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마음을 함께 해주고 앞장서 도와준 장로님들이 너무 고맙다.
***[역경의 열매] 김영걸 (15) 하나님 은혜와 성도들 기도로 세워진 포항동부교회
성전 건축 잘하기 위해 85개 교회 탐방
성도들 힘 모아 건축 헌금해 재정 마련
건축 과정에 진통 겪었지만 기도로 극복
김영걸(나무 십자가 앞) 목사가 새 예배당 건축 중 공사 현장 옆에 임시로 마련한 기도처에서 교회 장로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포항동부교회는 내 인생의 큰 자랑이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살전 2:19)라고 한 것처럼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자신 있게 포항동부교회라고 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전건축의 길이 열렸다. 포항 입구에 5만㎡(약 1만5000평)의 산지를 얻게 되면서 모든 장로님과 성도들이 건축을 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내가 잘한 것이 있다면 급하게 추진하지 않고 기도하며 성도들의 마음을 헤아렸던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이 선하게 보신 것 같다.
성전을 잘 건축하기 위해 여러 교회를 탐방하기 시작했다. 조금의 실수도 없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교회를 지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장로님 권사님 안수집사님들과 전국을 다니며 교회를 어떻게 지었는지 공부하기 시작했다. 세어보니 방문한 교회 숫자가 85개나 됐다. 탐방한 교회마다 너무 부러웠다. ‘우리도 저렇게 좋은 교회를 세워야겠다’하고 수없이 다짐했다.
마침내 교회 조감도를 결정해야 할 때가 됐다. 성도들에게 3개의 작품을 공개하고 투표로 결정하게 했다. 조감도가 정해진 날, 모든 성도가 기뻐하고 만족했다.
성전 건축을 위해서는 재정 마련도 중요했다. 성도들이 있는 힘을 다해 건축 헌금에 동참했는데 순조로울 것 같던 과정에 어려움이 생겼다. 교회 시설 몇 가지를 추가하게 되면서 건축비가 늘어난 것이다.
건축 현장 옆에 기도처를 설치하고 모든 성도가 돌아가면서 건축을 놓고 기도했다. 공사가 중간쯤 진행됐을 때는 현장 바닥에서 전 교인과 기도회를 열었다.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기도회를 진행하려는데 나이 많은 권사님들이 찬송을 부르기도 전에 눈물을 흘리며 통성으로 기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모습에 그날 나와 모든 성도는 시작부터 끝까지 울면서 기도회를 했다.
건축을 하면서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 마음을 아무에게도 터놓을 수 없었다. 교회에서 새벽기도가 끝나면 아내와 함께 공사현장에 와서 기도했다. 낮에 심방한 후에도, 저녁에 일정을 마무리한 후에도 현장 곳곳을 살펴보며 기도했다. 어느 날은 마음이 너무 힘들어 건축현장에 앉아 선배와 동료 목회자들에게 전화하며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이렇게 기도하다 보니 어느새 교회가 다 세워지고 입당을 하게 됐다. 그때 깨달은 것이 있었다. “교회는 물질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구나. 교회는 기도로 세워지는 것이구나.”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주셔서 기도로 새 예배당 입당을 준비하게 하신 것 같다.
교회 건축을 마무리하고 보니 한마음으로 함께 사명을 감당해준 당회와 건축위원회에 참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건축 전 여러 교회 탐방을 했을 때 잘못하면 담임목사가 쫓겨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힘든 과정이기에 교회 전체의 갈등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당회와 건축위원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지금 생각해도 하나님의 은혜다.
새로 지은 포항동부교회는 지하 2층, 지상 6층으로 당시 포항에서 단일 건물로는 가장 컸다. 2011년 교회를 완공해 입당했을 때가 내 나이 51세였다.
***[역경의 열매] 김영걸 (16·끝) 위기 겪고 있는 한국교회, 정도·정직 목회로 이겨내야
코로나19 3년 동안 대면 예배 회복 안 돼
이 위기를 교회 다시 깨우는 기회로 삼고
말씀 깊이 신뢰하고 열정적으로 기도를…
포항동부교회 성도들이 2011년 경북 포항의 교회에서 진행된 새 성전 입당예배에서 김영걸(오른쪽 단상위) 목사의 메시지를 듣고 있다.
요즘 들어 사람들이 나에게 인복이 있다고 말하곤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나는 믿음의 부모님을 만나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내 마음에 뿌리 깊게 내렸다. 지금도 눈을 감고 기도할 때면 어린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던 할머니 안초순 전도사님과 아버지 김충효 목사님, 그리고 어머니의 기도가 가슴에 흐르는 것을 느낀다.
또 포항동부교회에서 좋은 성도들을 만났다. 부족한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믿어주고 따라준 포항동부교회 장로님들과 모든 성도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다. 특히 교회건축이라는 큰 사명을 감당할 때 좋은 건축위원들의 협력과 충성이 있었다.
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실력이 중요하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기도가 중요하다고 한다. 설교나 관계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이 모든 게 다 목회에 중요한 요소들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직’이라고 생각한다. 멀리 보고 나아가야 하는 목회에서는 정직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부교역자들에게 늘 정직을 강조한다.
정직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만다. 때로는 눈앞에 손해가 있더라도 정직해야 한다. 먼저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하고 자기 자신에게도 정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도들에게도 정직해야 한다. 성도들이 마음속으로 ‘우리 목사님은 정직한 분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인정받아야 한다. 정도 목회, 정직한 목회의 길을 걸어가야 교회다운 교회가 세워진다.
한국교회는 지금 위기를 겪고 있다. 지난 3년 동안 코로나19를 거치면서 대면 예배가 회복되지 않고 있다. 작은 교회들은 존폐 기로에 놓였다. 이에 더해 세상의 가치는 혼란스럽게 급변하고 있다. 엄청난 문명의 도전 앞에 있는 것이다. ‘기독교 문명은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 교회는 새롭게 일어날 수 있을까.’ 어두운 고민과 위기감이 교회에 밀려오고 있다.
이런 위기는 교회를 깨우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한국교회는 본질을 다시 붙잡아야 한다. 말씀을 깊이 신뢰하고 초대교회처럼 열정적으로 기도하고 한 영혼을 천하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또 한국교회 위에 밀려오는 이념의 덫을 걷어내야 한다.
어느 때부턴가 피를 토하는 간절한 기도, 눈물을 쏟아내며 통회하는 자복기도, 자기를 희생하는 아낌없는 헌신, 교회를 위해 충성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는 교회가 왜 교회인지 알기 위해 말씀을 붙잡고 씨름해야 한다.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이 땅 위에 세워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민족의 희망이다.
되돌아보니 세월이 참 빠른 것 같다. 어느새 내 나이가 60대 중반이 됐다. 내 인생은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졌다. 나는 늘 하나님 앞에 질문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순종해야 합니까.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 제가 무엇을 남겨야 합니까.’
나는 하나님과 교회의 아들로 이 세상에 와서 하나님과 교회의 종으로 이 땅의 교회를 부흥시키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오늘도 하나님 교회를 위한 나의 길은 계속 진행된다.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다. “나는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