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아쉬운 / 송덕희
오랜만에 들른 고향 동네는 고즈넉했다. 비워 둔 지 35년이 지난 시골집에 잡풀만 무성하다. 둘러보는 발걸음이 무겁다. 골목을 돌아 어릴 적 뛰놀던 그 집 앞에 선다.
학교가 파하면 여자아이들은 친구 ㅎㅅ이네로 모여든다. 매끈하게 다져진 넓은 마당은 아이들 놀이터다. 앞쪽으로 장독대와 우물이 나란하고 기와지붕 위에는 댓잎이 바람에 날린다. 외양간에서 워낭 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딱지치기, 땅따먹기, 술래잡기로 한나절 왁자하게 놀다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간다. 5학년이던 나는 키 큰 언니들과 땀을 뻘뻘 흘리며 고무줄놀이를 한다. 흥이 오른 서넛이 승부를 가려야 한다. ‘무찌르자 오랑캐….’ 노래에 맞춰 뛰다가 줄을 넘는다. 가장 어려운 마지막 단계가 남았다. 양쪽에 선 두 사람은 고무줄을 집게손가락에 감아 까치발을 하고 올린다. 팽팽하다. 땅에 손을 짚고 반동을 줘서 다리를 뻗는다. 동시에 바람개비처럼 몸을 휘돌려야 한다. 아주 짧은 순간 거꾸로 본 하늘은 푸르다. 아득하다. 고무줄이 걸리는 건 발등의 감각으로 안다. 어림도 없다. 짧은 다리는 허공에서 헛발질한다. 바닥에 쓰러져 구르지만 아픈 줄 모른다. 줄을 잡던 언니와 역할을 바꾼다.
두 채 건너에 우리 집이 있다. 엄마가 담 너머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얼른 집으로 오라는 뜻이다. 잠시 망설였지만 못 들은 체한다. 재미난 놀이보다 좋은 건 없다. 푹 빠져들었다. 그새 네댓 번은 더 불렀을 거다.
해가 설핏해질 무렵에 집으로 왔다. “귀를 막고 있었냐? 뭔 지랄하고 이제 와?” 화를 버럭 내면서 등짝을 때렸다. 혼자 밭에서 일하고 오면 밥이라도 해 놓아야지 정신 빠져서 노냐고 지청구를 듣는다. 조금 전까지 느낀 상쾌하고 즐거운 기분은 싹 가시고 만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등이 아픈 건 괜찮은데, 욕설에 심사가 뒤틀린다. “지랄이라니요? 무슨 말인 줄 알고 하는 거예요? 아무리 화가 난다고 딸한테 그런 욕을 하다니!” 지독하게 싫어하는 '지랄'이란 두 글자에 꽂혀서 소리 높여 대거리를 한다. 한 대 더 맞았다. 분한 마음이 솟구쳤다. 이제는 나도 못 참겠다며 방문을 세차게 밀어젖힌다. 신발은 신었던가? 무작정 뛰쳐나갔다. 저 아래 신작로까지 뛰어가, 안 보이는 곳에 숨고 싶었다. 거기 서라고 소리치면서 따라왔다. 곧 잡힐 듯하다가 다시 멀어지기를 몇 번, 젖 먹던 힘을 냈다. 그러나 투박하고 거친 손이 내 어깨를 잡아챘다. 다리에 힘이 빠져 동네 어귀에 풀썩 주저앉았다. 부끄럽게 왜 이러냐며 다그쳤다. 모녀가 해거름에 난데없이 달음질쳤으니 창피스러웠다. 헐떡거리던 숨을 가라앉혔다. 더 크게 나무랄 줄 알았는데 엄마는 조용했다. 나는 소리 죽여 울었던 것 같다. 한동안 어둑해지는 길 위에 있었다. 말없이.
초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은 연세가 꽤 드신 분이었다. 예의범절과 바른 자세를 엄하게 가르쳤다. 의자에 앉는 연습을 매일 시켰다. 누구라도 움직이면 그만큼 시간이 늘어난다. 열중쉬어 자세로 허리를 곧게 세워야 한다. 높임말 쓰는 것도 되풀이해서 익혔다. 욕을 하거나 싸우면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어느 날, 한 남학생이 본보기가 되었다. 몇 번 얘기해도 말을 안 들어서 혼나야 한단다. 우리를 남겨둔 채 교실 밖으로 나갔다. 외딴 변소에서 나뭇가지 끝에 똥을 묻혀 왔다! 아이를 불러 세워 입을 벌리라고 했다. 악을 쓰며 버텨도 소용 없었다. 입술에 가까이 대고 기어코 묻히려 했다. 몇 번을 닿을락 말락했다. 잔뜩 겁을 먹고 지켜본다. 아슬아슬했지만 다행히 묻지는 않았다. 욕하는 입은 더럽다는 걸 똑똑히 보라고 했다.
그 아이에게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욕설을 하고 듣는 것에 예민졌다. 엄마에게 파르르 대든 이유이다. 사는 데 지쳐 딸의 세세한 걸 들여다보지 못했을 게다. 나도 조잘거리며 살갑게 말하지 않았고.
집에 돌아온 나는 밥을 먹지 않고 누웠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척했다. 윗목에 삶은 감자를 놓아두었다. 울어서 머리가 아플 테니 먹고 자라며 두어 차례 권했다. 종일 뛰어서 배가 무척 고팠다. 일어날까 그냥 잘까 고민을 좀 했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 어깃장을 놓고 버티기로 한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걸 굶는 것으로 보여주리라.’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설핏 잠이 들었다가 흐느끼는 소리에 깼다. 엄마가 희미한 불빛 아래서 양말을 깁다 말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가느다란 목소리로 노래를 읊조린다. ‘헤아릴 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 채,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가끔 부르던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이다. 엄마의 뒷모습은 애달파 보였다. 젊은 남편이 죽자 ‘혼자서 아이들을 어찌 키울 거나?’ 주위에서 같이 서러워했다. 그때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엄마였다.
슬며시 다가가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나는 곤히 잠을 잤다.
고향집을 다녀오면 철없던 어린 시절이 더 그립다. 가난하고 아쉬운 날들이었지만 돌아보면 참 따듯하다.
첫댓글 우리 어릴 때 욕 듣지 않고 자란 아이는 없을 겁니다. 나도 "저놈의 가시내!" 라는 소리 많이 들었어요. 지금은 엄마의 그런 욕이 그리워집니다.
그리운 시절이었죠. 투박하면서 정겨운.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엄청 똑부러지는 여자 아이가 그려지네요. 성장소설 주인공처럼요.
똥막대기가 내 입에 들어오는 것 같아 찌뿌리며 읽었네요. 침까지 뱉을 뻔 했어요.
똑부러지지는 않았고요. 하하.
몇 안되는 어릴적 기억이네요.
진짜 그 막대기는 지금도 가끔 떠오릅니다요.
저도 혼나면
선생님처럼 밥 안 먹는 걸로 시위했는데.
지금도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한답니다. 하하.
글이 재밌고 슬프고
'똥막대기'는 트라우마가 남을 정도로
생생해요.
잘 읽었습니다!
어릴 때는 그러면 고집 세다고 혼 많이 났지요.
부족한 제 글 잘 따라 읽어주셔서 늘 고마워요.
선생님 글 읽을 때마다 느끼는 점, '어릴 때부터 똑부러지셨구나' 는 것. 참 잘 자라신 것 같습니다. 어머님의 고생이 헛되지 않도록.
왜 글을 쓰려면 잊혀진 옛 기억들이 떠오를까요?
똑부러진 건 아니고요. 하하. 엄마는 늘 고생만 하셨지요.
고무줄 놀이, 엄마의 꾸중 다 그리운 것들입니다.
어머님이 많이 힘드셨겠네요.
어려운 시절에 어머니가 가장 고생하셨죠. 대가없이 희생만 하시고 병들어 요양원에서 마지막을 기다려요. 고맙습니다.
갈수록 아쉽고 그리운 것이 옛날이 많아집니다. 이렇게 글로 기록해두니 좋습니다.
지나간 것들은 그리움으로 남나봐요. 아쉬운 감정이 남지않게 잘 살아야 할텐데, 그러지 못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