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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7일(사순절 세 번째 주일, 성청주일)
마태복음 18:21-35
용서 받은 기쁨으로 살라.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본문은 교회 내에서 범죄 한 사람을 어떻게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나와서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면 되겠습니까?”
이러한 베드로의 이야기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이야기였습니다. 당시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활동하던 유대인 랍비들은 상대방이 지었던 죄 중에 동일한 죄에 대해서는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네 번째부터 그 죄를 용서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에 비해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의 죄를 일곱 번 까지 용서해 주면 되겠느냐고 이야기했던 베드로의 용서는 당시로서는 과히 파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일곱 번 가지고 되겠느냐?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고요? 이 말은 숫자 그대로 사백 구십 번을 용서하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은 용서하되 완전히 용서하라는 말이고, 조건을 따지지 말고 무조건적으로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 말을 들었던 베드로와 제자들의 당황한 표정을 상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말이 얼마나 불가능한 말인지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에게 잘못한 사람의 죄에 대해서 단 한 번이라고 제대로 용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수준에서는 솔직히 베드로의 일곱 번 용서도 너무 높은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나에게 잘못한 사람의 죄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어떻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던 제자들이 당황하며 수군거리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는 천국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옛날에 어떤 임금이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 임금은 자신의 전 재산을 회계하기 위해 장부를 뒤지다가, 자신에게 금 일만 달란트를 빚진 한 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금 일만 달란트는 얼마나 되는 돈이었을까요?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에 유대 민족과 에돔 민족과 사마리아 민족 전체에서 일 년 간 걷혔던 세금의 총액이 고작 금 600달란트였답니다. 그러니까 이 종이 갚아야 할 금 일만 달란트는 당시 팔레스타인 땅에 살고 있던 몇 나라들의 일 년치 세액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었습니다.
이 돈을 이렇게도 계산할 수도 있습니다. 금 일만 달란트는 노동자 한 명이 자그마치 20만년을 모아야 모을 수 있는 돈입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요? 한 사람이 20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20만년을 모아야 하는 돈이라면, 그것은 이미 채무자의 능력을 벗어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런 큰돈을 누군가에게 갚아야만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쨌든 임금은 이 종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돈을 다 갚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는 일당 5억짜리 황제노역을 그 사람에게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임금은 공정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정작 문제는 이 종이 그런 어마어마한 돈을 어떻게 갚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종은 자신의 능력으로 이 많은 돈을 갚을 수 없는 것을 알고는 즉시로 머리를 땅에 쳐 박고, 눈물을 흘리며, 자비를 구했습니다. 종은 다음과 같은 말로 자비를 구했습니다.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로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여기서 종은 자신에게 참아달라고 자비를 구했습니다. 마치, 시간만 조금 더 연장시켜 준다면 자신이 그 돈을 갚겠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실제로 ‘참아 달라’는 헬라어 표현인 ‘마크로뚜마손’이라는 단어는 시간의 ‘연장’이나 ‘지체함’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하던 단어였습니다. 임금께서 자신에게 시간만 조금 더 연장시켜 주신다면 그 돈을 다 갚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시간을 더 연장시킨다고 해서, 그 많은 돈을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종이 일만 달란트를 다 갚기 위해서는 20만년을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자, 이제 공은 임금에게 넘어갔습니다. 종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그 돈을 값을 능력이 없기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임금의 결정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마 임금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겁니다. 먼저, 법에 따라 이 무지막지한 종을 일평생 감옥에 가두고, 그 아내와 자식들을 다 노예시장에 노예로 갔다 파는 방식입니다. 만일 그것도 모자라면, 은행계좌를 추적해서 혹시 해외에 도피해 놓은 돈이나 은닉해 놓은 부동산은 없는지를 찾아서 이 사람과 가족들을 이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시켜 버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시원치 않은 경우에는, 완전히 없던 일로 해두고 그냥 용서하고 덮어버리는 방법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말처럼 쉬운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음씨 좋은 이 임금은 그 가련한 종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27절에 보면, 임금(주인)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많은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용서를 이 임금이 베풀었던 것입니다.
자, 이야기는 일단 여기에서 일단락이 됩니다. 임금은 종을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단락이 시작됩니다. 이어지는 단락은 “그 종이 나가서(28절)”라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자, 여러분은 지금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임금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돈을 종에게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임금은 종을 불쌍히 여겼고, 실제로 그 빚을 탕감하겠노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빚을 탕감 받은 종은 곧바로 그 장소를 나가버렸습니다. 무엇이 급해서 그렇게 빨리 나갔을까요? 만일 여러분이 그 종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만일 그 종이었다면, 저는 임금 앞에 엎드려서 눈물도 흘리고, 용서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큰 절이라도 올리겠습니다. 그게 사람 사는 방식이고, 기본적인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이 종에게는 그런 감사와 예의가 없습니다. 종에게 그 자리는 너무나 불편한 자리였던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아마 다음 두 가지 중에 하나의 경우일 것입니다. 이 종이 아주 인간미도 없고 예의도 모르는 파렴치한 사람이던가, 아니면 아직 이 종이 임금의 용서하겠다는 선언을 믿지 않고 있던지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상황이 급박하게 바뀔 리는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장면은 바뀌어서, 이제는 이야기의 주도권이 임금에서 다시 종으로 넘어왔습니다. 이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종은 자신의 동료의 멱살을 붙잡고, 빚을 갚으라며 윽박질렀습니다.
29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상황만 바뀌었을 뿐이지, 이 동료는 예전의 임금 앞에 간구하던 종과 똑같은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이 무정한 종은 동료의 간구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빚을 갚도록 그 동료를 옥에 가두고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부터 전개되는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익히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식이 그만 임금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임금은 그 종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화가 난 임금은 악한 종이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졸들을 불러 그를 옥에 가두게 했습니다. 여기서 ‘그 빚을 다 갚도록’이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입니다. 결국 이 악한 종은 자신이 지었던 어마어마한 빚을 다 갚을 때까지 평생 감옥 안에 갇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결론적인 가르침이 35절에 나옵니다. 우리 한 음성으로 35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각각 그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자, 과연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여러분이 생각할 때 과연 종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왜 이 종은 임금으로부터 엄청난 용서를 받고서도, 정작 자신의 동료에게는 그리 인색하게 대 했을까요? 사실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은 돈의 가치상으로 보면 정말 비교도 안 되는 큰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일만 달란트가 한 노동자의 무려 20만년 치 임금이었다면, 백 데나리온은 한 노동자의 고작 백 일치 임금에 불과했습니다. 왜 이 종은 자신의 엄청난 빚을 탕감 받고서도, 정작 동료의 사소한 빚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못했을까요?
심리학자인 데이빗 벨쿰 박사는 현재 신체적인 질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들 중에 75%는 신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는 마음의 병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다음과 같은 우스갯소리들을 하시잖아요? 몸의 한 군데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더니 정작 생각지도 못했던 이곳저곳들이 아파오기 시작한다고 말이지요.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그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의 병이 우리의 육체적 질병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가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마음의 병이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하심을 잘 알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은혜란, 도저히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라고 하는 신학적인 정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신학적인 정의와 교리가 내 삶에 적용이 잘 되지 않더라는 겁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죄는 정말 예수님 안에서 다 해결되었습니까? 정말 용서받으셨나요?”
사실 이런 질문은 무겁고 심각한 질문입니다. 어떤 분은 이런 질문을 받을 때 상대방에게 예의가 없다고 반감을 가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봅시다.
제가 보기에, 일만 달란트 용서받았던 종은 자신이 정말 임금으로부터 그런 용서와 긍휼을 받았는지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종이 자신의 빚을 탕감해 준 임금에게 어떻게 감사의 표시를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이 종은 임금의 말을 믿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임금의 말을 믿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임금 자체를 믿지 못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말로는 얼마든지 “내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나는 이제 용서받은 자유인입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옥죄는 내면의 옥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자신의 죄가 용서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요?
첫째는, 용서해 주신 분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없습니다.
용서받은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감격의 고백이 없습니다. 그냥 형식적인 신앙생활, 의무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마치 일 년에 몇 번 정기적으로 자동차세 내듯이 헌금하고, 예배드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이유는 그 안에 정작 있어야 할 죄 사함의 확신과 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자꾸 자신의 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일만 달란트 빚졌던 종이 용서받자마자 찾아간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백 데나리온 빚졌던 동료였습니다. 이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냥 우연히 만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졌던 종이 목적을 가지고 찾아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사람이 임금에게 용서받자마자 인사도 없이 그렇게 황급히 그 자리를 빠져 나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빨리 찾아가서 빚을 갚아야 한다.”
“내가 구한 긍휼은 시간을 좀 더 지체해 달라는 것이었으니까, 왕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단 한 푼이라도 더 악착같이 모아서 임금의 노를 풀어주어야 한다.”
종에게는 이러한 일종의 자기최면이나, 자기 확신 같은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겁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 좀 더 물어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주시는 생각과 감동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처럼, 그냥 자기 생각에만 꽉 차 있어서 도대체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는 주의 깊게 듣지 못하고 일단 행동부터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에 심각한 오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임금이 일만 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돈까지 포기하면서까지 종을 용서해 주셨는데, 그런 임금이 고작 백 데나리온 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돈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임금이 그것 없다고 여러분을 다시 어떻게 하시겠느냐는 말입니다. 아니지요? 이것은 용서해 주신 분에 대한 심각한 오해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오셔서 너무 일 많이 하려고 하지 마세요. 또 너무 일을 잘 하려고도 하지 마세요. 지금 여러분에게는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잘못하면 그것이 여러분의 의가 되거나, 반대로 여러분이 그것 때문에 더욱 좌절감을 느끼고 결국 주님을 떠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가끔 보면, 신앙생활하면서 교회에 빚 받으러 오신 분처럼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과연 누구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시는 겁니까? 우리가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실제로는 자기의 의와 만족을 위해서, 아니면 반대로 자신에게 있는 죄책감을 그렇게라도 해결받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자세는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제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지요? 우리는 대부분 이 말씀을 들으면 남들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에게 가장 어려운 대적이 남들이 아닌 바로 여러분 자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먼저 용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한 번 더 묻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는데, 만약 그렇게 우리의 용서가 절실히 요구되는 형제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 자신의 과거의 실수요, 상처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과거와 친해지셔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과거를 있는 그대로 용서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여러분 자신을 용서하고, 있는 모습 그대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내 자신을 용서하는 것, 내 자신의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합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때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가정이 용서받은 기쁨은 없고 서로에게 빚만 갚으라고 요구한다면, 아마 살벌한 가정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가정은 용서받은 기쁨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받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은혜롭고 훈훈한 곳입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할 놀라운 사실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갚아야 할 차용증을 연장시켜 주신 정도가 아니라, 그것 자체를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찢어 버리셨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내가 그것을 어떻게 믿고,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것입니까? 정말 내가 용서받았습니까?” 물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모든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좋습니다. 내 과거의 불행했던 실수로부터 내가 용서받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정말 내가 용서받은 것을 확신하고 기쁨 가운데 거해도 되는 거란 말입니까?”
보통 이러한 질문은 유교 문화권에서 자란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질문들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행복해하고 마냥 즐거워하는 것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며 자라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용서받은 기쁨으로 살아가라”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은 우리에게 죄 용서받은 기쁨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복음으로 인해 마음의 평안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에, 우리에게 내려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또 실제로 내려주신 성령은 기쁨의 영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죄 사함의 확신과 참된 자유를 선사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존경받던 코리 텐 붐 여사는 죄 용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바다 갚은 곳에 던지시고 강둑에다 ‘낚시 금지’ 라는 팻말을 꽂아 놓으신다.”
여러분, 과연 ‘낚시금지’가 무슨 의미입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진심으로 회개한 죄에 대해서 다시 슬퍼하고, 과거의 죄 때문에 다시 괴로워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잊어버리신 것을 우리가 다시 물 바깥으로 끄집어 낼 권한이 없습니다.
성경의 선언을 귀담아 들어봅시다. 히브리서 10장에서는 우리가 받은 죄 용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7-18).”
성경은 일관되게 2천 년 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았노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자신의 몸을 드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용서받기 위해 다시 또 다른 제사를 드릴 것이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은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십자가의 은혜로 죄 용서받고, 거룩함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용서받은 기쁨으로 살되,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의 죄를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도 용서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마6:12)”라고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기도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 받을 수 있는 전제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하나 전해드리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제가 어느 날 「좋은 생각」이라는 월간지를 읽다가, 미국에서 한인교회를 섬기고 계신 강준민 목사님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이 분이 신학교 시절, 함께 기숙사를 쓰고 있던 한 친구와 가깝게 지냈는데, 어느 날 이 둘이 저녁 공기를 마시기 위해서 기숙사 베란다에 나갔답니다. 이때만 해도 강준민 목사님이 신학대학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친구에게 앞으로 자신이 졸업하면 이런저런 목회를 하고 싶다는 굉장한 포부를 이야기 했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다 들은 친구가 문득 시골교회에 계신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더랍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시골교회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교회에 한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교회의 남자 집사 한 명이 술에 잔뜩 취해서 한 밤 중에 목사관을 찾아와서는 목사관 마당에다가 잔뜩 오바이트를 하고 돌아가더랍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많은 성도들이 목사관 마당에 모여서 어제 밤에 교회 목사님이 술을 먹고 이렇게 마당에다가 오바이트를 해 놓았다고 수군거리더랍니다. 목사님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어요?
아마 웬만한 분 같으면 자기가 아니라 모 집사님이 어제 밤에 다녀가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이야기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웬일인지 자신의 아버지는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더랍니다. 그 대신,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아무 말 없이 젓가락을 가져와 바닥에 토한 그 지저분한 것들을 다 집어 드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실수를 하고, 어려움을 주었던 그 남자 집사님 이야기를 끝까지 하지 않았다고 그래요.
이 친구는 이 말을 강준민 목사님에게 전하면서, 자기 아버지는 세상 적으로 볼 때는 절대로 성공한 목회자가 아니지만, 그래도 나의 아버지는 정말 성도들을 사랑한 참된 목자였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던 강준민 목사님은 충격을 받았고, 그 이후로 자신의 목회비전을 새롭게 수정해서 오늘날 한국교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목사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주님의 용서와 긍휼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갖길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용서받은 기쁨을 누리고,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의 죄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