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에게 들으라
매미 소리가 요란하다. 시끄러울 때는 법당의 염불 소리가 묻힐 정도다. 매미 울음소리를 가만히 들어 본다. 여기서 울면 저기서 울고... 이어달리기하듯 번갈아 울어 댄다. 동시에 울지 않는 것은 서로의 구애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다. 매미 종류마다 그 울음이 다르기 때문에 한꺼번에 소리 내면 암 매미가 그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독특한 울음으로 자신의 짝을 찾는 매미에게도 이처럼 기막힌 생존의 법칙이 존재한다.
도심의 매미들이 시골 매미들보다 시끄럽단다. 오죽했으면 매미소리를 소음이라고 말했겠는가. 서울 아파트 단지에서 매미 소리를 측정했다는 자료를 보았다. 결과는 평균 72.7 데시벨, 자동차 주행 소음이 67.9데시벨이라고 하니까 그 소리의 세기를 알 만하다.
그런데 도심의 매미가 크게 우는 이유가 있다. 자동차 등 도시의 소음 때문에 더 큰 소리로 울어야 저편의 암컷에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밤낮없이 울어대는 원인도 알고 보면 가로등 불빛으로 인해 그들의 밤을 빼앗긴 탓이다. 그러므로 시끄럽지만 그들의 생태를 이해해야 스트레스가 되지 않는다.
여름엔 매미 울음소리가 나야 제격이다. 매미 소리는 한여름의 상징 같은 것이다. 만약 여름에 매미가 울지 않는다면 생태계에 혼란이 일어나 우리 인간을 위협할 것이다. 그러므로 매미 울음을 단순히 소음이라고만 표현한다면 인간의 독선일 수도 있다.
점심 공양을 마치고 매미 울음소리를 따라 봤다. 삼성각 앞의 느티나무 가지에 붙어 맴맴 울고 있었다. 아직 구애의 짝이 찾아오지 않았는지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방에 와서 자료를 뒤적거려 보고서야 매미 울음의 종류가 여러 가지라는 것을 알았다. 수컷이 암컷을 부를 때는 본 울음, 암컷이 가까이 오면 속도를 높여 우는 유인 울음, 그리고 다른 수컷의 방해 울음 등 여러 가락과 장단이 있었네.
몇 해 전 간송미술에서 겸재 정선의 작품 <송림한선>을 만났을 때 조선 선비 사회에서 매미 그림이 사랑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겸재의 매미 그림은 소나무 가지에 한 마리의 매미가 사뿐히 앉아 있다. 이런 그림을 보며 선비들은 청빈과 등과를 기원했으리라 짐작된다.
요즘 정치판을 보면 매미와 개구리가 서로 이기려고 소리를 질러대는 형국이다. 여야의 정치 논리가 피장파장이라서 듣는 사람들은 시끄럽기만 하다. 국정원 청문회도 그렇고 사초 공방도 그렇다. 서로 옳다고만 주장한다. 사건의 본질은 사라지고 억측과 오해만 분분하다.
셰익스피어의 지적처럼 소문은 ‘제멋대로의 추측과 악의가 불어 대는 피리’인지도 모른다.
뜬소문은 강물과 같아서 그 수원은 별 것이 아니지만 하류로 갈수록 넓어진다. 한 입 두 입 건너가다 보면 나중에는 엉뚱한 쪽으로 빗나가는 수가 있다.
“과거와 현실이 싸움을 하면 미래가 손해를 본다.”
영국 총리 처칠의 말이다. 여기에서 정치적인 해답을 받아야 한다. 한 나라의 온갖 잠재력을 과거사에만 집중하고 오늘을 허술하게 지나치면 미래를 위해서는 투자할 수 없다. 지나간 일에 너무 매달려 국력과 국론을 소모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리말에 “어지간히 해 두라.”는 표현이 있다. 선조들의 처세법이기도 하지ask 삶의 지혜가 담긴 말인데 극성스럽게 끝까지 물고 늘어지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각을 돌이키라는 뜻. 이 표현은 극한적인 투쟁을 피하라는 가르침이다. 무엇이든 극한과 막장으로 가는 싸움은 좋지 않다. 삶의 균형을 잃지 말라는 오래된 지혜이기도 하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두가 한때다. 모두가 한때이기 때문에 극복하고 용서할 수 있는 용기와 기량이 생기는 법이다.
좋은 장단도 하루 이틀이다. 아무리 민의를 대변하는 정쟁일지라도 제발 어지간히 하길 바란다. 자꾸 반복하면 매미 소리보다 더 싫증날 수 있다. 그래도 이 여름날 울고 있는 매미 소리보다는 조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래서 요즘은 뉴스를 멀리하고 매미 소리 듣는 일로 피서를 즐기고 있다.
출처 ; 현진 스님 / 산 아래 작은 암자에는 작은 스님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