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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연합회 서장(간화선 특강)
제3강 - 2부(2012. 10. 29.)
答 曾侍郎 天遊 (二) (三)
不見가 昔日에 灌谿和尙이 初參臨濟할새 濟見來코
便下繩床하야 驀胸擒住한댄 灌谿가 便云領領커이다
濟가 知其已徹하고 卽便推出하야 更無言句로 與之商量하니
當恁麽時하야 灌谿가 如何思量計較로 祗對得이리요
古來에 幸有如此牓樣이어늘 如今人은 總不將爲事하고
只爲麤心이로다
不見(불견)가? 보지 못했는가?
昔日(석일)에, 옛날에
灌谿和尙(관계화상)이, 관계화상이라고 하는 분이
初參臨濟(초참임제)할새, 처음 임제스님을 만났을 세.
濟見來(제견래)코, 임제스님이 관계화상이 오는 것을 딱 보자마자
便下繩床(변하승상)하야, 곧 繩床에서 내려왔다. 이 繩床은 뭔가 하니, 대개 조실스님쯤 되면 의자에 앉아있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법문도 하고 생활도 그렇게 해요. 사실은 중국 사람이 의자를 제일먼저 사용했습니다.
繩床이라고 하는 것이 법문 할 때도 여기 앉아서 하시지만, 그래서 법상이라고 하는 표현도 있지만 대개 의자입니다. 의자에서 내려와서
驀胸擒住(맥흉금주)한댄, 驀胸擒住. 그러니까 문득 멱살을 잡고, 확 그냥 휘어잡은 것이지요. 驀胸擒住한댄, 멱살을 휘어잡고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灌谿가 便云領領(변운영령)커이다. “알았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입니다. 옛날에 관계화상이 임제스님을 보았는데 임제스님은 수좌가 오자마자 내려가 가지고 다짜고짜, 네가 어디서 왔느냐? 뭐 하러 왔느냐? 본명은 뭐냐? 그런 군더더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무조건 멱살을 확 휘어잡은 겁니다. 그러니까 관계화상도 “알았습니다.” 이렇게 나간 겁니다.
濟가 知其已徹(지기이철)하고,
임제가 그가 이미 사무친 것을 알고, 사무쳤다. 깨달은 것을 알고
卽便推出(즉변추출)하야, 곧 바로 밀어내서
更無言句(갱무언구)로 與之商量(여지상량)하니,
더 이상 어떤 말로도, 어떤 글귀로도 그 사람과 더불어 거래하지 안 했다.
商量 = 거래하지 않았다 말입니다. 그 사람하고 절대로 言句로 주고받는 일이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當恁麽時(당임마시)하야, 이러한 때를 당해서
灌谿가, 관계화상이
如何思量計較(여하사량계교)로 祗對得(지대득)이리요?
어떻게 사량계교로서 공경히 대하고 어떻게 했겠는가? 사량계교가지고 대해서 대접하고 무슨 머리 짜내고 할 일이 아니다.
古來(고래)에 幸有如此牓樣(행유여차방양)이어늘,
옛날부터 다행히 이와 같은 본보기가 있다 = 牓樣.
이와 같은 본보기가 있거늘
如今人(여금인)은, 요즘 사람들은
總不將爲事(총부장위사)하고, 이런 아주 멋진 그런 一機一境上(일기일경상). 그러지요? 하나의 그 계기를 가지고 일삼지 아니하고 요즘 사람들은 모두들 總不將爲事. 그것을 가져서 일삼지 아니하고 只爲麤心(지위추심)이로다.
벌써 대혜스님이 서장을 통해서 이 간화선을 선양할 때는, 선불교가 좀 내려감을 향하고 있는 시기입니다. 내려감을 향하고 있는 시기예요. 한참 선불교의 꽃을 제대로 피우는 시기는 달마스님 때도 육조스님 때도 아니고, 마조스님ㆍ황벽스님ㆍ임제스님. 그 무렵이 선불교의 아주 최 정점이라고 그렇게 봅니다. 그리고는 차츰차츰 근기가 쇠약해지니까 묵묵히 비춰보는, 묵묵히 관하는 黙照禪(묵조선)이 태동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마음을 觀한다 라고도 할 수가 있고, 마음을 구체적으로 관하는 觀心禪(관심선)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觀心禪과 아울러서 黙照禪이 태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黙照禪도 초기에는 아주 정상적으로 잘 진행되다가 그것이 일종의 병이 돼버리니까, 그 다음에 대혜스님이 노래하다 시피 간화선을 들고 일어난 것이지요. 그럼 많이 선불교가 정점에서 내리막을 향하고 있는 시기에 간화선이 말하자면 출발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래서 여기 보십시오.
如今人은, 요즘 사람들은 總不將爲事하고, 모두들 이것을 가지고 일삼지 아니하고 “신기한 사건이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只爲麤心(지위추심)이로다. ‘거칠고 머트롭다. 어떻게 행동이 저 모양이냐?’ 이렇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정말 살아있는 법이 오고가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꾸역꾸역 ‘무슨 도리일까?’ 이렇게 곰곰이 참구해야할 텐데 總不將爲事하고 麤心이라고 한다.
아주 되먹지 못 하고 아주 뭐 지가 무슨 노지심인가?
(魯智深--소설 수호전에 등장하는 인물, 花和尙이라고도 부름)
이런 식으로 아주 거친 중으로 본다. 이 것이지요. 그러니까 많이 쇠퇴했지요. 선불교가 상당히 쇠퇴한 겁니다.
灌谿가 當初에 若有一點이나 待悟待證待休歇底心이
在前이런들 時에 莫道被擒住便悟하라
便是縛卻手脚하고 遶四天下하야 拕一遭라도 也不能得悟하며
也不能得休歇하리라
尋常에 計較安排底도 是識情이며 隨生死遷流底도 亦是識情이며
怕怖慞惶底도 亦是識情이어늘 而今參學之人은 不知是病하고
只管在裡許하야 頭出頭沒하나니 敎中에 所謂隨識而行不隨智라
以故로 昧卻本地風光本來面目하나니 若或一時라도 放得下하야
百不思量計較하면 忽然失脚하야 蹋著鼻孔하리니 卽此識情이
便是眞空妙智라
灌谿(관계)가 當初(당초)에
若有一點(약유일점)이나, 한 점, 조금이라도
待悟待證待休歇底心(대오대증대휴헐저심)이 在前(재전)이런들,
깨닫기를 기다리거나 증득하기를 기다리거나 쉬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앞에 있었던들 時(시)에, 그때에 莫道(막도), 말하지 말아라.
被擒住便悟(피금주변오)하리라. 擒住를 입고, 말하자면 멱살 잡힘을 당하고 곧 깨달았다고 말하지 말라. 그런 마음이 = 깨닫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멱살을 천번만번 잡아봐야 소용없다 이겁니다. 여기에 이르면
便是縛却手却(변시박각수각)하고,
만약에 멱살을 잡고 그런 거친 행동을 통해서 깨달았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 사람을 손발을 꽉 묶어가지고
遶四天下(요사천하)하야 拕一遭(타일조)라도, 四天下를 한 바퀴 돌아치더라도 也不能得悟(야불능득오)하며, 또한 깨닫지 못 한다 이겁니다.
격투기하면서 이리매치고 저리매치고 여러 수천 번을 매친다한들 그것 깨달아지겠느냐 이겁니다. 그것하고는 관계없는 일이다 이 겁니다. 손가락만 까딱해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이지요. 멱살 잡았다고 깨닫기로 한다면 누군들 못 깨닫겠습니까? 그것하고는 관계없는 일이다,
也不能得休歇(야불능득휴헐)하리라.
또한 능히 休歇함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법문이 참, 아주 곰곰이 생각하면 근사합니다.
尋常(심상)에 計較安排底(계교안배저)도 是識情(시식정)이며,
평소에 = 尋常에, 計較하고 = 이리저리 헤아리는 것입니다. 머리 굴리는 것이지요. 安排底, 安排라고 하는 것은 뭔가 하면 말하자면 이렇게 저렇게 꿰어 맞추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멱살을 잡았다하면 그것을 가지고 또 이렇게 計較安排를 한다고 하면 ‘아 저것 멱살을 잡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구나ㆍ잡히는 사람도 그 물건이다.’ 이런 식으로 알량하게 그렇게 해석을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꿰어 맞추는 것을 安排. 안배한다는 말하고 그대로입니다. 이리저리 안배하는 겁니다. 是識情이다. 라는 말은 의식의 감정. 의식의 감정이다 이 말입니다. 우리 의식으로써 이리저리 느끼는 어떤 그 감정. 또
隨生死遷流底(수생사천류저)도 亦是識情(역시식정)이며,
생사를 따라서 흘러 다니는 것도 또한 의식의 감정이며 = 識情이다.
의식의 감정으로 한다 이겁니다.
怕怖慞惶底(파포장황저)도 亦是識情이어늘,
우리가 생사를 두려워하지요.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는 것도 또한 의식이다.
우리의 의식의 감정 = 識情이다. 식정인데. 평소에 우리는 그런 식정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는데,
而今參學之人(이금참학지인)은,
지금 參學 = 참구해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不知是病(부지시병)하고, 이 병을 알지를 못하고
只管在裏許(지관재리허)하야, 다만 그 속에 있어서,
다만 그 속에 = 識情속에 있으면서
頭出頭沒(두출두몰)하나니, 머리를 내었다ㆍ머리를 빠졌다. 들락날락,
말하자면 헤엄 못 치는 사람이 물에서 빠져 죽을 때, 머리를 내었다가ㆍ빠졌다가ㆍ내었다가ㆍ빠졌다가 이렇게 한다 이 말입니다.
識情ㆍ頭沒이라. 의식ㆍ사량 속에서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敎中(교중)에서 所謂隨識而行不隨智(소위수식이행불수지)라.
識情을 따라서 행하고, 살아가고 지혜를 따르지 않는다.
以故(이고)로 昧却本地風光本來面目(매각본지풍광본래면목)하나니,
本地風光과 本來面目을 昧却해버렸다. 얼굴 못 차버렸다. 본지풍광과 본래면목을 캄캄해버렸다.
성철스님의 책 중에 本地風光(본지풍광)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전부 상당법문만 실어놨습니다. 상당법문만, 해제 때ㆍ또 반 결제ㆍ결제 때 이런 법문만, 그 때는 딱 상당법문만 합니다. 상당법문 할 때는 옛날 조사스님들이 한 그 형식을 따라서, 누가 알아듣든지 못 알아듣든지 아무상관 없이 그 형식에만 맞춰가지고 법문한 것만 딱 모아가지고 本地風光이라고 이렇게 이름을 지었었습니다. 本地風光 = 본래의 자리. 본래의 자리에서 표현된 모습. 그것이 本地風光입니다. 본래의 자리가 뭡니까?
本地風光입니다. 지금 우리는 의식으로써 이러고ㆍ저러고 헤아리니까 이것은 本地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지엽적인 것을 가지고, 다시 말해서 물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물결에서 말하는 것이지요. 물이라고 하는 것은 本地입니다. 또 그것이 本來의 面目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들어난 것은 전부 물결이라고요. 의식은 현상. 의식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若或一時(약혹일시)라도, 만약 혹 한 때라도
放得下(방득하)하야, 그것을, 의식을 내려놓아서
百不思量計較(백불사량계교)하면, 아무것도 사량 계교하지 아니하면,
百 = 모든 것을 思量計較아니 할 것 같으면
忽然히 失却(홀연실각)하야, 홀연히 失却한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 말이지요. 잃어버리고
蹋着鼻孔(답착비공)하리니, 鼻孔을, 근본을 밟게 될 것이다.
근본은 그야말로 오직 이 本地風光ㆍ本來面目을 깨닫게 될 것이다.
卽此識情(즉차식정)이 便是眞空妙智(변시진공묘지)라.
그렇게 되면 물결이 곧 물이다. 識情 = 의식의 감정. 우리가 지금 춥다ㆍ덥다. 옳다ㆍ그르다. 좋다ㆍ나쁘다. 하는 것이 전부 識情이잖아요.
그것이 결국은 眞空妙有(진공묘유)입니다.
참으로 공한 자리에서 아름다운 지혜. 번쩍이는 아름다운 지혜가, 이것은 깨닫고 나서의 지혜를 眞空妙有라고 하는데, 정말 우리가 한 생각 돌이키면ㆍ한 생각 돌이키면 識情이 그대로가, 우리가 망상하고 번뇌하고 고민하고 하는 온갖 그런 인간적 감정이 그것이 그대로 깨달음의 眞空妙有다. 그것 빼면 따로 眞空妙有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비유를 들자면 경계에 의해서, 바람에 의해서 파도가 춤을 춥니다. 파도가 넘실대지요. 그런데 파도지 물은 아니라 이 말입니다. 우리 눈엔 파도 모습을 보는 겁니다. 그런데 물은 파도가 치든 가만히 있든 아무상관 없이 물은 항상 있는 겁니다. 물 빼고 파도 따로 있고, 파도 빼버리고 물 따로 있는 것은 아닌 것이지요. 의식이라는 것과, 識情이라고 하는 것하고, 眞空妙有라고 하는 것하고 관계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떤 경계를 우리는 뚫고 들어가지를 못했을 뿐이지, 사실은 우리도 아무리 번뇌 망상을 하더라도 역시 그대로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참 애매모호하고, 또 손에 잡힐 듯하고, 어떻게 보면 꼭 깨달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상황에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更無別智可得이어니와 若別有所得하며 別有所證이면
則又卻下是也리라 如人이 迷時에 喚東作西라가 及至悟時하야는
卽西便是東이라 無別有東이니라
此眞空妙智가 與太虛空으로 齊壽하니 只遮太虛空中에
還有一物이 礙得佗否아
雖不受一物礙나 而不妨諸物이 於空中往來하나니 此眞空妨智도
亦然하야 生死凡聖垢染이 著一點不得이니
雖著不得이나 而不礙生死凡聖이 於中往來라
如此信得及見得徹하며 方是箇出生入死에 得大自在底漢이라
始與趙州放下著과 雲門須彌山으로 有少分相應이어니와
若信不及放不下인댄 卻請擔取一座須彌山하야 到處行脚하야
遇明眼人하야 分明擧似하라 一笑하노라
更無別智可得(갱무별지가득)이어니와,
다시 다른 어떤 지혜를 가히 얻는 것은 아니다. 우리 번뇌ㆍ망상, 그것이 곧 지혜다. 그것 빼놓고, 번뇌ㆍ망상 빼놓고 다시 딴 지혜가 없다. 이 말이지요.
若別有所得(약별유소득)하며,
만약에 따로, 그 번뇌ㆍ망상 빼놓고 따로 얻는 바가 있으면,
別有所證(별유소증)이면, 깨닫는, 증득한 바가 있다고 한다면
則又却不是也(즉우각불시야)리라. 곧 또한 도리어 옳지 못하다.
그것은 맞지 않는 이야기다. 그야말로 비유를 해서 들어내면
如人(여인)이 迷時(미시)에 喚東作西(환동작서)라가,
어떤 사람이 어느 지방에 늦게 도착했어요. 캄캄한 한밤중에 도착을 했어요. 그래서 어느 방에 들어갔는데 방 앞은 동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 앞은 대개 동향이거나 남향이거나 하니까요. 그리고 그럼 반대 방향은 ‘분명히 서쪽일 것이다.’ 라고 이렇게 그냥 지레짐작을 하고 있었는데,
及至悟時(급지오시)하야는,
나중에 해가 뜨고 잠에서 깨어나고 보니까 뭡니까?
卽西更是東(즉서변시동)이라. 서쪽이 곧 동쪽이더라.
집이야 동향도 지을 수가 있고, 서향도 지을 수도 있고, 심지어 북향도 지을 수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와 같이 동쪽이라고 생각했다가, 동쪽을 서쪽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알고 보면 서쪽이 곧 동쪽이더라.
지금 번뇌 망상 하고 있다고 해서, 번뇌 망상을 우리가 꺼리지요ㆍ미워하지요. ‘아~ 나는 왜 이렇게 번뇌 망상이 많은가? 인간적인 감정이 왜 이렇게 많은가?’ 그것 골치 썩고 있지요? 사실은 골치 썩고 있는 인간적 감정이 그것이 그대로 眞空妙有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아~ 신기한 도리입니다.
無別有東(무별유동)이니라. 따로 동쪽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따로 깨달음의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고민하고 고민하는 그 번뇌 망상.
一念만 잠 못 들어 하면서 앓고 있는 그 번뇌 망상. 그것이 정말 眞空妙有. 깨달음의 지혜다. 아~ 참, 신기하잖아요.
此眞空妙智(차진공묘지)가 與太虛空(여태허공)으로
劑壽(제수)하니, 眞空妙智 = 깨달음의 지혜, 그것은 太虛空. 저 큰 허공하고ㆍ저 드넓은 허공하고 수명이 같아요. 이 지구 공간, 공간의 수명이 몇 살이나 되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의 수명도 이 허공의 수명하고 똑같다 이 말입니다.
只遮太虛空中(지자태허공중)에, 다만 이 태 허공 가운데에
還有一物(환유일물)이 礙得他否(애득타부)아?
또 거기에, 태 허공 가운데 무슨 한 물건이 있어서 저 허공을 장애하는가?
차가 아무리 크다 하고, 건물을 아무리 높이 세우고, 비행기가 아무리 날아다녀도 허공은 장애하지 않아요. 허공은 無心입니다.
아무리 100층짜리ㆍ200층짜리 건물을 지어도 허공이 왜 남의 지역에 이렇게 높이 건물을 지어서 내 영역을 차지하느냐? 이런 소리 안 한다고요. 비행기가 아무리 허공을 가로질러 다녀도 허공은 뭐라고 방해하지도 않아요. 우리의 마음자리도 그렇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드넓은 마음자리는 사실은 그와 같은 것인데, 그와 같은 것인데 우리는 그런 도리를 체득하지 못해 놓으니까 조그마한데 걸려가지고 아무도 없는데 그것이 환상에 사로잡혀가지고는 네 것ㆍ내 것. 네 영역ㆍ내 영역, 분별하고 있지요. 그래서 거기에 숱한 그 어떤 고통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고통스럽고 남도 고통스러워 하고, 여기에 그 글이 계속 되는데
雖不受一物礙(수불수일물애)나, 비록 허공은 한 물건도 왔다 갔다 하는 것에 장애를 받지 아니 하나, 거기에서 비행기가 지나다니든지
而不妨諸物(이불방제물)이 於空中往來(어공중왕래)하나니,
모든 사물이 공중에서 왕래하는 것을 방해하지도 아니해요. 허공이
“왜 차가 이렇기 지나 다니냐?” 하고, 차를 세우거나 비행기를 세우거나 건물을 못 짓게 하거나 허공은 그런 일이 없습니다.
此眞空妙智(차진공묘지)도, 우리 깨달음의 마음자리도
亦然(역연)하야, 또한 그러해서
生死凡聖垢染(생사범성구염)이,
태어나고ㆍ죽고, 범부다ㆍ성인이다. 더럽다ㆍ때 묻었다 하는 것이
着一點不得(착일점부득)이니, 한 점도 거기에 붙을 수가 없는 자리다.
한 점도 거기에 붙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범부니ㆍ성인이니 온갖 그런 옳고 그른 것을 왈가왈부 하지만, 우리의 진짜 마음자리. 우리보통 감정의 자리에는 그런 때가 덕지덕지 묻습니다. 좋다ㆍ나쁘다 하는 그런 때가 얼마나 묻습니까? 무수한 때가 덕지덕지 묻어가지고 그것이 1년도 가고 2년도 가고 또는 평생도 가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진짜 마음자리ㆍ진짜 참 나ㆍ진짜 나의 경지에는 着一點不得이라. 한 점도 거기에는 붙을 수가 없는 자리다. 그것 가끔 또 느끼지요? 우리가 확철대오는 못 했어도 우리 불자들은 마음 공부한 사람들이니까 무조건 마음에 대해서는 일반인들하고 대화를 해보면 거의 보살입니다. 깨닫지 못 했어도 이론적으로라도 마음에 대해서는 상당한 보살경지에 있다고요. 그래서 다 설명 잘 합니다. 진짜 우리 마음자리에는 그런 것이 사실은 없었어요. 또 그것을 사량 분별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뭐 확철대오가 아니고 그냥 사량 분별로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이해가 충분히 갑니다. 生ㆍ死ㆍ凡ㆍ聖ㆍ垢ㆍ染이 着一點不得이니라.
한 점도, 눈 꼽 만큼도 붙을 수가 없는 그 자리라고 한다. 그것이 진짜 참 나의 자리이고, 내 참 마음자리다. 그런 것입니다.
誰着不得(수착부득)이나, 비록 붙을 수 없지만,
而不礙生死凡聖(이불애생사범성)이 於中往來(어중왕래)라.
生ㆍ死ㆍ凡ㆍ聖이 그 가운데서 왕래함을 방해하지도 않는다.
그렇지요. 내 한 마음위에서 비록 태어나기도하고 죽기도하고 병도 들고, 또 병들었다 낫기도 하고요. 뭐 조금공부 잘하면 聖人이 되기도 하고, 공부 못하면 凡夫가 되기도 하고요. 그래봐야 그것은 우리의 참 나의 자리ㆍ참 마음자리에 그저 지 멋대로, 지 혼자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이런 말이지요.
如此信得及見得徹(여차신득급견득철)하며,
이와 같이 믿고, 또 이와 같이 보아서 사무치면
方是箇出生入死(방시개출생입사)에,
바야흐로 出生入死 = 태어나고 죽고, 그런 말입니다.
태어났다 죽는데 대해서
得大自在底漢(득대자재저한)이라. 大自在를 얻은 사람이다.
그러면 죽으면 죽는가 보다. 병들면 병들었나 보다. ‘나는 까딱없다.’
그 “나” 나는 까딱없다. 내가 죽고 살고 간에 ‘나는 까딱없다.’ 라고 하는 그 “나,” 그 “나” 를 지금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나” 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우리 공부가 얼마나 거기에 가까이 접근했느냐? 수행과 또 자기 노력에 의해서, 비록 사량으로지만 우리 불자들은 상당히 접근해 있다고 그렇게 봅니다. 그래서 가끔 한 생각 돌이킬 줄도 알잖아요. 한 생각 돌이키면 ‘뭐 그래봤자 나는 까딱없다.’ 쉬운 표현으로 그럴 수도 있습니다.
大自在를 얻은 사람이다.
始與趙州放下着(시여조주방하착)과 雲門須彌山(운문수미산)으로
有少分相應(유소분상응)이어니와, 그랬지요?
그 때야말로 비로소 조주스님의 방하착하라.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아니했을 때 어떻습니까? 내려놓아라. 라고 하는 이 소식과 雲門須彌山.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아니했을 때 허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라고 했을 때, 수미산이라. 라고 한 운문스님의 이 법문. 이 도리하고 조금 相應하는 바, 有少分相應. 어느 정도 거기에 이해가 있을 것이다 이런 말입니다.
若信不及放不下(약신불급방불하)인댄,
만약에 믿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할진댄,
却請擔取一座須彌山(각청담취일자수미산)하야,
도리어 청하노니 一座須彌山. 산을 세는 단위는 座라고 쓴답니다.
一座須彌山. 2좌. 산을 한 개, 두 개라고 안세지요. 산하나ㆍ산둘 ←이렇게 안하고 중국에서는 예를 들어 부산에 산이 다섯 개 있다 하면 5좌. 부산에는 산이 5좌가 있다.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하나의 수미산을 짊어지고, 수미산을 짊어지고 있으면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화두에 대한 그런 관심이 이쯤 돼야 됩니다. 수미산을 내가 짊어지고 있는 그런 그 중압감. 하~ 無ㆍ無ㆍ無. 수미산ㆍ수미산. 아니 수미산을 내가 짊어지고 있는데, 그 사람 잠이 오겠습니까? 밥맛이 있겠습니까? 해제했다고 무슨 여행 돌아다니고 그런 생각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 화두 드는 방법 다 이야기하고...
一座須彌山을 짊어진 것처럼 여기라 이 말입니다. 수미산을 한 짐 짊어졌다. 아니 수미산은 그만두고, 100 근짜리 걸망만 짊어졌다고 합시다.
옛날걸망 100 근정도 보통 했습니다. 100 근짜리 걸망을 짊어졌다면 그 사람 잠자겠습니까? 어디 제대로 갈 수 있겠습니까? 최소한도 화두에 대한 의식이, 화두에 대한 책임감이 그 정도는 해야 된다고요. 여기는 수미산이라고 했습니다. 수미산을 짊어진 것 같은 그런 화두에 대한 그런 책임감과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되잖아요. 수미산을 짊어져서
到處行脚(도처행각)하야, 곳곳으로 행각해서
遇明眼人(우명안인)하야, 明眼人 =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나가지고서
分明擧似(분명거사)하라. 분명히 들어 바치라. 이 말입니다.
擧似 = 들어 바치라.
一笑(일소)하노라. 一笑하리라. 라고 토를 달수가 있고, 전통적으로는 하노라. 라고 이렇게 토를 달았네요. 한바탕 웃을 것입니다. 내 이야기가 이걸로 끝입니다. 웃음 나오겠지요? 하는 그런 말이네요. 一笑. 一笑라는 말이 자주 나와요. 대혜스님께서 편지를 써 놓고는 조금은 표현이 과격했던지 멋쩍게 생각을 했을 때는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선 법문 치고는 아주, 선요는 사람을 막 두드려 잡는 경책으로서는 선요가 아주 최고이고, 이것은 아주 이론적으로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설득 시키는, 그런 선 법문으로서는 서장밖에 없습니다. 뛰어난... 이 보십시오.
이 뿐만 아니라 다른 대목도 그렇습니다. 그 다음 세 번째 편지.
又(三)
老龐이 云 但願空諸所有언정 切勿實諸所無라하니
只了得遮兩句하면 一生參學事畢이어늘 今時에
有一種剃頭外道가 自眼不明하고 只管敎人으로
死擖狚地休去歇去라하나니 若如此休歇인댄 到千佛出世라도
也休歇不得하야 轉使心頭로 迷悶耳니라.
老龐(노방)이 云(운)호대, 방거사입니다. 방거사가 말하기를
但願空諸所有(단원공제소유)언정
切勿實諸所無(절물실제소무)라하니, 이 법문이 또 유명한 법문입니다.
방거사는 유명한 분이지요? 但願空諸所有언정, 다만 원하라. 무엇을요?
空 = 비우기를, 모든 所有, 모든 있는 것에 대해서 텅 비우기를 구하라. 정확하게 새기면 그렇습니다. 다만 모든 있는 것 = 所有. 있는 것을 비우기를 원할지언정 切勿實諸所無라. 간절히 하지 말라. 무엇을요? 채우지 말라.
實 = 채우라는 뜻입니다. 없는 것을, 모든 없는 것을 있게 하지 말라. 채우지 말라. 글자대로 정확하게 새기면 그런 뜻입니다. 있는 것을, 우리 의식 속에 온갖 있는 것이 많지요? 그것을 자꾸 비워 내려고 해야지요. 비워 내려고... 이미 우리는 너무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의식ㆍ사량ㆍ분별ㆍ계교ㆍ지식. 그런데 없는 것을 자꾸 거기다 주워 담으려고 하지 말라. 그런 말입니다. 이것을 여러 번 써 먹습니다. 뒤에도 몇 번 나옵니다.
只了得遮兩句(지료득자양구)하면,
다만 이 兩句. 이 두 구절을 모두 다, 了자가 알 료자ㆍ깨달을 료자. 보통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것 보다는 차원이 높습니다. 了得한다. 밝을 료자ㆍ료자를 깨닫는다고 까지도 표현합니다. 모든 일을 다 마쳤다 그럴 때, 마칠 료자라고 그러잖아요. 이 두 구절을 깨달으면 一生參學事畢(일생참학사필)이어늘, 일생을 參學하는 일. “참선학도” 해도 좋습니다.
“참선학도” 참선 공부하는 일을 마친다. 學 = 공부. 參 = 참선. 참선 공부하는 일을 마친다.
今時(금시)에 有一種剃頭外道(유일종체두외도)가,
요즘 한 종류의 머리 깎은 외도가, 머리 깎은 외도가 = 출가한 사람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自眼이 不明(자안불명)하고, 자기 눈은 밝지 않고
只管敎人(지관교인)으로, 다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死獦狙地休去歇去(사갈달지휴거헐거)라하나니,
獦狙地 = 고슴도치. 死獦狙地 = 죽은 고슴도치처럼 쉬고 또 쉬어라.
고슴도치는요? 죽은 듯이 가만히 있습니다. 죽어서 죽었다는 고슴도치가 아니고, 죽은 듯이 웅크리고 있으면 그것이 몸에 온 가시가 그냥 나 있지요. 그래서 산 돼지도 접근을 못합니다. 가시가 워낙 독하기 때문에... 죽은 듯이 있는 고슴도치처럼 쉬어가고 쉬어가라. 그렇게 가르치는 겁니다. 이것이 “묵조선이다.” 그렇게 합니다. 여기에 대한 비판이 무수히 나옵니다. “대혜스님은 오로지 묵조 사선을 배격하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다.” 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정도로 묵조선을 그렇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마디,
若如此休歇(약여차휴헐)인댄, 만약 이와 같이 쉬고 쉰다면
到千佛出世(도천불출세)라도, 千佛이 出世하는데 이른다 하더라도
也休歇不得(야휴헐부득)하야, 또한 쉬지 못한다.
轉使心頭(전사심두)로 迷悶耳(미민이)니라. 더욱 더 마음으로 하여금,
心頭로 하여금 답답하고 답답하게 할 따름이다. 답답하고 답답할 따름이다. 그것이 어디 쉬어지느냐? 툭 터져야, 한 생각 툭 터져버려야 그 때 제대로 쉬어지는 것이지, 망상 들어낸다고 자꾸 들어내요, 자꾸 들어내...
예를 들어서 우리가 안 좋은 기억이 있다면 그것이 뇌리에 자꾸 떠올라요 . 누구하고 싸웠다든지, 누구하고 이별했다든지 아니면 좋은 일이 있다든지, 그것이 화두 드는 데는 다 망상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계속 ‘잊어야 되겠다ㆍ잊어야 되겠다.’ 하면 더욱 말하자면, 그런 방법으로 공부는 불을 끄려고 휘발유를 뿌린 것하고 똑 같습니다. 이것은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마음에 무슨 걸리는 것이 있다. 아~~ 그것 ‘잊어야 되는데ㆍ잊어야 되는데...’ 하고, 고개 흔들었다가, 막 뛰어다니기도 했다가, 우리가 별별 몸부림을 다 치지요. 그것은 그야말로 불을 끄려고 휘발유를 뿌리는 격이다. 불은 뭐냐? “無” 라고 하는 그 화두하나 챙기는 겁니다. 그 쪽으로 마음 돌려야 됩니다.
보다 더 큰 어떤 공부로 마음 돌렸을 때 다른 망상은 자연스럽게 제거 되는 것이지, 그것을 자꾸 ‘쉰다ㆍ쉰다. 쉬어야지ㆍ쉬어야지.’ 하면서 속에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끊임없이 쉬려고 노력하는 것, 이것은 쉬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千佛이 出世하더라도 안 쉰다 말입니다. 더 답답해진다.
불을 끄려고 휘발유를 뿌리는 것하고 똑같다 이 말입니다. 아주 정말 적절한 표현입니다. 대혜스님의 지도방법은요? 참 뛰어납니다.
又敎人으로 隨緣管帶하야 忘情黙照라하나니 照來照去하며
帶來帶去에 轉加迷悶이라 無有了期하리니 殊失祖師方便하고
錯指示人하야 敎人으로 一向에 虛生浪死로다
更敎人으로 是事를 莫管하고 但只恁麽歇去하라
歇得來에 情念不生하리니 到恁麽時하야 不是冥然無知라
直是惺惺歷歷이라하나 遮般底는 更是毒害로 瞎卻人眼이라
不是小事로다
又敎人(우교인)으로, 또 사람들로 하여금,
隨緣管帶(수연관대)하야, 인연을 따르고,
管帶라고 하는 것은, “관리해서 지닌다.” 그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예의주시하라.’ 그것을 끌고 가서 마음 챙기는 일. 요즘 흔히 말하는 마음 챙기는 일입니다.
隨緣管帶가 그래요. 내가 밥을 먹으면 밥 먹는 것 살피고, 내가 지금 숟가락을 들었다 놓았다라고 하는 것을 그대로 예의주시하는 것이 管帶입니다.
관리할 管자ㆍ지닐 帶자. 그대로 예의주시하는 것. 이것이 지금 비파사나에서 그렇게 가르치잖아요.
隨緣管帶해서 또는 忘情黙照(망정묵조)라하나니,
그렇게 해서 그 하고 있는 행위만 면밀히 관찰하고, 그것을 “마음 챙김” 이라고 그래요. 마음 챙기고 = 딱~ 본다 이 말입니다.
忘情黙照라. 정을 잊고 = 감정을 잊고 그것만, 사실 그대로만 본다. 이것이지요.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겁니다. 내 행위를, 밥을 먹으면 밥 먹는 것을 그대로 관찰하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생각이 잊어진다 = 忘情 = 감정이 잊어져요. 그리고 묵묵히 비춰요. 그대로, 내가 하는 행위를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 내가, 또 하나의 내가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이 것입니다. 묵조라고 하는 겁니다.
照來照去(조래조거)하며, 비춰오고 비춰가며
帶來帶去(대래대거)에, 관리해오고 관리해 감에, 지닐 去자입니다.
지녀오고 지녀감에
轉加迷悶(전가미민)이라. 더욱 迷悶함을, 답답함만 더 할 뿐이다.
無有了期(무요료기)하리니, 마칠 기약이 없으리라. 끝날 때가 없다 이겁니다. 그래 여기서 이런 묵조선과 내지 비파사나. 그래 능엄경에서 毗鉢舍那(비발사나)라고 해가지고 본래 근본불교에서 뜸이 들은 그런 수행법인데요. 중국 쪽으로 오면서 아이구 이런 식가지고는 안 되겠다 싶어서 집어치우고 화두선으로, 말하자면 발전한 것입니다. 無有了期하니, 마칠 때가 없다.
殊失祖師方便(수실조사방편)하고, 자못 조사의 방편을 잃어버리고
錯指示人(착지시인)하야 敎人(교인)으로,
사람들을 그릇되게 지시해서, 잘못되게 가르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一向(일향)에 虛生浪死(허생낭사)로다.
헛되게 살고 헛되게 죽게 함이로다. 그래 가지고는 이것이 사실 인생 헛사는 것이다. 대혜스님 표현은 그렇습니다. 인생 헛사는 것이다. 끝날 날이 없다 이겁니다. 계속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예의주시. 가만히 자기 하는 행동을 보는 겁니다.
他避不得處(타피부득처)라고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피할 수 없는 일이 있잖아요. 식사하고ㆍ잠자고ㆍ씻고ㆍ입고ㆍ벗고 하는 이런 일. 사람을 만나야 되고 하는 일. 피할 수 없는 그런 일을 그대로 하면서 그것을 그대로 예의주시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이 아주 점잖아진다고요. 그리고 교양이 있어지고요. 그리고 함부로 거칠게 행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 또 하나의 내가 뒤에서 내가 하는 행위를 바라보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나쁜 짓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나쁜 짓하는 나를 내가 또 뒤에서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예의주시하고 있으니까요. 공부 정상적으로 했을 때는 그렇게 배웠거든요. 예의주시하고 있으니까 내가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를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아주 점잖고 교양이 있습니다.
또 요즘 한국에 세계적인 명상가들이 몇 분 왔어요.
또 그저께 제 방에도, 한 두시 돼서 만났는데, 틱 낙한스님 제자들이 왔더라고요. 세계지도자 중에서는 틱 낙한스님을 제가 아주 제일 존경하는 분입니다. 저는 왜 그 분을 존경 하는가하면 법화경을 좋아하는 스님입니다. 그래서 존경해요. 그런데 그 스님 비행장에서 내려가지고 천천히, 다른 사람들은 바삐 뛰어가는데 그 일행들을 전부 거느리고 천천히 걸어가니, 저는 사정없이 욕을 퍼부어버렸지요. 한국에 왔거든 한국답게 막 뛰어가고, 비가오든지 눈이 오든지 사정없이 뛰어가고 그래야 될 텐데, 비가와도 그만 눈이 와도 그만 천천히 점잖게 그렇게 걸어가는 겁니다. 무슨 점잖은 것이 밥먹여 주나요?
그런데 이 간화선하는 선객하고, 비파사나하는 선객하고 성격의 차이가 싹~ 납니다. 성격을 그렇게 만들어요. 그리고 그것은 너무 우리 보기에 안 맞는 겁니다. 아주 존경은 하면서도 그 점은 저도 안 맞아요. 말씀드렸듯이 존경하는 것은 그 분이 법화경에 아주 조예가 깊어요. 법화경을 아주 깊이알고, 제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경전 중에 제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밤에 법화경을 읽으면, 그 분이 시인이잖아요. 본래 시인출신입니다. 밤에 법화경을 읽으면 뭐 하늘에 별이 빛나고, 이런 식으로 표현해 놨어요. 그 전엔 저하고 똑 맞아 떨어져 가지고 그래서 아주 존경 했지만, 공항에서 내려가지고 그 떼거리들을 데리고 천천히, 다른 사람들은 다 뛰어가고 있는데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그 모습을 제가 욕을 퍼부어버렸어요. 누가 뭐라고 하든지 간에, 저는 저 나름대로 평생 살아온 소신이 있으니까요.
아무튼 사람으로 하여금 一向에 虛生浪死로다. 헛되게 살게 한다.
更敎人(갱교인)으로, 다시 사람으로 하여금
是事(시사)를 莫管(막관)하고, 그 어떤 일도 관계치 말고
但只恁麽歇去(단지임마헐거)하라. 다만 이렇게 쉬어라.
“이렇게 쉬어라.” 어떤 상황이 되든지, 비가오든 폭우가 내리든 공항에서 내렸든 비행기가 떠나든 말든 간에, 나는 천천히 걸어가면서 쉬어라ㆍ쉬어라. 한 생각 쉬어라. 걸어가는 내 발자국 하나하나를 예의주시하고 한 생각 하지도 말라. 빨리 걸어가면 예의주시 할 수가 없잖아요. 천천히 걸어야 내 마음이 그것을 다시 관찰하고, 아, 내가 이렇게 오른 발을 내미는 구나ㆍ왼발을 내미는 구나. 이렇게 하라는 겁니다. 오른 발을 낼 때는 오른 발을 내밀고, 왼발을 낼 때는 왼발을 내민다. 제가 이 비파사나 비판하기 위해서 비파사나 공부 상당히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겁니다. 오른 발을 내밀 때는 오른 발을 내민다. 왼발을 내밀 때는 왼발을 내민다. 이 바쁜 현실에 어쩌자는 말인가요? 해결책이 안 됩니다. 여기도 그래 놨습니다.
모든 일을 관계치 말고 다만 그렇게 쉬어가고 쉬어가라.
歇得來(헐득래)에, 쉬어 오면
情念不生(정념불생)하리니, 감정의 생각이, 감정이 생기지 아니하리니, 그렇지요. 자기가 하는 어떤 행위도 또 하나의 내가 있어서 가만히 예의주시하면 다른 감정 안 생깁니다. 情念不生하리니,
到恁麽時(도임마시)하야, 이러한 때에 이르러서
不是冥然無知(불시명연무지)라. 캄캄해서 무지한 것이 아니다.
直是惺惺歷歷(직시성성역력)이라하나니,
이것은 바로 성성하고 역력하고, 그런 경지라고 하지만
遮般底(차반저)는, 이러한 문제는
更是毒害(갱시독해)로 瞎却人眼(할각인안)이라.
독약가지고 다른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일이다.
不是小事(불시소사)로다. 작은 일이 아니다. 참 큰일 났다. 말입니다.
대혜스님의 안목에서 보면 웃기지도 않은 일이고, 아니, 웃기지도 않은 일 정도가 아니고 이건 큰일이다. 시주 밥 먹고 어찌 그렇게 공부를 하고 있느냐? 이겁니다. 1000 여 년 전 대혜스님의 법문이지만, 이렇게 공부하는 사람은 이 시대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 여기에, 이 비판 속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뭐 아무튼 세상은 복잡해졌고 다양하니까 이런 경우도 있고 저런 경우도 있지만, 우리가 간화선의 지침서, 서장을 두고 이야기하는 마당이니까, 그러니까 이런 때 그런 소리 실컷 해야지요.
첫댓글 벗님을 존경합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님께서는 꼭 성불하실 것입니다.
업장은 소멸되고,바른 깨달음얻어지이다.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성불도
나무아미타불 _()_